느림보 창작 수필/껍질벗기(깨달음)

독버섯

느림보 이방주 2012. 8. 26. 17:49

독버섯

 

  

  등마루에 올라섰다. 골바람이 제법 삽상하다. 바람에 가을 냄새가 묻었다. 길은 충분히 젖어 있다. 하늘이나 사람들이나 다 지겨워하는 비가 아침에 반짝 그쳤다. 등마루에서 보이는 비탈에는 지난가을 활엽수나 소나무가 벗어놓은 낙엽이나 솔가리가 수북하다. 가을 풀꽃이 예쁘다. 싸리꽃이나 으아리꽃도 예쁘고, 때를 놓쳐 늦게 피어난 원추리도 청초하다. 노란 마타리꽃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키재기를 한다. 

 

  미동산에는 우거진 녹음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가을빛으로 파랗게 물들이기를 시작했다. 하얀 명주실구름이 흩어져 더 파랗게 보인다. 하늘이나 수목원이나 세상은 철마다 이렇게 곱디 고운 색으로 물들이기를 한다. 가을이면 우리도 한 가지 삶의 색깔을 더하듯이……. 

 

  빗물을 흠씬 먹어 일렁일렁하는 나무 위자에 앉았다. 등마루에서 남쪽 비탈에 젖은 낙엽을 비집고 하얀 생명이 솟아올랐다. 버섯이다. 쌓여있는 낙엽 위로 잡풀 한 촉 나오지 못했는데 어떻게 솟아났을까? 순간 나는 신비스런 생명력에 가슴이 뭉클했다. 버섯의 행렬은 끝간데가 없다. 하얀 무명 헝겊을 늘어놓은 것 같다. 두루마리 화장지를 풀어 놓은 것 같다. 두세 송이가 무더기를 만들며 한 줄로 늘어섰다. 마치 피난 행렬 같기도 하고, 하얀 제복을 입은 해군 장교들의 행군 같기도 하다. 

 

  티끌 하나 묻히지 않아 하얗고 깨끗한 버섯의 행렬, 그러나 그것은 독버섯이었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그것이 독버섯이라는 결론을 내리자 신비스럽던 감정이 사그라지고 지독하게 창궐하는 독에 치가 떨렸다. 독은 이렇게 희고 순결한 외양을 갖고 있다. 자연은 아름다운 것만 보내주는 것은 아니었다. 성폭행, '묻지마' 살인, 정치인들의 비리와 표리부동한 행태, 정치인을 닮아가는 문단 등 최근에 우리 사회에 연달아 일어나고 있는 독버섯 같은 사건들이 생각나서 소름이 돋았다. 독은 이렇게 희고 순결한 모습으로 사람을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무서운 독일수록 외양은 더욱 순결한 모습으로 남을 기만한다. 또 지하에 뿌리를 두고 맹렬한 생명력으로 여기저기 뻗어간다.

 

  그 생명력에 현혹되었던 나는 눈곱만큼의 미련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등마루 보드라운 길을 걸으며 독버섯의 무서운 행렬이 자꾸 덤비는 것 같아서 몸을 움츠렸다. 그런데 이름도 모를 똑같은 독버섯은 열을 지어 여기저기에서 시도 때도 없이 나에게 달려든다. 아니, 나에게 덤비는 것이 아니라 온 산에 하얀 독의 행렬이 여기저기에서 마루로 향하고 있었다.

 

  독은 왜 그렇게 지독할까? 그런데 갑자기 인간은 버섯에게 독이 된 적이 없을까 하는 무서운 생각이 났다. 우리는 다른 생명들에게 독이 되지 않을까? 다른 사람에게 독이 되지 않을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남에게 독이 아닐까? 내가 뱉어내는 말은 남에게 독버섯이 되지 않을까? 내가 하는 생각은 나에게 독버섯이 아닐까? 내안에는 독버섯 같은 사고가 행렬을 지어 나를 향하여 치닫고 있는 건 아닐까?

 

  아, 나도 남에게 독버섯이 되는 때가 있겠구나. 나의 생각, 말, 일거수일투족이 남에게, 나 자신에게 독버섯이 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의 문학이 독이 되어 스멀스멀 남의 사상을 좀먹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의 사상이 독버섯이 되어 나의 내면을 파고들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 그렇구나. 나도 독이 될 수 있구나. 내가 남의 독이고 내가 나의 독이구나.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다른 생명에게 독이 될 수도 있구나.

 

  산에서 내려왔을 때 문득 독버섯을 독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용기가 잦아들었다.

 

(2012. 8.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