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답사/忠淸의 山城

대전시 동구 백골산성 답사

느림보 이방주 2011. 6. 20. 06:48

2011년 6월 19일

 

오늘은 백골 산성을 가고 말리라. 어제 호점산 등산을 했기에 아침에 조금 피곤했다. 내일 문장대 등산을 하기로 되어 있어 조금 망설이기는 했지만 아침에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출발했다. 학교에 가서 백골산 지도를 출력해서 출발하려는데 3학년 담임 선생님들이 출근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내가 3학년 담임이나 부장을 할 때 별일 없이 학교에 들른 선생들을 보면서 참으로 부러워 했던 일이 생각 나서 죄 지은 일도 없이 미안스러웠다.

 

학교에서 나와 3차 우회도로를 거쳐 고은 삼거리 두산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피반령을 넘었다. 회남을 지나 도계를 넘으면서 진고개 식당을 내비에 입력했으면서도 주변을 살피며 천천히 달렸다. 신하동 진고개 식당 옆에 차를 세우고 살펴보니 '진고개식당'이라는 간판 옆에 아주 작은 백골산 입구라는 이정표가 보였다. 바로 출발했다.

백골산성 白骨山城

주소 대전 동구 신하동 산13

시       대 : 백제
소  재  지 : 대전 동구 신하동
규       모 : 지정면적 4,343㎡
지정 사항 : 대전기념물 제22호

백골산성은 대전광역시 동구 신하동 해발 340m의 백골산 정상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쌓은 산성으로 둘레는 400m이다. 이 산성은 산의 정상부를 둘러쌓고 있는데, 이러한 형태를 테뫼식 산성이라 한다. 성벽은 가파른 지형에 쌓여진 까닭에 완전히 무너져 내린 부분이 많아 원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백골산성의 서쪽으로는 백제의 전략 거점인 계족산성이 있고, 동쪽으로는 신라의 유명한 관산성을 끼고 있어 백제가 신라로 들어오는 유일한 길목을 지키는 초소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인공호수인 대청호가 버젓하게 자리를 잡고 있지만, 성이 축조될 당시만 해도 신라를 마주 보고 금강이 흐르고 이어 육로와 수로를 지키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백골산성에서 바라본 대청호의 모습

 

조금 올라가니 백골산 등산 안내도가 보인다. 지도보다 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백골산에서 신상동 주차장으로 내려오든지, 반대 방향으로 시도계를 지나 청주 절골로 내려 오면 바로 대청호숫길 5-2코스의 일부라고 한다. 내일 등산만 아니라면 신상동 주차장에서 백골산을 지나 시도계를 지나 청주 절골로 내려오는 길을 밟아 보고도 싶었지만 참았다. 뒤로 미루고 오늘은 백골 산성만 답사하고 내려 오기로 혼자서 마음 먹었다. 등산로는 아주 평탄하고 걷기 좋았다. 그늘에다가 흙길이고 대전시에서 정비를 잘 해 놓았다. 다만 등산객이 한 명도 없었다. 아닌게 아니라 등산 하기에는 너무나 더운 날씨이다. 그래도 쉬지 않고 걸었다. 땀이 비오듯한다.

 

등산로 입구의 등산 안내도

 

진고개 식당 옆에 있는 보일까 말까하는 백골산 안내 이정표

평탄한 등산로

 

땀에 온몸이 젖을 때쯤 안부에 올랐다. 이정표에는 백골산성이 500m 쯤 남았다고 되어 있다. 더 가파른 경사이다. 500m쯤 남았으면 이제부터 성의 윤곽이 드러나야 하는데 전혀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정상에 거의 올랐을 때쯤 잡초와 잡목 속에 돌 더미가 보였다. 그러나 성의 모습이라기보다는 그냥 돌더미 같았다. 나무를 헤치고 주변을 둘러 보았다. 분명히 성의 흔적이다. 잡초를 헤치고 성돌을 헤집어 보았다. 돌은 상당히 크다. 회남의 호점산성과 같이 점판암이 아니라 커다란 돌덩이다. 주변에는 돌을 주워 올만한 곳이 없다. 이 돌은 이 산이 아닌 곳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라 추측되었다.

 

 정상에 오르니 절경이다. 여기부터 북으로 회남 문의로 갈라지는 물길이 확연히 보인다. 그것은 이 산성에서 회남을 거쳐 보은으로 향하는 길도 관측이 되고 문의를 거쳐 청주로 향하는 도로도 관측이 된다. 서쪽으로는 계족산성이 코 앞이다. 계족산성으로 넘어가지 전에 있는 뾰족한 봉우리가 바로 개머리 산이다. 여기서 올려다 보니 개머리산(견두산성)을 넘어 계족산성이 뚜렷하게 보인다. 동으로 바라보니 고리산성이 있는 환산이 바로 거기이다. 기슭에 있는 집들이 손에 잡힐 듯하다. 남으로 바라보니 식장산이 보인다. 환산과 식장산 사이에 관산성이 거기이다. 관측의 범위가 이렇게 넓으니 여기가 요새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높은 산은 아니지만 주변이 다 보인다. 

 

정상에서 주변을 조망하다가 다시 성의 흔적을 확인하려고 주변을 돌았다. 그러나 누군가 이런 곳을 많이 다니며 고증을 한 사람과 함게 다녀야 나도 뭘 배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의 흔적으로 짐작은 되지만 확인할 수 있는 앎이 내게는 없다. 커다란 참나무 아래 납작한 돌을 놓고 앉아서 여기서 죽었다는 29600명의 백제인을 만나 보려 애썼다. 나는 노트를 펴놓고 그 위에 그들이 나타나 내게 당시의 삶을 이야기 해주기를 바랐다.

백골산에서 바라본 대청호 왼쪽으로 문의 후곡리 쪽의 물길이 보인다. 멀리 높은 산이 샘봉산인듯

문의과 회남으로 갈라지는 호수 가운데 섬이 있다.

정상에 이정표

정상의 백골산 안내판

무너진 성벽-저 돌더미에 백제의 원혼이 지금도 묻혀 있을까?

무너진 성돌

성의 흔적

성을 쌓은 그들은 1500년 쯤 후에 이렇게 잡초에 묻힐 것을 알았을까

성의 흔적

 

신탄진 조정지 댐에서 옥천으로 이어지는 대청호수 길이 보인다. 가운데 멀리 계족산성이 보이고 그 앞이 바로 견두산성이다. 도로가의 마을이 그림처럼 보인다. 물이 많이 줄었다.

소나무 아래 먹는 것 좋아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꽃님이 반도이다

식장산과 대전 시가

멀리 후곡리

꽃님이 반도-물이 줄어 징검다리처럼 되었다.

야생화

야생화

 

바닥에 주저 앉아 글을 한편 썼다. 주변에 거대한 참나무나 길어올린 흙도 모두 사실은 백제의 원혼이다.이제는 저렇게 물에 다 묻혀 버릴 땅을 지키고 빼앗으려고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버린 것이다. 혼자서 한 시간은 앉아 있었다.

 

백골산은 높지는 않지만 주변을 다 관측할 수 있는 산세이다. 성벽은 산 정상부에 지형을 따라 축조한 테메식 산성이다. 산 정상부에서 보면 가파른 모습을 볼 수 있는 그것이 성벽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가파른 지형을 이용해서 축조했을 것이다. 아무튼 원래의 모습을 찾아 보기는 힘들었다.

 

백제 멸망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관산성 전투는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지난 번에 옥천 관산성에 갔을 때 거기를 삼성산이라고 했고 그곳이 바로 관산성이라고 하는데 거기서 그렇게 큰 전투가 벌어졌다고 하기에는 성의 규모가 너무 작았다. 그리고 백제의 여창이 신라의 관산성을 빼앗아 군사를 주둔시켰다면 거기서 빤하게 보이는 구진벼루에서 부왕이 시해 되었을까? 환산(고리산성)이 오히려 그 규모로 보나 산의 험준함으로 보나 대규모의 부대가 주둔하였고 그런 곳에서 대규모의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을까? 아니면 관산성이나 고리산성에서 쫓긴 백제 군사들이 이곳 백골산에서 오합지졸이 되어 전멸당한 것일까? 그래서 백골 산성이 되지 않았을까? 여기는 바로  환산성 뒤편에 자리 잡고 있는 백골산이 아닌가?

 

물이 줄어 더 아름다운 대청호

 

내려오는 길이 씁쓸하다. 1500년 전의 전설같은 이야기를 두고 너무 상심할 필요는 없다. 나는 공연히 생각이 많아 스틱 두개를 다 꺼내 비탈길을 조심하여 내려왔다. 미끄러지지 않으려는 생각에서다.

정비된 등산로

전망 좋은 곳에 있다는 정자는 활엽수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돌아 오는 길도 회남을 되짚어 왔다. 배가 고프고 졸렸다. 이제 부근의 성들이나 산봉우리들이 눈에 들어 온다. 다음에는 견두산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