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의 관산성과 구진벼루
2011년 6월 5일
오늘은 옥천의 구진벼루와 관산성을 가기로 했다. 아침 운동을 나갔다가 조금 늦게 들어 왔다. 시간이 늦었지만 그래도 오늘 계획은 실행해야 한다. 집에서 9시가 넘어서야 출발했다. 시간이 늦어 고속도로로 들어 갔다. 청원 나들목에서 들어갔는가 싶은데 금방 옥천이다. 먼저 구진벼루를 가기로 했다. 그래야 관산성에 올라서 구진벼루를 뚜렷하게 내려다 볼 수 있을 것 같아서이다. 내비에 월전리를 입력하고 출발했기 때문에 옥천읍내로 들어가서 바로 월전리로 향할 수 있었다. 옥천읍에서 월전리로 들어가는 37번 도로 이름이 성왕로이다. 성왕로는 옥천에서 추부를 거쳐 부여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국궁연습장인 관성전 못미처에서 우회전하여 다리를 건너면 월전리로 들어갈 수 있다.
월전리 마을은 뒤편 서북쪽으로는 야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앞에는 금강의 줄기의 시냇물이 굽이쳐 흐른다. 마을 쪽으로는 평평한 농지가 형성되어 있고, 시냇물을 건너는 절벽이고 기암기석이 녹음 속에서 불쑥불쑥 얼굴을 내밀고 있다. 아주 평화스러운 마을처럼 보였다. 지리 교과서에서 우리나라 농촌을 설명하는 표본같은 농촌 마을이다. 마을 앞을 지나 구진벼루를 지나면 바로 고리산으로 넘어가는 소로가 있다. 요새라고 할 수 있다. 마을 남쪽으로 관산성 용봉 동평성 마성산 장령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있고, 서북쪽으로 서대산이 우뚝 그 보기 흉한 통신탑을 이고 서서 대전과 경계를 이룬다. 아마도 서대산은 옛날에는 봉화대가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전파의 봉화대가 서 있는 것이다.
강둑에 난 시멘트 포장 도로를 따라서 계속 내려가니 냇물이 한번 구비치고, 절벽과 농지의 위치가 뒤바뀐 즈음에 성왕 유적비가 세워져 있었다. 아, 그런데 카메라가 말을 듣지 않는다. 방전된 배터리를 바꾸어 끼려 한 것을 깜빡 잊고 그냥 온 것이다. 나는 나에게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성왕은 태자 여창이 이끄는 백제군을 격려하기 위해 이곳을 지나 고리산성으로 가다가 이곳에서 생포되어 최후를 맞이했다. 재위 31년간이나 백제의 중흥을 위해 많은 업적은 남긴 왕이 이 자리에서 한낱 신라의 병졸에게 목을 늘이고 참수를 기다렸다는 것이 참으로 어이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주변에 태자의 휘하 군사들이 진을 치고 있는 그 안에서 말이다. 부왕의 목을 받아든 젊은 태자는 이성을 잃고 흥분하여 작전도 없이 신라군에게 덤볐을 것이다. 성왕이 거동한다는 첩보를 듣고 이곳에 침투부대를 잠복시킬 정도로 노련한 신라의 김무력(김유신 할아버지)은 젊은 태자의 이런 무모한 공격을 노렸을 것이다. 고리산성, 관산성, 백골산성 등에서 29600명의 군사가 전멸했다고 역사는 전한다. 백제는 여기서 모든 국력을 냇물에 피로 흘려 보낸 것이다.
여기서 우두커니 유적비를 바라보다가 관산성으로 향했다. 월전리 성왕사절지는 관산성에서 서북으로 800m 거리에 있다는 데 이곳에서 관산성이라고 생각되는 산 줄기를 바라보니 1km는 족히 될 것 같았다. 지도상으로 보면, 여기서 남쪽 산줄기에 관산성지, 용봉, 동평성, 마성산 줄기가 뚜렷하다.
월전리와 관산성지 알려주는 주변 지도
마을에서 바라본 관산성 용봉 산 능선(사진은 인터넷에서 복사해 온 것임)
구진벼루 멀리 성왕 사절지 유적비가 보인다.
최근에 세운 유적비
관산성 입구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지도와 옥천에 근무하신 적이 있는 민병택선생님(역사)이 일러 주신 대로 찾으려 해도 숲이 우거져 찾을 수 없다. 차를 세워놓고 한참 입구를 찾으며 서성이다가 군립 유치원이 있는 가화리 현대 아파트 뒤로 돌아가니 아파트 주민들이 올라가는 계단길이 있었다. 이곳에서 산행하는 어느 분에게 물으니 관산성을 잘 알지 못한다. 지도를 보여 줬더니 지도상으로 이곳이 맞는다고 한다. 지도와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이곳이 맞을 것 같다. 그런데 들머리에 삼성산 체육공원 입구라고 이정표가 있었다. 망설이다가 그냥 올라갔다.
사람들이 많이 다녀서 길은 아주 좋다. 그러나 가파르다. 숨이 가프다. 기온은 한 30도쯤 되는지 땀이 비오듯 한다. 연신 물을 마시게 된다. 능선을 잡는데 몇 분 걸리지 않았다. 능선길을 만나니 지도에 표기된 관산성 입구에서 오는 길과 만났다.
올라가는 길에 팔각정이 있다. 정자에서 옥천읍이 다 내려다 보였다. 멀리 지난 주에 종주한 고리산이 보인다. 반갑다. 월전리가 보일듯 말듯 한다. 정자에서 쉬면서 지도를 다시 확인했다. 여기가 맞는다. 그런데 왜 삼성산성이라 할까? 성터가 세개가 있어 최근에 붙인 이름일까? 능선을 따라 올라 가면서 등산로를 가만히 살펴보니 꼭 토성같이 보였다. 그냥 능선이 아니라 누군가 담장을 쌓아 올린 것처럼 보였다. 우암산 토성처럼 확연하지는 않지만 성터가 분명하다. 그러고 보니 백제 때는 토성이었던 것을 조선 시대에 석축을 쌓은 것이라는 기록을 본 기억이 났다.
한 날망에 오르니 운동기구가 있고 성을 쌓은 흔적과 함께 표지석이 있다. 그런데 삼성산성(三城山城)이라고 했다. 뒷면에 이 성터가 관산성으로 추정된다는 기록이 있다. 지도에는 분명히 관산성지로 나왔는데 왜 삼성산성이라고 했을까? 표지석에 적혀 있는 모든 내용이 관산성과 같다. 성은 표지석 설명대로 삼태기 모양으로 생겼다. 다른 산성과는 다르게 세 겹의 성벽을 가졌는데 남측 성벽은 능선을 따라 동서로 길게 늘어져 있고, 북측 성벽은 산의 정상 쪽에서 아래 쪽으로 삼태기처럼 처져 있다. 아내가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성은 능선 부근에 쌓은 것처럼 보이는데 가만히 주변을 살펴보니 능선에서 한 7~8m 아래쪽으로 흙에 덮인 석축이 보였다. 그리고 돌 무더기가 계속되어 있다. 무더기로 보아 성의 높이가 꽨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성 안의 높은 부분은 무엇일까? 아마도 망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돌무더기를 헤치며 기와편이 있을까 살펴 보았지만 없었다. 그러면 능선 가까이에 있는 석축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무래도 최근에 마을 어른들이 성돌을 주워다가 '예전에 이렇게 쌓았겠지' 하는 생각으로 쌓아 놓은 것 같다. 길이가 900m에 이르고 삼태기형이라고 적혀 있다. 지도에서는 관산성, 동평성을 모두 테메식 산성으로 그려 놓았다. 표지석에 적힌 글은 다음과 같다.
삼성산성三城山城
■위치: 옥천군 옥천읍 양수리·군서면 월전리 사이 삼성산 해발 303m■시대: 삼국시대
■형태: 삼태기형 석축, 토석 혼축/ 둘레 900m
삼성산성은 삼국시대 신라, 백제 접경지대에 쌓은 관산성으로 추정된다. 관산성은 서기 554년 삼국시대 신라, 백제의 운명을 건 관산성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백제 부흥을 꿈꾸던 성왕이 신라군에게 사로잡혀 목숨을 잃은 역사현장으로 추정되는 구진벼루가 휘돌아 흐르는 월전리 앞 서화천을 따라 길게 이어져 있다.
성은 삼태기 형태로, 석성 외곽에 외성으로 보이는 토루 흔적이 있다. 남서쪽과 북동쪽에 각각 망대지와 문지가 있으며, 산성의 중앙에는 장대지와 우물터가 있다. 발 아래로 옥천읍내를 한 눈에 볼 수 있고, 돌아서면 말무덤재, 군전이, 염장이, 구진벼루 등이 펼쳐져 격전장이었음을 알려준다. 남쪽 산줄기를 따라 용봉산성, 동평산성, 마성산성 등이 연이어진다.
2009년 10월 일
옥천군 ․ (사)옥천향토사연구회
가화리 현대아파트 뒤쪽에서 체육공원으로 올라가는 길
팔각정에서 내려다 본 옥천 시내(영동으로 내려가는 국도가 보인다)
옥천시내(멀리 시내 왼쪽으로 경부고속도로가 보인다)
꼭 토성 같은 능선길
관산성지의 남은 돌-최근에 쌓은 것으로 보였다.
표지석- 뒷면에 여기가 관산성지로 보인다는 설명이 있다.
능선 아래에 있는 석축의 흔적
【관산성 [管山城] 】
충청북도 옥천군에 있던 삼국시대 신라의 성(城).
신라와 백제가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대항하여 동맹관계를 유지하다가 신라가 나제동맹을 깨고 백제의 영토인 한강유역을 점령하였다. 이것이 산성전투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554년(신라 진흥왕 15) 백제는 일본에 원군을 청하고, 대가야와 연합하여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백제는 크게 패배하여 성왕(聖王)은 전사하였다.
관산성이 양군의 결전장이 된 것은 이 지역이 신라로서는 새로 점령한 한강하류지역을 연결시켜주는 전략적 요지이기 때문이다. 그뒤 양국관계는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적대관계가 계속되었다. 관산성의 위치는 백제 성왕사절지(聖王死節地)로 전해지는 충청북도 옥천군 군서면 월전리 9-3번지 부근과 이곳에서 맞은 편 서북쪽으로 약 800m 떨어져 있는 지역으로 추정하고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
성왕 [聖王, ?~554]
백제의 제26대 왕(재위 523∼554 명농). 웅진에서 사비성으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로 변경하였다. 지방통치조직 및 정치체제를 개편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대외적으로는 양나라 및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일본서기≫에는 성명왕(聖明王)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휘(諱)는 명농(明襛)이며 무령왕(武寧王)의 아들이다. 무령왕과 함께 백제의 영주(英主)라 일컬어진다. 523년 패수(浿水)에 침입한 고구려군을 장군 지충(知忠)으로 하여금 물리치게 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양(梁)나라 고조(高祖)와 국교를 강화하여 고조로부터 '지절도독백제제군사수동장군백제왕(持節都督百濟諸軍事綏東將軍百濟王)'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529년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 큰 피해를 입은 후 고구려에 대해서는 신라와 동맹을 맺어 공동으로 대처하였으며, 532년 금관가야(金官伽倻)가 신라에 항복하자 왕은 잔존 가야제국(伽倻諸國)을 회유하여 표면상으로는 신라에 대하여 적대(敵對)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실제적으로는 가야의 분할을 획책하였다.
538년 협소한 웅진(熊津:충남 공주)으로부터 광활한 사비성(泗沘城:충남 부여)으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고쳤으며, 중앙의 22부(部), 지방의 5부(部)·5방(方)제도를 이때 실시한 것으로 추측된다. 541년 양(梁)나라로부터 모시박사(毛詩博士)·공장(工匠)·화사(畵師) 등을 초빙하고 《열반경(涅槃經)》 등을 들여와 문화중흥을 이루고자 하였다.
550년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쳐서 빼앗고, 그 이듬해에는 신라와 함께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漢江) 유역을 공격하여 76년간이나 고구려에 빼앗겼던 군(郡)을 되찾았다.
552년 일본에 노리사치계를 보내 일본에 금동석가상 1구, 미륵석불, 불경을 전했다. 이 밖에 오경박사, 역박사, 의박사 등을 일본으로 보내 학술과 전문지식을 전수하였다.
553년 백제가 병합하려는 한강 유역을 신라가 차지하자 신라에 보복하기 위해 이듬해 일본에 구원병을 청하는 한편, 왕자 부여창(扶餘昌:27대 위덕왕)과 함께 친히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신라의 군주(軍主) 무력(武力)에게 대패하고 관산성(管山城)에서 신라의 복병(伏兵)에 의하여 전사하였다.
성왕상 (인터넷에서 빌려온 사진)
그러나 그의 치적 중 특기할 만한 것은 사비(泗沘)로 천도하였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천도와 동시에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하였다고 나와 있다. 지금 ‘부여’라는 지명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사비 천도는 이미 동성왕 대부터 추진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동성왕은 동왕 12년과 23년 10월·11월 등 세 차례에 걸쳐 사비의 벌판에서 사냥을 하였다. 이는 단순한 사냥이라 볼 수 없고 사냥을 핑계 삼아 사비의 지형 지세를 살피고 민심을 엿본 것이었다. 또 23년 8월에는 가림성을 쌓고 백가로 하여금 지키도록 했다. 가림성은 현재의 부여군 임천면에 있는 성흥산성으로 비정되는데 이는 천도 후 북방 경비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나 한다. 그러나 동성왕은 천도에 실패하였다. 그러다가 성왕대에 와서 천도가 단행된 것이다.
이 사비 천도에도 웅진 천도처럼 이 지역의 지방세력에 의한 권유가 작용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이 지역의 지방세력이란 다름 아닌 ‘사씨(沙氏)’ 세력이었다. 사씨 계열의 인물로는 이미 동성왕 6년 양 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된 바 있는 내법좌평 사약사(沙若思)가 있었다. 성왕 대에 정계에서 활약한 사씨 세력은 잘 찾을 수 없지만 이들의 영향력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들이 천도 후보지로 사비를 추천한 것은 사비가 넓은 들판을 갖고 있어 사방으로 뻗어나가기가 용이하였고 부소산성과 같은 방어시설을 쉽게 조성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비 천도 이후 성왕은 내부의 결속과 영토 회복을 꿈꾸었다. 즉 겸익과 같은 승려를 등용하여 불교의 진흥을 꾀했다. 국가의 정신적 토대를 강화하는 데 불력의 힘을 빌고자 했던 것이다. 그의 시호 ‘성왕’은 무력이 아닌 불법의 수레바퀴를 굴려 세계를 통치하는 ‘전륜성왕(轉輪聖王)’에서 따온 것이었다. 외교문제도 소홀히 하지 않아, 중국 양나라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한편 왜국에도 문물을 전달해주었다. 이로써 문제 발생 시 든든한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우방을 만들어놓았다.
이제 남은 것은 고구려에 빼앗긴 땅을 되찾는 일이었다. 그는 신라와의 동맹관계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다. 그리고는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그 결과 동왕 18년(540) 고구려의 우산성을 쳤으나 패했고 동왕 26년(548)에는 고구려의 침략을 신라와의 공동작전으로 격파했다. 동왕 28년에는 고구려의 도살성을 공격해 함락하였으며, 다음 해에는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해 격파하기도 했다.
이즈음 신라에서는 한창 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신라는 지증왕(智證王 : 499∼514)대에 뒤늦게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 지증왕은 우경(牛耕)을 장려하여 농업생산성을 증대시켰다. 국호도 새롭게 ‘신라(新羅)’로 정하였고, ‘마립간(麻立干)’이라 하던 칭호도 ‘왕(王)’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법흥왕(法興王 : 514∼540)대에는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가 더욱 갖추어졌다. 그는 율령을 반포하여 국가의 시책에 따르지 않는 자를 처벌하였다. 또 ‘건원(建元)’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도 사용하였는데, 중국과 대등하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법흥왕 14년(527) 불교를 공인하여 새로운 이념에 입각한 체제 정비를 꾀하였으며, 영토확장도 시도하여 법흥왕 19년(532) 김해의 금관가야를 병합했다.
뒤이어 법흥왕의 조카인 진흥왕(眞興王 : 540∼576)이 7세의 나이에 즉위한다. 처음은 어머니의 섭정을 받았으나, 19세 때인 진흥왕 12년(551) 친정을 시작하며 ‘개국(開國)’이란 연호를 사용했다. 진흥왕이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은 영토확장이었다. 진흥왕 11년(550), 백제와 고구려가 싸우는 틈을 타서 그는 이사부를 파견하여 백제가 함락시켰던 도살성(道薩城)과 금현성(金峴城)을 차지했다. 동왕 12년에는 고구려가 돌궐의 침입 때문에 북방에 신경을 돌렸을 때 거칠부 등 8장군을 보내 고구려의 10성(城)을 차지했다. 한편 백제와 신라는 공동작전을 통하여 한강 유역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진흥왕은 백제가 차지하기로 했던 한강 하류지역을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군단을 배치하였다.
이에 성왕은 자기의 딸을 신라에 시집보냈다. 땅을 빼앗긴 성왕이 딸을 시집보낸 것은 신라를 방심시켜놓고 보복할 시간적 여유를 얻고자 함이었다. 신라는 백제를 무시할 수 없어 왕녀를 제2비로 삼기는 하였지만, 앞으로 있을 백제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결국, 백제가 신라의 관산성(管山城 : 충북 옥천)을 공격함으로써 양국 간에 전투가 벌어졌다. 백제와 가야·왜의 연합군은 성왕의 아들 여창(餘昌)의 지휘로 관산성 근처의 구타모라(久陀牟羅)에 요새를 구축하고 있었는데, 왜군의 선봉대가 화공작전을 벌여 관산성을 함락하였다. 이에 놀란 신라는 북쪽의 신주(新州) 군주(軍主) 김무력(金武力 : 김유신의 할아버지)의 군대를 동원하고 전국에서 군대를 징발하여 관산성 탈환을 꾀하였다. 그러던 중 성왕이 직접 전쟁터에 온다는 말을 듣고 간첩을 이용하여 그 진로를 탐지하였다. 삼년산군(三年山郡 : 충북 보은)의 한 지휘관이었던 도도(都刀)의 지휘를 받은 복병은 성왕이 오는 길목을 차단하고 성왕을 습격하여 전사케 하였다. 이를 계기로 신라군은 군사를 휘몰아 관산성을 탈환하는 한편, 좌평 4인과 백제군사 2만 9천 6백 명을 전사시켜 크게 이겼다.
당시 백제는 수도의 천도로 인한 대규모 토목공사와 빈번한 전쟁으로 농민과 군사들이 피곤에 지쳐 있었다. 또 전투에 앞서 왕족과 귀족의 견해가 일치하지 못하였다. 기성 귀족들은 이 전투를 반대하였으나 젊은 태자 여창은 이를 무시하고 전투를 감행하였다. 무리한 전투 결과 백제는 그때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던 가야 지역을 잃었고, 신진 귀족세력들이 등장하여 왕권이 위축되었다. 또 비옥한 한강 유역을 빼앗김으로써 중흥의 기회를 상실하였다. 고구려를 격퇴하는데 잠시 신라의 힘을 빌었지만 오히려 동맹국 신라의 공격으로 곤경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무 령왕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성왕(聖王 : 523∼554)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통치 전반기는 고구려의 침략과 기존 대외 관계의 지속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가 즉위하자마자 고구려군이 패수(浿水)에 이르렀으므로 좌장(左將) 지충(志忠)에게 명하여 이를 격퇴시켰다. 이러한 고구려의 침략 속에서 그는 신라와의 우호 관계를 돈독히 하였고 양 나라와의 교류도 지속하였다. 성왕 2년(524) 양 나라에서 성왕을 “지절도독·백제제군사·수동장군백제왕(持節都督·百濟諸軍事·綏東將軍百濟王)”에 책봉하자 몇 년 뒤에 양 나라에 사절을 보내 통교하였다. 이어 그는 이듬해에 신라와 사절을 교환하여 동맹을 확고히 하기도 했다. (대전일보)
갑자기 힘들어 하는 아내를 달래서 용봉까지만 올라가기로 했다. 올라가는 길에 처음 만나 길을 가르쳐 준 옥천 사는 중년 남성을 만났다. 옥천이 고향이고 계속 옥천에서 살아왔다고 한다. 고향에 대한 애착이 많고 정부에 대하여 원망이 많았다. 오늘날 옥천 경제를 이렇게 형편없이 만든 정치 세력에 대한 불만이 많다. 예를 들어 한국조폐공사의 조폐창을 다른 지역으로 이전한 것이나 담배원료공장을 이전한 것이 이 지역에는 타격이 크다고 한다. 그런 지방 경제의 중심이 되는 것들이 나라를 지배하는 권력이 자신의 고향이나 배경 지역으로 옮겨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내가 '만약에 성왕이 이 전투에서 이겼다면 지금 역사가 어떻게 되었겠느냐'고 말을 건네 보았다. 거기에는 답이 없다. 그렇다고 자신의 생각이 없는 것을 아닐 것이다. 관산성에는 성왕의 아들인 여창의 휘하 군대가 주둔했고 고리산성에도 여창이 주둔했고, 주변은 모두 백제의 세력에 있었기에 성왕은 마음놓고 부여에 탄현을 넘어 구진벼루를 거쳐 고리산성으로 가려고 했을 것이다. 그는 옥천 주민들은 착하고 인심 좋고 순박하게 산다고 했다. 그러나 말이 없다고 한다.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은 밤에는 신라 땅이었다가 낮에는 백제 땅이었기 때문에 마음 놓고 속을 드러내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정말 드러내기 어려웠을까? 오히려 자신의 마음을 정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도저히 자신의 마음을 정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면 그것은 더 비극이 아닐까? 또 그런 버릇이 1500년을 넘어 오늘까지 이어졌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그 분에게 청주에서 왔다는 얘기를 했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을 조금 더 하는 듯하다.
437m 용봉에 올랐다. 사방이 다 보인다. 멀리 동쪽으로 고속도로, 1번 국도, 철로가 한꺼번에 지나는 군북면 환산(고리산) 들머리가 보인다. 환산의 등마루가 뚜렷하다. 동북으로 월전리 마을과 구진벼루가 바로 코앞이다. 이곳에 주둔한 백제 군사들이 저기서 봉변을 당하고 있는 자기네 왕을 몰랐단 말인가? 백제군은 정찰병도 없고 첨병도 없었단 말인가? 저들의 왕이 이곳을 지난다는 첩보를 알려 준 사람은 또 누구일까?
서북으로 식장산이 이마에 부딪칠 듯 다가선다. 그리고 그 아래 부여로 향하는 성왕로에 가끔씩 자동차가 달린다. 백제로서는 이 길이 한스러운 길일 것이다. 저 길을 계속 따라가면 탄현(숯고개)가 나온다고 한다. 계백, 흥수, 성충이 의자왕에게 하소연한 것이 바로 탄현을 막아야 한다고 직간했다고 역사는 전한다. 남으로 김천으로 향하는 대로가 보인다. 이 정도의 고지대에서 주변을 이렇게 조망할 수 있는 곳을 찾기도 힘들 것이다.
지금 앉아 있는 등마루를 따라 계속 올라가면 동평성, 마성산성에 이르고 이 산 줄기는 장령산 산림욕장에 이른다고 한다. 이 산줄기는 동에서 서쪽으로 가다가 남으로 구부러져 옥천을 둘러 싸고 있다. 자연적인 산성이다. 동으로는 부여에서 청산을 거쳐 보은으로 빠지는 길도 저기 저렇게 보인다. 그렇다면 바로 거기가 삼년 산성이다. 하긴 여기서 군북으로 가다가 회남으로 접어들면 호점산성이 나오고 바로 삼년산성인 것이다. 또 문의쪽으로 가면 백골산성, 견두산성, 계족산성, 노고산성, 성치산성으로 이어진다. 그러니 욕망을 가진 군대들이 여기서 마주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그마치 29,600명이 죽었다는 관산성 전투는 지금까지 전해진다. 이곳에서 문의 쪽 백골산까지 가서 그 많은 불쌍한 백성이 죽었으니 그들은 백제인이라고만 할 수 있는가? 결국 우리 겨레가 아닌가? 백골산성에는 백골이 쌓이고 성치산성 아래 핏골에는 피가 내를 이루었다고 한다.
12시가 조금 넘었다. 이곳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약간 부족했다. 그러나 몸은 가볍다. 그래도 밭에서 막 올라오는 열무겉절이에 찬밥을 비벼 먹는 꿈을 꾸었다. 노지에서 자란 거친 상추에 집된장으로 만든 쌈장을 얹어 볼때기가 미어지게 먹어보는것도 괜찮을 것이다. 옥천은 정말 아는 사람이 없다. 그래도 옥천에 오면 으레 돌아가신 둘째 누님이 생각난다. 그 분은 꼭 육영수 여사같이 생겼다. 내가 봐도 그런데 주변 사람들로부터도 그런 말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외모도 행동도 마음 씀씀이도----. 동생을 향한 사랑도 살붙이를 향한 마음도 다 그렇다. 누님은 경찰관인 자형과 결혼하여 여기서 신혼을 보냈다. 중학교 2학년 땐가 여길 한 번 왔었다. 그 때 만들어 준 고추장삼겹살이 금방 입안에서 돈다. 착한 이들은 오래 살지 못하는가 보다. 아, 또 있다. 고향을 무척 좋아하는 어떤 사람이 생각났다. 지금쯤 고향에 와 있으려니 하고 전화를 해 보았다. 혹 월전리가 고향일지 누가 아나? 그러나 어느 여자 어르신이 받더니 아주 점잖게 '아니예요.'한다. 그새 전화를 바꾸었구나.
산에서 내려다 보니 옥천 사람들이 아무리 속 마음을 내비치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기에 한두 분쯤 친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단양에 두 번 가지 말고 옥천에도 한 번 와서 근무할 걸하는 생각을 했다. 맞아. 그랬어야 한다. 그러나 이제 부질없는 생각이다.
노트를 꺼내 여기서 보이는 산야를 그렸다. 그리고 이런 저런 생각들을 정리했다. 착한 아내는 잘 참고 기다려준다. 혹 마음 속으로 "산에까지 와서 뭘 끄적거리고 있냐"며 비아냥 거리는 건 아닐까? 아닐 것이다.
용봉 무너진 성터에서 - 핸드폰사진도 잘 나오네요
돌아오는 길에 시간 여유가 있어 시인 정지용 생가와 육영수 생가를 들렀다. 모두 새로 지은 집이다. 지용문학관에는 어린이들이 많다. 육영수 생가에는 나이 드신 부인들이 가득하다. 육영수 여사의 사진을 보니 이곳에 살던 누님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잊어버리자. 다 잊어버리자. 이제 백골산성과 견두산성을 하루에 가도 될 것 같았다. 갑자기 연초에 계획했던 일을 잊버리고 엉뚱한 산성을 따라다니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래 맞아 후곡리로 가자.
<참고 사항> 퍼온 글
성왕의 가족들
성왕의 가족 사항에 대해서는 자세히 전하지 않는다. 부인은 몇 명인지 분명치 않고, 창(위덕왕), 계(혜왕) 두 아들과 진흥왕의 소비가 된 딸 하나가 있었다. 그 외에도 여러 자식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 창과 계에 대해서는 「위덕왕실록」과 혜왕실록」에서 별도로 언급한다.
3. 관산성 싸움과 성왕의 최후
554년 5월 3일, 왜의 점함 40척이 축자국을 출발하여 백제로 향했다. 승선 병력은 총 1천, 군마는 1백 필이었다. 성왕의 끈질긴 파병 요청이 마침내 왜의 조정을 움직인 것이다. 파병된 왜군 병력은 1천 명에 불과했지만, 그것은 백제ㆍ신라ㆍ고구려 삼국의 각축전에 왜가 국운을 걸고 뛰어든 중요한 사건이었다.
성왕이 처음으로 파병을 요청한 것은 541년이었다. 이 때의 명분은 임나를 재건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왜는 쉽게 이에 응하지 않았다. 신라와 고구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왜는 은밀히 신라와 내통하며 가야 지역에 터전을 구축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성왕은 줄기차게 특사를 보내 백제와 가야, 왜가 연합군을 현성하여 신라와 고구려에 대항해야만 임나를 재건할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워 왜 조정을 설득했다. 당시 왜는 자유무역 도시인 임나가 분쟁지역으로 변함에 따라 한반도 및 중국 대륙과의 무력 거래가 거의 중단된 상태였고, 이에 따른 경제적 피해가 막대했다. 성왕은 그 점을 십분 이용하여 임나 재건을 외치며 왜군을 백제에 파병해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성왕의 파병 요청은 무려 13년 동안이나 지속됐고, 그동안 국제 정세도 크게 변했다. 가장 큰 변화는 역시 신라의 성장이었다. 신라는 가야 땅의 절반 이상을 수중에 넣었고, 한강 유역은 물론이고 그 북방의 고구려 땅 중 10개의 군을 장악했다. 게다가 백제에 등을 돌리고, 고구려와 뒷거래를 하며 백제를 압박했다.
그런 상황에서 백제가 의지할 곳은 역시 오랜 동맹국인 왜와 가야였다. 하지만 왜와 가야도 나름대로 내부 사정이 복잡했다. 가야는 신라파와 백제파가 갈려서 세력을 다투고 있었고, 왜 역시 백제의 임나 장악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신라와 고구려의 공조는 왜와 가야를 몹시 불안하게 하였다. 고구려와 신라의 공조로 백제가 무너지면, 가야는 필연적으로 신라에 병합될 수밖에 없었고, 왜 역시 외톨이 신세로 남아 고구려와 신라에 머리를 숙여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기 십상이었다. 때문에 백제의 위기는 곧 왜와 가야의 위기이기도 했다. 왜 조정이 늦게나마 성왕의 파병 요청을 받아들인 것은 백제와 가야, 왜의 혈맹 관계를 복원하지 않으면 중대한 위기 상황이 도래할 것이라는 자각 때문이었다.
왜의 군대가 백제에 도착하자, 성왕은 신라에게 빼앗긴 땅을 회복하기 위해 출정식을 거행했다. 금지옥엽 같은 딸을 진흥왕의 소비로 내주면서까지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던 터라, 성왕은 목숨을 걸고 일전을 치를 각오였다.
성왕의 첫 공격목표는 관산성(옥천)이었다. 관산성은 소백산맥 동쪽에 자리 잡고 있어서, 백제의 도성인 사비까지 한나절이면 당도할 수 있었다. 때문에 그 곳에 신라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것은 백제에겐 크나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신라의 기병이 언제 기습 공격을 감행해올지 알 수 없었다. 그야말로 관산의 신라 병력은 성왕의 눈알을 노리는 창날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성왕은 노도와 같이 군대를 내몰라 관산성을 압박했다. 휘하 병력은 왜와 가야, 백제군으로 된 연맹군이었다.
성왕의 군대가 몰려오자, 신라에서는 우덕과 탐지가 맞서왔다. 그러나 그들은 성왕의 군대를 당해내지 못하고 뒷걸음을 쳤다. 그렇듯 상황이 신라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한강 유역에 머물고 있던 아찬 김무력이 병력을 이끌고 달려왔다. 또한 삼년산군(보은)의 비장 도도까지 가세했다.
한주의 군대를 이끌고 달려온 김무력은 가야 왕 구형의 막내아들이었다. 따라서 그가 이끌고 있던 군대의 상당수는 가야 병력이었고, 그것은 백제 연맹군에 가담하고 있던 가야 군대를 몹시 혼란스럽게 하는 일이었다. 가야 군대의 그런 혼란은 성왕의 지휘 체계를 약화시키는 역살을 했고, 그것은 결국 백제 연맹군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김무력은 태자 창이 이끌고 있던 백제군의 선봉을 두들겼다. 그 소식을 듣고 성왕은 군대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자신이 직접 전선으로 달려갔다. 그것도 어두운 밤길을 단지 50명의 호위병만 이끌고.
그런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성왕이 이동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신라 삼년산군의 장수 도도가 성왕과 그 호위병들을 급습한 것이다. 성왕을 호위하고 있던 병력은 비록 일당백의 근위병들이었지만, 50명으로 수천 명의 군대를 당해낼 수는 없었고, 결국 성왕은 포로로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성왕을 붙잡은 도도는 노비 출신의 장수로서 공을 세워 신분이 상승되길 바랐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해서든 성왕의 목을 얻고자 하였고, 바야흐로 그 기회를 잡은 것이다. 성왕을 사로잡은 그는 일단 왕에 대한 예를 갖추며 큰절을 두 번 하고, 이렇게 말했다.
“대왕의 머리를 베도록 해주소서.”
그러자 성왕은 그를 무섭게 노려보며 대꾸했다.
“왕의 머리를 종의 손에 맡길 수 없다.”
하지만 도도는 물러서지 않고 성왕을 힐난했다.
“우리나라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국왕이라고 해도 마땅히 종의 손에 죽습니다.”
성왕은 딸을 진흥왕에게 시집보낼 때, 신라와 화친 관계를 유지하겠다고 맹세했던 모양이다. 도도가 성왕더러 맹세를 어겼다고 한 것은 바로 화친의 맹약을 깨고 관산성을 공격한 것을 말함이었다.
그 소리에 성왕은 의자에 걸터앉은 채 차고 있던 자신의 칼을 내주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을 쏟아내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목을 내밀고 말했다.
“짐은 매양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참고 살아왔지만, 이제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고 싶지 않다. 자, 내 목을 베라.”
도도는 그 소리가 떨어지자마자, 곧 칼을 휘둘러 성왕의 목을 쳤다. 그리고 성왕의 목 잘린 시신을 서라벌에 보냈다. 성왕의 시신을 접수한 신라 조정은 그의 두개골을 수습하여 도당이 있는 북청의 계단 밑에 묻고, 나머지 뼈는 백제에 보냈다.
성왕이 참수됐다는 소식은 이내 백제군에게 전해졌고, 그로 인해 백제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퇴각했다. 신라군은 달아나는 백제군의 뒤를 후려 약 3만의 병력을 몰살시켰고, 태자 창도 포위되어 생포될 처지에 놓였다. 그때 궁술에 능한 축자 국조가 신라군의 선봉에 선 장수를 활로 쏘아 넘어뜨려 활로를 뚫었고, 덕분에 태자 창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관산성 전투의 패배는 백제에 엄청난 후유증을 남겼다. 성왕의 죽음으로 가야와 왜, 백제를 하나로 묶어 이끌 수 있는 영도자를 잃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고, 다음으론 3만의 정예병을 잃은 탓에 향후에는 방어전 일변도로 전쟁에 임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세 번째로는 가까스로 형성된 백제, 왜, 가야 연맹군이 첫 싸움에서 완전히 대패하는 바람에 연맹에 대한 회의감을 일으킨 것이다.
또한 태자 창은 개인적으로 아버지를 지키지 못한 불효를 저질렀고, 장수로서는 패전의 부끄러움을 안고 살아야 했다. 그 자책감을 이기지 못해 그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중이 되려고도 하였다. 다행히 신하들의 강한 만류로 그는 출가를 포기했지만, 성왕이 죽은 후 3년 동안 그는 왕위를 비워두고 참회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 성왕 시대의 세계 약사
성왕 시대, 중국의 남북조는 큰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북조의 북위는 한족화정책의 실패로 곳곳에서 봉기가 일어나 혼란에 빠졌고, 결국 534년에 몰락하여 동위와 서위로 나뉜다. 그러나 550년에 동위의 실권자 고환의아들 고양이 동위를 폐하고 황제에 올라 북제를 건국했다. 한편, 남조의 양나라에서도 549년에 후경이 반란을 일으켜 건강을 함락시키고, 스스로 한(漢) 황제라 칭하는 사태에 직면했다.
이 무렵, 서양에서는 동로마가 페르시아를 맞아 힘겨운 싸움을 벌이며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몰락한 서로마 지역에선 프랑크국이 부르군트 왕국을 병합하고, 동고트와 반달 왕국은 동로마에 멸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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