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답사/忠淸의 山城

충북 옥천의 환산성(環山城, 古利山城 )

느림보 이방주 2011. 5. 22. 23:02

충북 옥천 군북면 古利山城(環山城)

 

2011년 5월 28일

 

【환산의 개요

충북 옥천군 군북면 소재 환산(581.4) 옛 이름은 고리산으로 고리환(環)자를 써서 환산으로 표기된다. 그래서인지 이곳 주민들은 고리산으로 부른다. 암릉과 계곡 산행이라기보다 산책을 하며 대청호를 전망할 수 있는 산이다. 마치 전망대처럼 옥천, 대전 주변의 대청호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옥천의 서대산, 대성산, 장용산등과 영동, 보은의 속리산, 구병산, 대전의 계족산 식장산, 청원의 샘봉산 주변 명산들을 조망할 수 있는 천혜의 지형적 조건을 지니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천혜의 요새가 되어 왔나 보다. 백제의 왕자 여창(위덕왕)이 쌓았다는 고리산성의 성지와 고리산 봉수터가 남아 있다.

 

<산행 코스>

   이백리-(35분)-산불감시초소-(20분)-삼거리-(30분)-성터-(40분)-감로봉-(10분)-삼각봉-(20분)-고리산-(1시간10분)-추소리 황룡사       점심시간 포함 4시간 10분

 

지난번에 계족산에서 고리산을 건너다 보고는 꼭 가고 싶었다. 내가 고리산을 산행을 꼭 하고 싶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청주 근방의 산성을 돌아보다 보니 대전 계족산성을 가게 되었고, 내가 돌아본  청주 청원의 산성들과 보은 삼년산성, 호점산성, 그리고 대전시 동구의 몇 개의 산성들이 모두 전략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난 한 주 병원을 열심히 다녀서 기침이 조금 덜하다. 아내 의견을 들어보니 크게 가고 싶어하는 눈치는 아닌데, 가지 않으면 내가 혼자 나설 기세이니까 함께 가기로 했다. 아내는 언제부터인가 산에 나를 혼자 보내지 않는다. 내 체력에 대한 걱정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아직 산에 가다가 쓰러지거나 기진맥진하거나 길을 찾지 못할 정도의 체력은 아니다. 그래도 혼자보다 훨씬 든든하다.

 

군북면 이백리 고리산 들머리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정상까지 갔다가 다시 이백리로 되돌아 오기는 너무 멀다. 그러면 추소리로 내려가야 하는데 차를 회수하기가 어렵다. 옥천군 버스회사(043-732-7700)에 전화를 해 보니 오후에 추소리에서 출발하는 시내버스가 2시 50분에 있단다. 그런데 그 차를 놓치면 오후 7시 10분 경에나 있다고 한다. 게다가 고리산 종주가 남들은 3시간 30분이면 된다는데 천천히 산성을 돌아보면 5시간은 걸릴 것 같다. 그래서 일요일이지만 집에서 8시에 출발했다. 처음에는 신탄진-대청호수길-군북면 이백리를 계획했는데 내비가 가는 대로 따라갔더니 대전 시내로 들어 간다. 신호에 걸리고 차가 밀리고 해서 거의 30분을 손해 보았다. 9시 10분 경에야 군북면사무소에 차를 댈 수 있었다.

환산 주변 지도

 

환산의 개념도

환산 등산로

 

1. 들머리

산행 들머리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면사무소에서 큰 길쪽으로 나오니 도로 건너 왼쪽에 환산로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횡단보도를 건너 이정표쪽으로 가니 지하도가 보인다. 지하도를 지나 2차선 도로를 따라  오른쪽으로 한 50m 올라가니 들머리 표지판이 보였다. 정상까지는 4,85km, 정확하다. 4850m라는 얘기이다. 2시간 30분이면 족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르막길이 만만찮다. 처음에 가팔라서 숨이 가쁘다. 그러나 군에서 등산객을 위해서 신경을 썼는지 지그재그로 길을 만들었다. 게다가 숲길이다. 시원하고 싱그럽다. 공기가 깨끗하다.  국도, 철로, 고속도로가 이곳에 한꺼번에 통과하니 차소리는 요란하다. 그래도 새소리도 그윽하다. 묵은 땀이 흐른다. 땀이 아주 되직하고 질척한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의 게으름으로 온몸에 찌든 땀이 다 나오는 기분이다. 그래서 운동을 하고 땀을 흘려야 한다.

 

산불 감시초소가 있는 주능선에 올라서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능선에 올라 땀을 닦으며 주변을 조망하였다. 군북면 일대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산불감시초소에는 산꾼들이 그랬는지 산불감시원이 그랬는지 돌을 재미있게 세워 놓고 의미있는 글귀를 새겨 놓았다. 태극기까지 게양했다. 땀을 씻고 바로 출발하였다.

 

 길을 건너면 추소리 이정표가 보인다

 산행 들머리 환산 안내판

벌써 1000m를 올라 왔나

산불 감시초소에서

멀리 군북면에서 옥천 가는 길

 

2. 봉수대터(제 3보루)

산불 감시 초소부터는 등마루를 걷는다. 등마루는 내리막길도 있지만 오르막길이 더 많다. 그러나 처음 같이 힘들지는 않았다. 아주 평탄한 숲길이다. 우리는 숨이 가쁘지 않으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다 보면 한 10여분씩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는 곳도 있다. 지루하지 않은 산책길이었다. 사람들이 환산을 겨울에 많이 찾는 이유가 뭘까? 그것은 환산은 겨울 전망이 좋기 때문일 것이다. 녹음이 우거지니 등마루에서 산 아래가 내려다 보이지 않았다. 활엽수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대청호가 그야말로 절경이다. 안개가 뿌옇게 끼긴 했어도 이곳이 대청호반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부소무니, 병풍 바위가 다 내려다 보였다.

 

고리산 봉수대터에 이르렀다. 여기는 옥천 이원의 월이산에서 보내는 봉수를 받아 대전 계족산으로 보내던 봉수대가 있던 터이다. 한산성 가운데 가장 컸던 제 3보루가 있던 곳이라 한다. 자연석으로 쌓은 성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무너져 돌무더기가 된 곳도 있고 그 시대 사람들이 쌓은 흔적이 잡목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넓이도 꽤 넓고 산 아래 쪽인 남측에서 바라보면 높은 성곽처럼 보이지만 올라서서 보면 아주 평평한 마당이다. 노천에 여기저기 쌓아올린 돌담은 최근에 사람들이 그렇게 쌓았을 것이다. 그러나 잡목더미에 감추어진 성곽의 흔적은 옛모습 그대로일 것이다. 납작납작한 자연석을 정교하게 쌓았다. 무너진 돌더미를 보더라도 높이가 꽤 되었던 것 같이 보인다.

 

잡초가 우거진 주변을 살피다가 와편 한장을 발견하였다. 빗살무늬가 있는 기와 조각이다. 기와는 꽤 크게 만들었는지 조각인데도 그 곡선이 심하지 않았다. 깨진 부분은 붉은빛이 섞인 검은색이다. 그런 진흙이 있었는지 구워서 만든 것인지는 눈이 어두워 알 수가 없다. 또한 기와가 백제 위덕왕 당시의 것인지 그 후에 개보수할 때의 것인지도 알 수가 없다. 아마도 봉화가 국가 방위에 큰 역할을 했던 조선 시대에 보수하여 쓴 것이 아닐까 한다. 문헌에는 그렇게 나와 있지만 정말 그럴 것인가? 내가 만지고 있는 와편에서 조선 시대를 봐야 할 지 백제를 봐야 할지 모르겠다. 와편 몇 조각을 더 발견했다. 이렇게 쉽게 와편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꽤 큰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었다.  아무튼 와편을 주워 쓰다듬으며 옛 사람들의 손길을 느낀다. 또한 성돌을 쓰다듬으며 1500년 전 사람들의 손을 잡는 기분이다. 그런데 그들의 문화적 안목과 기능에 감탄하기 앞서 자꾸 측은함에 가슴만 아픈지 모르겠다.

 

성은 정상 쪽을 향하여 길게 마치 마늘 조각 모양으로 이어졌다. 남쪽은 뭉툭하고 정상쪽으로 점점 좁아지는 형태이다. 정상 쪽으로는 성곽 위가 길처럼 되어 있다. 이곳에서 지금부터 1500년 전에 세력을 차지 하기 위해서 서로를 죽이고 공격하고 속이고 했던 인간사가 있었다는 것이 신비롭다. 여기에 동원된 서민들은 또 얼마나 고충이 심했을까? 여기 주둔하여 밤을 지새면서 어린 병사는 부모를 얼마나 그리워하고 중년을 자식을 보고 싶어 했을까? 사람들은 왜 예나 지금이나 이런 인며과 규범과 권력의 울타리를 만들어 놓고 자신을 거기 묻어버리고 몇 해 되지도 않는 일생을 괴롭게 지내는지 모를 일이다.

 

환산봉수대 [環山烽燧臺] 

 충청북도 옥천군 군북면에 있는 조선시대의 봉수대이다.   

조선 초기에 설치된 봉수대로, 고리산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환산 서북쪽 봉우리(521m)에 그 터가 남아 있다. 봉수대는 둘레 87m, 중앙지름 9m 정도의 긴 타원형이며, 현재는 많이 무너진 상태이다. 길이 30m, 높이 2~3m, 넓이 5m 정도의 석축이 남아 있다. 

환산봉수는 서울까지 전달되는 다섯 가지 봉화로 중 남해 금산에서 영동, 옥천을 거쳐 서울로 연결되는 제2거(第二炬) 봉화로의 간봉(間烽)에 속한다. 남쪽으로 50리 거리의 월이산봉수(月伊山烽燧)의 연락을 받아 북쪽으로 30리 거리의 계족산봉수(鷄足山烽燧)에 전달하였다.

이 봉수대에는 별장(別將) 1명, 감관(監官) 10명, 봉군(烽軍) 100명이 배속되어 근무했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주위에서는 조선시대 기왓조각과 봉돌이 흩어져 있고 환산 정상에는 백제의 왕자 여창이 쌓았다는 고리산성(환산성)의 터가 남아있다

제3보루 표지석 최근에 세운 것인가 윗면에 옥천군의회 의장의 이름이 있다.

봉수대 표지판

쌓은 것은 보수인가 옛모습 그대로인가 성돌이 널려 있다.

잡목에 묻힌 성곽

무너진 성곽

무너진 성곽

와편

와편 몇 조각-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손길이 있다

성곽의 모습-최근 사람의 손길이겠지

당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흙에 묻힌 돌더미

성곽의 모습

성곽의 모습

정상으로 가는 등산길

 

3. 환산성 제 4보루 (감로봉)

 

마지막도 아닌 것 같은데 오르막길이 가파르다. 숲은 더욱 우거지고 산 봉우리처럼 볼록 솟아오른 제 4보루에 올랐다. 처음으로 사람들을 만났다. 여기에서 과일을 먹고 있다. 여기가 전망이 제일 좋았다. 그러나 좁은 보루를 그들이 다 차지하고 앉아 있어서 주변을 살필 겨를이 없다. 4보루 표지석에 장갑과 스틱을 올려 놓았다. 봉우리 바로 아래 부소무니 쪽을 향하여 무덤이 한 기 있다. 그 분들의 일행 가운데 사진 작가가 있는지 무덤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이곳은 아마도 망루로 쓰였는지 성 둘레도 그렇게 넓지 않다. 봉우리 형태이다. 우거진 잡목들 사이에서 성돌이 보인다. 그러나 흙에 덮여 있다. 사방을 둘러 보니 그래도 쌓은 흔적이 있다. 내려오면서 보니까 아무리 잡목이 우거져 있어도 쌓은 망루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둘레가 107m밖에 안 된다니까 그리고 봉우리 형태니까 그럴 것이다. 이곳에서 물길이 다 보인다. 경상도 지역에서 옥천 보은으로 넘어오는 골짜기를 다 내려다 볼 수 있다. 그 때 내려다 보던 사람들은 다 어디 가 있을까? 그들이 말을 달리고 창을 들고 진격하고 부딪치던 들판은 저렇게 물에 잠겨 말이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내려오는 비탈길이 고요하기만 하다. 

무덤 바로 위에 있는 4보루 표지석

 

4보루의 성곽 흔적

잡목에 묻힌 보루

 4보루 감로봉에서 내려다 본 대청호의 절경

 

감로봉에서 내려와 다음 545봉을 향해 오르막길을 오른다. 이곳 안부에서 추소리 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고, 보륜사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모처럼 소나무가 아름답다. 길가에 바로 큰꽃으아리가 피어 있다. 아주 소담한 세 송이다. 으아리는 꽃 모양은 같아도 아주 작고 앙증 맞은 것도 있는 반면 이렇게 큰꽃도 있다. 이 꽃을 사진으로 찍어 놓으면 아주 아름다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진 실력이 없다. 없는 실력에 작은 카메라로 찍어서는 더 안 될 것이다. 그래서 카메라를 구해 놓고 있으면서도 부러워하기만 하고 시도하지 않고, 시도하지 않았으면서도 이런 때 후회한다. 막상 산에 올 때 카메라를 메고 오는 것을 귀찮아 한다. 그러니 아직 자격이 없는 것이다.

 

소나무 숲길

소나무 숲길에서

이 길도 성이 아닐까

소담하게 피어난 으아리

 

4. 환산성 제 5보루

숨을 고를 사이도 없이 바로 5보루가 나온다. 이 곳이 바로 정상이다. 5보루도 성의 흔적이 많이 남아 아 있는 것은 아니다. 비교적 널직한데 다른 곳보다 숲이 더 우거졌다. 이곳에서 바로 정상 헬기장이 나오니까 여기에는 등산객이 머물지 않는 모양이다. 우리는 잠시 앉아서 쉬었다. 표지석에 581.4라고 되어 있는데도 정상인지 몰랐다. 주변에 성돌을 주워 예비군 훈련 때 초소를 만들었는지 참호의 흔적이 남아 있다. 1500년 전 요새는 70년대에도 요새가 되었던가 보다. 이제 그 초소도 잡초에 묻혀 있다.

 

바로 건너에 정상 헬기장이 있다. 헬기장은 봉우리를 밀어 너른 마당을 마련해 놓았다. 성곽의 흔적이 다 땅에 묻혀버린 것이다. 사방에 나무가 우거져 산 아래를 조망할 수 없다. 나무 숲 사이로 보이는 산 아래가 정말 안타까울 정도로 절경이다. 겨울 경치는 정말 볼 만할 것이다.

환산성 제 5보루

5보루 옆에 현대식 참호

 

고리산 정상 헬기장

 

5. 동봉(578m)

정상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시계를 보니 12시가 안되었다. 두유와 젤리를 먹고 헬기장을 내려왔다. 바로 봉우리가 하나 더 있다. 동봉이다. 오르막길은 길지는 않지만 경사가 아주 심하다. 우리보다 체력이 약했을 옛사람들이 여기를 오르내리며 얼마나 힘겨웠을까? 돌이 다른 곳보다 더 많이 흩어져 있다. 여기는 보루도 아닌데 성의 흔적이 정상보다 더 뚜렷하다. 아마도 이곳이 최종 보루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의 정상과 맞먹는 578 고지인데다가 동쪽으로 툭 튀어 나와 있어서 주변을 살피는데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성을 쌓는 방법은 제 3보루와 크게 차이가 없다. 주변을 살펴 보았다. 잡목 속에 묻혀 있는 모습이나 누군가 다시 쌓은 듯한 흔적이나 다른 곳과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초창기에 쌓았을 법한 한 군데가 뚜렷이 남아 있다. 자연석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모습이 정교하다.

 

점심을 먹고 내려오기 전에 주변을 조망하면서 당시를 생각해 본다. 위덕왕 여창은 이 성을 쌓고 백제와 부딪치면서 아버지 성왕을 잃었다. 당시 백제는 성왕 시대이고 신라는 진흥왕 시대이다. 성왕은 나이가 많고 진흥왕은 젊었다. 이 때의 세력 다툼이 바로 삼국 통일의 밑 그림이 되었을 것이다. 백제가 성왕 시대에 정치와 제도를 정비하고 영토를 넓히면서 세력을 확장하면서 미래를 설계했다면 신라 진흥왕도 역시 마찬 가지이다. 성왕은 일본과 양나라등과 외교 관계를 맺으면서 안으로 제도를 정비하고 부여로 서울을 옮기고 한강 유역가지 영토를 확장하며 30여년이나 국가 부흥에 힘썼다. 그러나 이렇게 영토 확장에 힘쓰느라 백성의 후생에는 신경쓰지 않은 모양이다. 당연히 백성의 삶은 피폐해졌을 것이다.

 

성왕이 아들을 보러 이곳에서 머지않은 관산성으로 오다가 구진벼루에서  어이없는 죽음을 당하는 과정은 정말 역사의 한 드라마이다. 그런 어이없는 죽음으로 인하여 아들인 위덕왕이 이성을 잃고 무모한 공격을 시도하다가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김무력장군에게 대패하였다. 그러는 동안 국력은 더욱 쇠잔해졌을 것이다.  여기서 성왕이 죽지 않고 백제가 승리했다면 삼국의 판도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성왕이 아들에 대한 정으로 50여명 군사만 대동하고 떠나는 안일한 판단을 하지않았다면 삼국사기는 또 어떻게 바뀌었을까?

 

산천은 말이 없지만 나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거대한 역사의 물길은 때로 어느 한 사람의 판단에 의해 흘러가는 길을 바꾸어 버린다. 그리고 그 바람에 수많은 후대인들이 그 흐름에 함께 휩쓸려 흘러갈 수밖에 없다. 나도 1500년 전의 그들의 판단에 의해 오늘을 흘러간다.

 

성의 흔적

무너져 잡목 속에

성곽의 흔적

옛 모습이 남아 있는 성곽-보존 대책이 시급하다

 

내려오는 길은 예상대로 경사가 급하다. 게다가 칼돌이 삐죽삐죽 솟아 있어서 한번 엉덩방아를 찧으면 금방 병원으로 가야할 판이다. 아까 만났던 젊은 이들은 팔딱팔딱 뛰면서 잘도 내려 갔을 것이다. 올라가는 길보다 더 힘들고 무릎이 부서지는 기분이다. 군데 군데 줄을 매어 놓아서 그나마 괜찮았다. 내리막길은 2km도 안되는데 시간이 더 많이 걸렸다. 1시간이상 걸렸다. 내리막길은 산이나 삶이나 더 조시스럽고 어렵다.

 

내려오는 길에 보이는 산 아래는 고요하지만 아름답기 이를데 없었다. 능선에서 바라보니 황룡사절이 웅장하다. 그런나 신성한 멋은 없었다. 마지막 나무 계단을 내려서니 이쪽에서 오른 길의 산행 안내도가 마련되어 있다. 여기서 정상까지 갔다가 되돌아 오는 산행도 좋겠지만 큰 의미는 없을 것 같았다. 오늘의 종주는 4시간 10분 정도밖에 안 걸렸지만 참으로 의미 있고  좋은 산행이었다.

 

동봉 아래에 숨어있는 이정표

내려오는 길 칼바위들

내려오는 길 숲 사이로 보이는 병풍바위 쪽 절경

황룡사쪽에서 오르는 길

 

버스가 온다는 2시 50분을 기다리려면 아직도 한 시간 이상 남아 있어서 주변을 돌아보기로 했다. 황룡사는 웅장하고 굉장히 의미가 있는 것처럼 바깥을 장식해 놓았지만 별로 발길을 들여놓고 싶지 않았다. 아내도 별로 내키지 않는 모양이다. 아내가 다리가 많이 아프다고 했지만 추소정 쪽으로 걸어가니 호숫가에 풍광이 그런대로 좋았다. 특히 다도해 분위기가 나는 호안과 호숫가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찔레꽃이 우리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얼마 걷지 않아서 추소정이 있다. 추소정은 이름과 달리 누각이 있었다. 추소루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하는 짧은 생각이 들었다. 추소정에서 바라보니 마치 꿈틀거리는 용틀임을 보는 것 같은 병풍 바위가 기이하다. 용의 비늘처럼 바윗돌들이 납작납작하게 드러나 있다. 주변에 꽃을 가꾸고 잘 정비해서 우리의 눈을 기쁘게 해 주었다. 누각에 올라 바람을 맞으며 신발을 벗고 발을 주물렀다. 피로가 가신다. 고리산 줄기를 여기서 바라보니 지나온 등마루가 까맣게 하늘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저 길을 걸으며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다. 오늘 하루가 기특하다.

고리산 황룡사

찔레꽃 여인

찔레꽃

함박꽃

추소정 가는 길에

추소정 올라가는 길에 솟대

추소정에서 병풍바위를 배경으로

추소정에서

추소정에서 병풍바위

부소무니에서 바라본 고리산 등마루

 

버스는 정확하게 제 시간에 왔다. 우리 내외는 옥천군에서 보내준 이렇게 큰 차를 2100원에 전세 내어 군북면 이백리 면사무소까지 타고 왔다. 며나무소 주변에서 물을 샀다. 땀을 흘려 가져간 물을 다 마신 것이다. 콜라가 시원하다.  돌아오는 길은 대청호수길을 따라 신탄진을 거쳐 아주 쉽게 청주에 도착했다. 다음에는 반드시 관산성을 가야 한다. 그리고 개머리산(견두산성)을 가고, 그 다음에 백골산성을 답사해야 한다. 어려운 길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