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답사/忠淸의 山城

대전시 동구 직동 성치산성(城峙山城)

느림보 이방주 2011. 5. 15. 22:49

성치산성(城峙山城) 답사

 

2011. 05. 14.

 

개요】

종 목 :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29호 (지정일 1993.06.21)

명 칭 : 성치산성(城峙山城) 

면적  : 1,091㎡

시 대 : 삼국시대

 

  성치산성은 대전시 동구 직동(피골) 산 4번지에 있다.  계족산성에서 북동쪽으로 약 6㎞ 지점의 성치산 정상(해발 210m) 을 빙둘러 쌓은 테메식 석축산성으로, 평면형태는 긴 타원형이다. 1993년 6월 21일 대전광역시기념물 제29호로 지정되었다.

성벽의 둘레는 160m 정도이고, 폭은 4.3m인데, 성벽은 등고선을 따라 축조되었으며, 거의 허물어져 원래의 모습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현재  특히 서쪽 성벽 부분은 완전히 무너져 성벽의 통과선만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동북쪽 성벽에서 남쪽 성벽에 이르는 부분은 일부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어 축조 방법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성벽은 겹으로 쌓았는데 바깥 성벽의 높이는 2.4m이고, 안쪽에는 1∼2단의 석축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성벽은 반듯하고 납작한 돌의 앞면을 맞추어 가로 쌓기로 쌓았고, 돌의 크기는 50㎝×20㎝ 내외이다.

현재 남문 터가 남아 있는데 폭은 3m 정도이다. 성 안의 중심부에는 한 단 정도 높은 작은 봉우리가 솟아있는데, 장수가 높은 곳에서 지휘하던 장대터인 것으로 보인다. 봉우리 중앙에 지름 6.2m 가량 움푹 들어간 곳이 보이는데, 봉수대 혹은 저장 시설이었던 듯하다.

 

 

                성치산성 주변 지도

 

 

지난번에 대전시 동구 직동에 있는 노고산성을 다녀 왔다. 노고산성에서 거리가 멀지 않은 같은 마을의 성치산성을 답사해야겠기에 점심을 간단히 먹고 출발했다. 물 한 병과 두유 한 병을 배낭에 넣었다. 카메라는 아주 작은 소니 카메라를 택했다. 혼자 가는 것이 좀 외롭기는 했지만 함께 가자고 미리 연락한 사람이 없어 그냥 혼자 출발하기로 했다. 출발하면서 미리 알아 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산남동을 지나 양촌을 지나 가좌리로 해서 선바위- 등동리- 홈너머- 정가울-도원 품곡을 지나서 대청호가 있는 오가리를 지났다. 그 때 전화가 왔다. 산남고 1회 졸업생 민정이었다. 많이 믿었던 아이인데 연락이 통 되지 않아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동안 어려움이 많았던 모양이다. 사람은 쉽게 포기하면 안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한다.

 

조정지 댐 다 가지 않아 대청호숫길로 좌회전 했다. 가로수가 우거지고 숲이 짙어 아름다움이 혼자 보기 아깝다. 주변에 꽃이 피고 호수가 거의 만수라 더욱 아름답다. 찬샘체험마 들어가는 길로 좌회전하여 체험 마을 앞에서 차를 세웠다.

 

관광버스가 몇 대 세워져 있고 사람들이 많다. 어느 교회나 대학에서 수련회를 온 모양이다. 젊은이들이 자유롭게 돌아 다닌다. 이런 자유로운 모습이 시골 사람들에게 어떻게 인식될 것인가 이제 만성이 되었을 것이다.

 

마을 광장에서 바라보면 동쪽으로 노고산성이 동남쪽으로 견두산성 가는 능선이 보인다. 그리고 동북쪽으로 성치산성이다. 언제 견두산성도 답사해야 한다. 다시 차를 타고 성치산과 노고산의 안부까지 한 5분 가야 한다.

 

 찬샘 자연 체험 마을

 체험마을 지나서 견두산 가는 능선

 성치산과 체험마을 휴식장

 

수련회에 참여한 젊은이들이 등산에서 돌아오는지 고개로 올라가는 좁은 길에 차를 들이댈 수가 없다. 젊은이들은 모두가 자유롭다. 커플인지 주변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잡고 내려온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기다렸다. 그들이 거의 다 빠진 다음에 좁은 길을 올라 고개에 올라 섰다. 안내판이 있은 길가에 차를 세우고 산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안내 지도에 의하면 1시간은 능선길을 걸어야 한다.

 

배낭을 메고 올라가는데 계속 기침이 난다. 온 목안에 있는 더러운 것들이 다 넘어오는 것 같다. 목과 코에 있는 것들을 거의 다 뱉어버리니 기침이 멎는다. 그렇다. 내것이 아닌 것은 뱉어 버려야 한다. 이렇게 다 뱉어 버려야 몸이 괴롭지 않다.

 

잠깐 사이에 정상에 올랐다. 여기부터 등마루를 타면 된다. 녹음이 짙다. 새 울음 소리가 들리고 주변은 아주 고요하다. 산길을 오랫동안 걷지 않아 벌써 허벅지가 탱탱해진다. 하루 10시간을 걷던 바로 몇해 전을 생각했다. 함께 왔으면 좋았을 사람들을 손가락에 꼽으며 걸었다. 주변에 좋은 사람들은 참 많다. 길은 많이 났는데 사람은 없다. 기침이 멎고 땀도 이제 나지 않는다. 나는 혼자서 아주 천천히 여유있게 걸었다. 좋은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산행 들머리의 안내도

 이정표와 올라가는 길

 

등마루를 걸으며 오르락 내리락을 몇 차례 드디어 마지막 오르막이다. 그리 높지 않다. 채 10분도 안될 것이다. 아니 5분이면 족할 것 같다. 주변은 아주 고요하다. 4시가 넘었다. 아직도 햇살은 따끈따끈하다. 여기에 이정표가 또 있다. 살펴보니 피골 마을에서 바로 자동차길이 여기까지 나 있다. 성치산성만 본다면 여기까지 와서 차를 세우고 산을 올라가면 될 것이다.  여기서 노고산성을 거쳐 견두성까지 한꺼번에 가도 충분할 것 같다. 옛날 같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가파른 길도 잠깐이다. 어느새 산성터에 올랐다. 군데 군데 무너진 돌더미 위에 잡목이 무성하다. 남문터로 생각되는 부분에 돌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동쪽 사면에는 군데 군데 쌓아 올린 흔적이 남았으나 북쪽 사면은 그냥 돌무더기이다. 문터라는 곳에 기와편이라도 있을까 하고 자세히 살폈다.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문루에 초가처럼 짚으로 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루각은 아예 없이 그냥 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가로대만 걸쳤을 수도 있다.

 

 산성 바로 아래 이정표

 산성 안내판

 남문이 있던 자리

 남문 근처의 東斜面 무너진 성터

 남문 근처의  西斜面 성터

 

성 안으로 들어가는 기분으로 올라갔다. 성안은 단을 모은 것처럼 흙을 쌓아 높은 곳이 있다. 어떤 설명에서는 장수가 여기서 지휘한 곳이라고 하는데 테메식으로 쌓은 산성이 고작 160m인데 무슨 장수가 있었을까? 그냥 소대급이나 한 무리의 군사가 이곳에서 정찰 임무를 띠고 있었을 것 같다. 그러면 먼 데를 살펴볼 수 있는 망루 정도 될 것이다.

 

북쪽으로 걸어가 보았다. 북쪽 성벽은 살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북동사면에 뚜렷하게 성벽의 흔적이 살아 있다. 한 3~4m 정도가 납작한 돌을 정성스럽게 쌓았다. 돌은 크지 않은 자연석이다. 장정이나 축성의 기술이 없는 사람이라도 우리 민족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작업이다. 3~4m 정도 남아 있고 또 한 2~3m 정도 무너졌고 이어서 3~4m가 정확히 남았다.

 

성은 전체적으로 고구마 모양으로 길쭉한 타원형이다. 산 마루를 둘러싼 이 산성에는 오늘날 군대의 1개 소대가 근무를 해도 복잡할 지경이다. 아마도 계족산성에 본부를 둔 모 부대의 전위대나 정찰대가 이곳에 나와 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계족산성에서 한 6km 정도 되는 이곳 피골의 노고산성, 견두산성과 함께 요새가 되었을 수 있다. 경상도 지방에서 옥천을 거쳐 북으로내닫는 군대를 이곳에서 섬멸했든지, 북쪽에서 이곳을 거쳐 경주로 향하는 군대를 여기서 섬멸했든지 역사와 전세에 따라 다양한 요새 구실을 했을 것이다.  어떻게 쓰든지 계족산성과 이 세 봉우리의 산성이 연계되거나 삼년산성과 호점산성을 연계하여 양성산성을 지나 청주 부모산으로 연결되었을 것이다. 

 북쪽의 성이 무너진 돌더미

 성의 흔적이 뚜렷한 東壁 일부

 동북쪽 성터

 

어찌했든지 피골이 요새가 되고 피골에 선혈이 낭자한 싸움이 벌어졌다는 전설을 기억하니 이곳에서 죽어간 많은 장병들의 넋이 안타깝게 생각되었다. 멀리 호반을 넘어 샘봉산이 우뚝하다. 물속에 잠긴 많은 마을의 전설이 말없이 고요하다. 이곳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간 어린 장병들의 두런거림이 들리는 듯하다. 이곳에서 굶주림과 목마름을 참아가며 부모를 그리워하고 새색시를 그리워하고 어린 자식을 그리워했을 많은 순수들이 억울하게 죽어갈 때 정치가들은 과연 무엇을 했을까?

 

전쟁은 왜 필요한가? 누구를 위해서 전쟁이 필요한 것인가?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누구의 영화를 위해서 전쟁을 했고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이들이 쓸데없이 소중한 목숨을 버렸을까를 생각하니 오늘의 정치도 원망스러워진다.

우리는 어떤 역사를 지향해야 하는가? 오바마는 무엇을 위해 오사마를 잡았고 오사마는 왜 오바마의 원수가 되었을까? 그들은 왜 어떤 명분으로 죄없는 사람을 사지로 보내면서 영웅이라는 헛된 이름을 붙여 주었을까? 우습지 않은가?

 

오늘 참 색다른 생각을 하였다. 성이 너무 작았기 때문인가? 그날의 함성이 들리지 않고 그들의 두런거림이 들린다. 내려오는 길이 우울하다.

 성의 북쪽에서 바라본 대청호와 샘봉산

 내리막길 묘소에서 멀리 보이는 후곡리 대각사

 터진 안쪽으로 들어가면 후곡리 벌말이 나올 것이다

잃었다 다시 찾은 길 -수렛길이다-

 

내려오는 길에 다른 길을 택했다가 잠시 길을 잃었다. 어느 전망 좋은 묘지에서 주변을 살폈는데 호반을 건너 후곡리 대각사가 있는 마을과 산줄기가 마치 성문처럼 감싸안은 벌말이 있었을 법한 그 너머 진사골 뒷골들을 살피다가 후곡의 경치에 빠져 버렸다. 그런데 길을 찾아도 없다. 끊어진 것이다. 그냥 내리막길로 내려쳤다. 묘지가 하나 더 나오고 흐릿한 길이 보인다. 그길을 따라가다 보니 길이 점점 뚜렷해지더니 수렛길이 나왔다.

수렛길을 따라서 찬샘마을로 향했다. 수레길 바로 옆 우거진 잡목 사이에 랜드로바 짚차가 한데 세워져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시동이 걸려 있는 것 같지 않은데 차가 흔들거린다. 가까이 가 보았다. 검은 색으로 빛을 차단한 유리 너머로 베드신을 찍고 있었다. 좋은 차를 살 수는 있어도 호텔비가 없는 아주 가난한 사람들인가 보다. 큰 구경거리도 아니다. 그냥 바로 돌아 나왔다. 정말로 그냥 왔다.

 

편하게 돌아 차를 세워 놓은 출발점으로 돌아 왔다. 5시 50분쯤 되었다. 집으로 돌아 오는 길이 가볍다. 베드신이 전혀 눈 앞을 가로 막지 않았다. 산성에서 밤을 새우는 하급 군사들의 두런거림만 귀를 괴롭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