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21일
오후에 호점산성을 가기로 했다. 호점산성에 간다니까 아내가 함께 간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용암동 예식장에 들러 성낙수 장학사 여혼에 다녀와야 했고, 아내는 절에 법회에 참석해야 할 형편이었다. 그래서 1시까지 집에서 만나 떠나기로 했다. 나는 12시 50분쯤 집에 도착해서 준비를 마쳤다. 그런데 아내는 두시가 다 되어서 왔다. 시간이 늦어 그만 둘까 하다가 그러면 또 못갈 것 같아 출발했다.
피반령으로 가는 길이 빠른데도 굳이 문의를 지나 구사리, 산덕리를 지나 염티재를 넘었다. 염티재는 옛날 금강 나루에서 소금을 지고 회인 보은으로 넘어가던 소금 고개이다. 호점산성이 있는 용곡리 사람들이 나무를 지고 이고개를 넘어 문의 장에 다녀왔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얼마 되지 않은 옛 이야기이다.
염티재를 넘으면 남대문리인데 남대문리라는 이름이 호점산성의 남대문이 있는 쪽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호점산성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을 자주 지나다녀 보았지만 호점산성 입구라는 표지판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운전을 하면서 계속 주변을 살폈다. 남대문리에서 회인 대전간 지방도와 거의 만나는 지점 왼쪽 산기슭에 호점산성 개요도가 있었다. 차를 세우고 보고 싶었지만 그냥 지나쳤다. 오늘의 산행은 용곡리에서 시작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571번 도로에 접속하여 회남면 소재지를 지나 북쪽으로 달렸다. 이 길로 계속 달리면 회인에 이르게 된다. 남대문교를 건너면 바로 남대문 공원을 지나게 된다. 공원을 지나 모롱이를 돌면 회남면 소재지이다. 소재지를 지나 구불구불 2차선을 길을 천천히 달리면 외쪽으로 용곡리로 들어가는 용곡교를 만나게 된다. 이 다리를 건너야 한다. 다리 위에서 바라보면 물이 빠진 대청호 둔치에 우거진 갈대를 바라볼 수 있다. 갈대 숲과 어우러진 버들개지도 볼거리에 한 몫 보탠다. 갈대 숲이 아름답기 때문에 여기서 사진 촬영을 하는 이들을 만나게 된다. 좁은 다리 위에서 사진을 찍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다.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들어 가면 보이스카웃 화룡야영장이 나오는데 정문 앞에서 왼쪽으로 들어 가야 한다. 겨우 차가 다닐 수 있는 농로를 1km 쯤 달리면 호점산성 주차장이 있고 산행 개요도와 안내 표지판이 있다. 이곳에서 245봉- 갈미봉-전망대 - 345봉-치알봉(444)으로 돌아 주차장으로 내려오기로 했다. 3시 20분에 출발했다.
<개요>
호점산성은 회남면 남대문리, 거교리, 회인면 용곡리 경계에 있는 호점산(338m)을 중심으로 해발 280m 이상의 산봉우리 5개 및 그 사이의 계곡을 둘러싼 석성이나 지형이 매우 험하고 가파른 서남쪽 1.2km는 흙으로 쌓은 토석축산성으로 전체 둘레는 약 2.7km이며, 삼국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전설에는 최영장군의 태를 묻었다고 하고 금칼이 숨겨져 있으며 우리나라 사람이 3일간 먹을 양곡이 묻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현재는 호점산성 주위로 약 3.5km의 등산로가 개설되어 있다.
<보은군 홈페이지>
<호점산성에 대한 일설>
회남면 남대문리 거교리와 회북면 용곡리 경계에 있는 호점산을 중심으로 해발 280m 이상의 산봉우리 5개 및 그 사이에 계곡을 둘러싼 석성이나 지형이 매우 험하고 가파른 서남쪽 1.2km는 흙으로 쌓은 토석축 산성으로 전체의 둘레는 2,722m이다. 대부분의 옛 기록에 고을의 남쪽 9 리에 있고 둘레는 858보이며 매우 험하고 오래되어 무너졌으며 안에 1개의 샘이 있었으며 사철 내내 물이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자료에 의하면 성벽 안쪽의 높이는 석축부분이 1.8m이고 토축 부분은 2.3m 정도이다. 문 자리는 6개소로 확인되었고 이중 성의 북벽에 1처, 서쪽 망대의 북쪽에 1처, 남벽에 대문인 남문이 있고 동벽에 3처가 있었다. 산성에서 발견된 유물은 신라계와 고려시대의 토기조각과 도기 조각, 기와조각이 발견되고 있어 삼국시대에 쌓은 것으로 보인다. 등산하는 동안 기와조각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1개 또는 3개의 우물이 있다.
전설에는 최영장군의 태를 묻었다고 하고 금 칼이 숨겨져 있으며 우리나라 사람이 3일간 먹을 양곡이 있다고 전해져 마을 사람들이 산에 올라가 보물을 찾는다고 하여 산성이 그때에 더욱 훼손되었다고 한다. 산성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어 가을에는 송이버섯 군락을 이룬다고 한다.
호점산성 찾아가는 길
호점산성 위치도
성곽 개요도
호점산성 유래 표지판
주차장에서 남쪽을 바라보니 잘 다듬어진 등산로가 보였다. 그러나 안내 표지판은 빗물에 뽀얗게 닦여 글씨는 보이지 않는다. 산불조심 표지기만 바람에 날린다. 길을 따라 올라가니 통나무로 계단을 만들어 놓기도 해서 걷기에 편안하다. 고개를 넘으니 평평한 길이 나오고 골짜기로 들어 간다. 계곡에는 물이 졸졸 흐르고 인적이 없다. 계곡을 건너는 나무 다리가 우거진 잡초에 덮여 있다. 여기에서 산으로 오르는 북쪽 산성으로 오르는 길과 남쪽 성곽에서 내려오는 길이 만나는 삼거리이다. 안내 이정표가 있지만 역시 말이 없다. 그냥 북쪽의 가파른 길을 타고 올라간다.
남향 기슭에는 어느덧 봄기운이 서려 있다. 파른한 새순이 돋는 덩굴도 있다. 봄볕을 쬐던 고라니 한 마리가 불청객의 이야기 소리에 놀라 산 줄기를 타고 뛰어 오른다. 아내가 놀라 소리쳤다. 가파른 길에 통나무를 놓아 걷기엔 불편이 없다. 올라갈수록 길은 더 가파른데 줄 난간을 만들어 놓아 잡고 올라가면 쉽게 올라갈 수 있었다. 올라가는 길에도 전장의 흔적이나 기왓조각이나 선인들의 삶의 흔적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렸다. 기록에 의하면 토기나 기와편이 나왔다고 하는데 내 눈에 띠지 않았다. 금칼도 어디인가 숨겨져 있다고 하는데 내 눈에 뜨일 리는 없다. 아내는 힘차게 잘도 올라간다. 주변은 온통 구들장을 만드는 납작납작한 돌이다. 문득 좁은 식견으로 점판암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확실히 알 수가 없다. 이 돌이 성을 쌓는데는 아주 편리할 것 같았다. 구들장처럼 납작하여 크지 않은 데다가 기와를 올리듯이 쌓기만 하면 되는 일이니 부녀자들도 가능할 것 같았다.
산행 입구
삼거리 이정표
침묵하는 이정표
안부에 오르니 우리 차를 세워 둔 주차장이 보인다. 여기부터 성의 흔적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누군지 성돌로 장난삼아 탑을 쌓아 놓은 흔적도 있다. 능선에 올라서니 성곽의 흔적은 뚜렷하게 드러난다. 낙엽 더미에 묻혀 있지만 가지런하게 그리고 고스란히 남아 있다. 마치 어느 농가의 얌전한 담장으로 생각될 정도도 다정한 마을 골목을 걷는 기분이었다. 아내와 나는 호젓한 산길을 여유있게 거닐었다. 숲이 우거진 속에도 성 안쪽으로 사람들이 다녀서 길이 잘 나 있다.
서쪽 사면은 비교적 완만한 경사의 산 위에 성돌도 얌전하게 쌓았다. 그리고 성안 길은 오르막길도 없이 평탄하다. 울창한 참나무 숲길이다. 숲 사이로 보이는 능선이 뚜렷하다. 능선을 따라 쌓은 성이 손에 잡힐 듯 육안으로도 보인다. 완연한 포곡식 산성이다. 골짜기를 감싸 안은 성이 이렇게 온전하게 보존 되는 것도 예사롭지 않다. 갈미봉에서 전망대까지 길은 아주 평탄하다. 따뜻한 담장 밑을 거니는 기분이다. 담장 같은 성벽이 중간에 뚝 끊어진 곳이 있었다. 성이 무너진 부분인가 했더니 그것도 아니었다. 암문인지 문지인지 알 수가 없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북쪽, 서쪽에 문이 한 곳씩 있다고 하고 남쪽으로 대문이 있다고 한다. 곳곳에 이런 설명을 한 표지판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이정표조차도 말이 없는데 어떻게 그것까지 바랄 수가 있을까? 더구나 호점산성에 대해서는 적당한 기록도 없다. 다만 보은에서 가장 큰 산성이라는 것 밖에는----.
전망대에 오르니 염티에서 내려오는 자동찻길이 구비구비 한 눈에 보인다. 골짜기에 옹기종기 마을이 정겹다. 전망대에서 숨을 돌렸다. 여기에 보은군 표지가 있는 삼각점이 있었다. 이곳에서 성이 한 눈에 보였다. 치알봉이 정상이라고 하지만 성의 중심은 이곳으로 해야할 것 같았다. 여기서 남쪽으로 청주 대전 간 도로가 훤히 보이고 대청호가 한 눈에 들어왔다. 서쪽으로는 염티재로 오르는 길에 차 한 대 지나는 것까지 훤이 보인다. 북으로도 샘봉산에서 피반령으로 뻗어가는 지맥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동으로는 산성의 안동네 아늑한 골짜기를 품고 있다. 생각에 아무래도 여기에 가장 높은 망루가 있었으리라.
능선길을 잡았다. 여전히 이정표는 하얗게 말이 없다.
올라온 비탈길
낙엽에 덮인 석성
갈미봉에서 전망대로가는 평탄한 길
농가의 담장 같은 석성
소박하게 쌓아 올린 석성
성은 중간에 끊어지고 나무가 참나무가 우뚝 섰다. 성문인가 암문인가
전망대에서 바라본 남대문리
전망대
삼각점
숨을 고른 다음 정상인 치알봉을 향해서 걸음을 옮겼다. 나즈막한 내리막길이다. 내리막길 부분에 마치 망루라도 있었던 자리인지 다른 곳에 비해 좀 더 높고 규모가 큰 성곽을 발견했다. 쌓은 방법도 정교하고 더 높다. 성곽의 너비도 훨씬 더 넓다.
높은 데서 바라보면서도 대체 이 성은 언제 축성한 것이며 어떤 용도였을까? 보은군 홈페이지에도 나타나 있지 않다. 이렇게 원형이 거의 남아 있는 산성에 대하여 연구가 되지 않았을 리 없다. 내가 더 연구하고 찾아봐야 할 것 같다. 섣부른 짐작은 금물이지만 청주의 부모산성을 중심으로 삼년 산성 호점산성 문의의 구룡산성이 연결되는 어떤 방어망이 형성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삼년산성보다 규모는 크지만 보은에서 청주로 가는 길목이기에 신라는 삼년산성을 방어하는 보조성 역할을 했을 것 같고 고구려라면 삼년산성을 공격하는 거점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것이 무식한 생각이겠지만 연구는 추측과 가정에서 시작되고 그것이 증명되면 역사가 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문지인가? 성루가 있던 자리인가? 규모가 크다.
내리막길을 내려서니 평탄한 성곽 길이다. 주변에 소나무가 우거지고, 우거진 참나무에 가렸지만 전망도 좋다. 쭉쭉 벋은 나무 사이로 대청호 푸른 물이 보기 좋다. 공기가 맑다. 새소리도 난다. 봄볕이 따스하다. 아내는 몇 번이고 좋다고 한다. 친구들과 한 번 오고 싶다고 한다. 거리도 그만하면 오후 산행으로 할만하다. 산성의 역사만 확실히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헌을 자꾸 뒤져 보아야겠다.
354봉에서 남대문리로 향하는 이정표를 만났다. 말하는 이정표를 처음 만났다. 반갑다. 여기서 남대문리가 1km라고 한다. 그쪽으로 내려가 보고 싶었지만 차 있는 곳으로 가야한다. 치알봉으로 향했다. 아주 가깝다.
평탄한 소나무 길
우거진 솔 숲
치알봉에서 전망대를 지나 바로 능선을 타고 내려와야 하는데 산줄기를 하나 더 지나서 내려왔다. 길은 잘 다듬어져 있지만 경사가 급해 고생을 했다. 그러나 거리가 짧으니까 별 것 아니다. 나무를 잡고 비탈길을 조심하면서 내려오니 주차장에서 마을 쪽으로 300m 쯤 내려온 곳이었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5시 10분이다. 1시간 50분 산행이다. 안내 표지판에는 3시간이라고 되어 있지만 우리가 지나치게 빨리 걸은 것인가? 천천히 걸어도 2시간이면 충분할 것 같다. 돌아오는 길은 회인을 거쳐 피반령을 넘었다. 운전도 편하고 거리도 가깝다. 몸이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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