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답사/忠淸의 山城

충북 보은 삼년산성 답사

느림보 이방주 2010. 3. 26. 06:31

  2010년 3월 13일

 

오늘은 아내와 함께 보은에 있는 삼년 산성을 둘러 보기로 했다. 삼년산성은 우리 고장에 있는 산성으로 세계문화유산 후보까지 올랐는데 멀리서만 보고 직접 올라가 보지 않았기 때문에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다.

 

바람이 약간 불고 날씨가 흐렸지만 삼년산성은 그렇게 크지 않기 때문에 부담은 없었다. 집에서 10시쯤 출발하였다. 피반령을 넘을 수도 있지만, 최근에 창리 쪽으로 다녀 보지 않아서 그 길을 택했다. 가는 동안에 빗방울이 조금식 떨어졌다. 보은을 지나 속리산 쪽으로 한 2km 달려 보은정보고등학교 앞을 지나 산성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에는 차가 한 대 주차되어 있었다. 성 입구에 민가가 한 두 채 있고 과수원도 있다. 어느덧 떨어지던 빗방울도 멎고 따뜻한 봄볕이 내려 쬔다. 아내가 정구지 밭을 매는 농민과 이야기를 나눈다.

 

 

보은 관광지도 

 

삼년산성 전체 배치도

 

정문 부분 바라보이는 산성은 엄청나게 큰 규모로 보였다. 처음에는 1,500년 전 산성이 이렇게 완벽하게 남아 있는가 하고 놀랐으나 가까이 가보니 최근에 보수했다는 것이 지나칠 정도로 표가 났다. 운주산성처럼 무너진 대로 그냥 두고, 무너질 우려가 있는 부분은 더 이상 무너지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 문화재를 보존하는 길이라고 생각되었다. 삼년산성은 처음에 어떤 모습이었을까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생각에 따라서는 개축이라고 할 만했다

 

 

<개요>

충북 보은군 보은읍 북쪽 2km 지점의 오정산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

사적 제235호. 면적 22만 6000m2.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이 산성은 470년(자비왕 13)에 축성하였는데, 3년이 걸렸다고 하며, 신라는 이곳을 백제 공격을 위한 최전방기지로 삼았다.

성문(城門)은 보은읍을 내려다볼 수 있는 서쪽 수구(水口) 부근에 있다. 성벽은 주위의 능선을 따라 견고하고 웅대하게 구축하였는데, 높이는 가장 높은 곳이 22m에 달하고, 너비는 5∼8m이며, 전장(全長) 1,680m에 이른다. 성벽의 구축 방법은 내외면 모두 석축으로 수직에 가까운 벽면을 이루게 하였고, 전형적인 협축공법(夾築工法)을 채용하였는데, 특히 이 협축성벽은 토사(土砂)를 전혀 섞지 않고 내부까지 전체를 석축으로 견고하게 구축하였다.

 

성 입구까지는 시멘트 포장 도로였다. 젊은 부인 한 사람이 아이들을 데리고 내려 온다. 입구가 바로 성의 정문이었던 것 같다. 문은 서쪽을 향해 있고 동쪽 남으로부터 동쪽, 북쪽으로 능선을 따라 돌을 다듬어 쌓은 전형적인 포곡식 산성이다. 성문은 자연스럽게 구릉의 서쪽 수구 쪽으로 나 있다, 문루가 있었다면 문루에 올라 바라보면 보은읍이 다 보일 듯했다. 문지에서 성을 보니 어마어마하게 높다 기록에 의하면 가장 높은 곳이 22m에 달한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성안으로 들어가 남쪽 성벽을 따라 올라갔다. 성 위로 오르는 길 옆에 나무 층계가 있어 층계를 밟고 올라갔다. 성벽 위에 올라가 보니 거의 10m 가까이 될듯한 성루가 네모 반듯한 돌로 꽉 짜여 있었다. 대개 이렇게 넓은 석성은 양쪽에 돌로 축대를 쌓고 가운데는 흙으로 채우는 것이 상례인데 삼년산성은 넓은 부분을 모두 돌로 쌓았다. 성 위에서 내려다 보니 어지러울 정도로 높다. 여기서도 보은읍이 다 내려다 보였다. 

 성문 쪽에서 올려다 본 성벽

 문지 부근의  성벽

 문지에 서서 - 건고하게 쌓은 성벽의 모습이 보인다

 성벽아래 선 아내

 돌로 꽉 채운 성면

 너비가 거의 7~8m에 이른다고 한다

 

성벽 바로 아래에 오솔길이 나 있어서 오솔기를 걸었다. 얼음이 풀려 황토가 질척질척하다. 성벽 보수 공사를 중단한 흔적이 여기 저기 보인다. 오솔길을 따라 올라 가니 가장 놓은 봉우리가 나왔다. 망루인가 하고 올라가 보았다. 과연 사방을 조망하기에 좋았다. 여기서 남쪽으로 옥천으로 가는 길과 남동쪽으로 상주로 가는 길이 훤히 보인다. 게다가 북서쪽에 보은을 지나 청주로 가는 길에 우마차는 물론이고 강아지 한 마리 뛰어가는 모습까지 다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과연 여기에서 바라보면 온 세상을 다 들여다 보고 호령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삼년산성은 신라가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서 쌓았다고 한다. 때로는 백제의 치열한 공격을 받기도 하고, 훗날은 고구려의 공격을 막아내는 요새로 아주 중요한 구실을 했다고 한다.6세기경에는 이곳에서 신라가 백제군을 맞아 온 국력을 다 기울여 싸워 이겨 결국 백제군 3만명 정도가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이 작은 성에 3만명의 시체가 뒹굴었다고 생각하니 그날의 참상을 보는 듯하다. 그래서 그런지 까마귀떼가 날아든다. 

 

백제가 멸망한 660년 경에는 나당연합군이 이곳에서 만났다고 한다. 당나라의 사신인 왕문도가 삼년산성에서 무열왕에게 황제의 조서를 전달하려는 의식을 거행하려고 했는데 백제의 사비성에 머물던 무열왕이 이곳에 이르러 의식을 거행하려 할 때 왕문도가 갑자기 속병이 나서 죽었다고 한다. 그로 보면 삼년산성은 무열왕이 백제를 치는 거점이 되었고 당나라의 야욕을 물리치는 거점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 후 후백제 견훤과 왕건의 군대가 맞붙어 싸운 격전지가 되기도 했다. 곧 후백제는 이곳을 거쳐 보은, 회인, 청주,  충주에 이르러 한강으로 진출하려 했고, 고려는 이러한 견훤의 야망을 이곳에서 분쇄하려 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작지만 작지 않은 성이란 생각이 들어 성벽을 어루만지며 사방을 조망한다. 그리고 성벽의 돌 하나마다 스며 있는 야망의 피가 보이는 듯했다.

 

 

삼년 산성에서 삼국의 쟁패

 

동쪽으로 성벽이 어느 정도 본래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군데군데 무너져 내리는 모습이 우리를 안타깝게 했다. 동쪽은 산도 경사가 급하고 그 위에 성을 쌓아서 적군이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할 것 같았다. 무너지는 모습이지만 원형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군데 군데 원형과 개축된 부분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곳도 있었다.  무너진 부분을 보면 성벽의 중간 부분도 모두 돌로 채워 쌓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성으로 둘러싸인 구릉에는  독립가옥이 한 채 있었다. 남쪽을 향하고 있어서 요새에 있는 산채처럼 보였다. 약간 질척거리는 길을 걸었다.  

 무너진 성벽

 원형이 어느 정도 보존된 동쪽 성벽

 원형과 보수된 성벽이 뚜렷하게 구분된다

 과거의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성벽의 모습

 지나온 성벽은 무너진 채로 있다

 

성을 한 바퀴 도는데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걸음을 충분히 걷지 못했다. 발길을 호점산성으로 옮겨 하루에 보은의 산성 두 군데를 돌아 보기로 했다. 그래서 회인쪽으로 차를 몰았다. 그런데 고개를 넘자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호점산성은 뒤로 미루고 회남에 가서 삼겹살을 먹기로 했다. 회남의 면 소재지에 있는 보은식당에는 점심을 먹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솥뚜껑에 생삼겹살을 구워 묵은지에 사서 먹으니 그 맛이 일품이었다. 삼겹살은 보은에서 사육되는 돼지라고 한다. 그리고 묵은지 맛이 깊었다. 삼겹살을 먹은 뒤 집된장 찌개에 밥을 한 그릇씩 비웠다. 된장은 집에서 띄운 메주로 담갔다고 한다. 그런데 인심이 너무 좋아 양이 많았다. 아깝다. 된장 한뚝배기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손이 갔을까?

 돌아오는 길에는 염티재를 넘어 문의를 거쳐 돌아 왔다.

 소박한 점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