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답사/해외 여행

베트남 관광 1일 째 - 하롱베이 관광 -

느림보 이방주 2011. 1. 23. 18:51

2011년 1월 6일, 7일

 

베트남 하롱베이 관광

 

1. 좋은 날 : 2011년 1월 6일부터 8일까지(이상 베트남) 8일부터 11일까지 (이상 캄보디아)

2. 좋은 사람 : 잉꼬부부모임 남자회원 6명 (박호준, 이용원, 정우종, 이완호, 안중묵선생님)

3. 가는 길 : 인천-하노이-하롱베이-하노이-치엠립

                치엠립-앙코르와트- 톤레샵호수 수상촌

4. 여행사 : redcaptour

참으로 오랫동안 계획한 여행이다. 우리 잉꼬부부모임의 여성 회원들이 앙코르와트와 하롱베이를 다녀와서 그 감동을 누누히 얘기해서 우리는 마냥 부러워하기만 했었다. 그래서 작년 겨울에 준비를 했으나 회원 모두 쉬는 날이 엇갈려 갈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 겨울에는 기어이 가고야 말겠다는 생각으로 치밀하게 계획하고 내가 가장 가고 싶었는지 서툰 솜씨로 나서서 추진하게 되었다. 모임에서도 거금을 보조해 주어서 경비도 넉넉했다.

 

이번 여행의 궁극적인 목적지는 앙코르와트이다. 그러나 모두의 의견이 하롱베이를 거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대부분 여행객들이 앙코르와트를 먼저 보고 하롱베이로 향하는데 우리가 선택한 여행사인 레드캡투어는 하롱베이 관광을 끝내고 치엠립으로 날아가게 되어 있었다.

 

나는 하롱베이에 대해 크게 흥미가 없었다. 장가계, 계림을 다 보았고 우리 다도해 관광을 다 돌았고 지난 여름 홍도 흑산도를 돌아 우리 다도해보다 좀 더 규모가 크겠거니 했다. 어떤이는 계림에 물이 괴었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했다. 하긴 하롱베이와 계림은 거리도 가깝고 형성된 근원도 같기에 그것도 말이 될 듯 싶었다.

 

1월 6일 오후 1시 30분 인천공항으로 떠나는 리무진을 예매했다. 우리는 1시 20분에 터미널에서 만났다. 제 시간에 회원 모두 도착했다. 부부가 함께 다니다가 남자들끼리만의 여행이라 뭔가 새로운 기대에 부풀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겠는가? 일단 여권을 챙기고 버스에 올랐다. 날은 영하 12도를 오르락 내리락한다. 오후 7시 30분 인천발 하노이행 대한항공 KE679가 우리가 탑승할 항공기이다. 5시 미팅 시간에 너무 이른 감이 있다고 했더니 모두 일찍 가서 나쁠게 없다는 의견이다.

 

공항에 도착하니 3시 50분쯤 되었다. 5시까지 언제 기다리나? 미팅장소에 가보았더니 여행사 여직원이 한 명 나와 있다. 탁자 위에 내 이름이 써 있는 서류가 보였다. 4시에 여행사 직원과 만나 여행 안내를 받았다. 그러나 우리 일행이 10명이 안되는 6명이기 때문에 탑승 수속은 각자 알아서 하라고 했다. 레드캡 답지 않다. 지금까지 여행사 중에서 가장 친절했었는데 말이다. 전에는 항공권 발매와 수화물 부치는 일까지 도와 주었는데 나이 어린 아가씨는 차갑게 거절한다. 말이다. 다음에는 레드캡투어를 다시 고려해 보아야겠다.

 

우리가 못할 것도 없다. 우리끼리 항공권 자동발매기에서 예약한 항공권을 찾고 짐을 부쳤다. 이런 과정에서 일머리를 잘 몰라 조금 우왕좌왕했다. 나는 회원들에게 미안했다. 5시 30분이 되었다. 저녁 식사를 어쩔까? 7시 30분까지는 너무 멀다. 기내식을 바로 주는 것도 아니다. 간단히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지하 식당에 가서 자장면을 먹었다.

 

공항은 말할 수 없이 북적인다. 해외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모여든다. 대한민국은 참으로 돈이 많은 나라이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26번 게이트 앞에 가서 기다렸다. 6시 50분에 탑승이 시작되었다.

 

베트남과 베트남 민족의 시련

 

베트남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월남)은 동남아시아에 있는 사회주의국가이다. 북쪽으로는 중국, 서쪽으로는 라오스 및 캄보디아와 국경을 접하고, 동쪽과 남쪽으로는 남중국해에 면해 있다. 동남아시아 본토 중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이다. 수도는 하노이이며, 최대 도시는 호찌민 시이다. 공산주의 국가이지만, 중화인민공화국과 같은 공산 시장경제 체제를 가진 명목상 공산주의 국가다.


중국의 지배

동손 문화의 송다 청동북베트남에는 구석기 시대부터 인류가 거주하여 왔으며 청동기 문명인 동손 문화(東山 文化)부터 베트남의 역사가 시작된다. 베트남인의 선조는 중국의 화남(華南) 지방에 거주했던 월족(越族)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기원전 257년 베트남 최초의 국가인 홍방 왕조가 세워졌으나 이어 중국 세력이 밀려 들어와 기원전 111년에는 전한(前漢)에게 복속되었다. 이로부터 10세기까지 간헐적인 독립운동을 제외하고는 중국 세력의 통치가 1,000년간 지속되었다. 당대(唐代)에는 이곳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가 설치되어 이후 중국은 베트남을 안남이라고 불렀다.


독립 쟁취

938년 응오 꾸옌(吳權)은 당나라 멸망 이후 광저우를 중심으로 세워진 남한 (십국)의 원정군에게 대승리를 거두고, 이듬해 스스로 왕위에 올라 처음으로 베트남의 독립을 쟁취한 이후, 베트남 왕조의 통치가 이어져 19세기 중엽 프랑스가 침입하기까지 베트남은 독립왕국(大瞿越·大越國 등)으로 존속되고 여러 왕조가 수립되었으나 형식적으로 중국은 여전히 베트남의 종주국 행세를 하였다. 15세기의 레 왕조에서 그 절정에 달한다. 18세기 말에는 타이손왕(西山黨)의 난(亂)이 일어나 전국으로 파급, 17세기 초부터 중부 이남에서 독립적 지위를 누리던 응우옌 씨(阮氏)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응우옌 씨의 후손인 응우옌푹안(阮福映)은 떠이선 당의 난을 진압하고 프랑스의 세력에 힘입어 응우옌 왕조를 세웠다.


프랑스의 지배

그러나 2대 황제 민망(明命)이 로마 가톨릭 선교사 박해사건을 일으키자, 영국과 경쟁하여 일찍부터 인도차이나로의 진출을 꾀하고 있었던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조선에서 그러하였듯이(→병인양요), 로마 가톨릭 탄압을 구실로 삼아 1858년 다낭을 공격하고 이듬해에는 사이공을 점령하였다. 그 후 프랑스는 베트남의 북부 및 중부를 공략하여 1884년에는 베트남의 전국토가 프랑스의 식민지로 되었다. 당시 프랑스는 베트남을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 통치하였다. 상인과 군대와 더불어 기독교를 이용하여 식민지를 늘리는 행동은 제국주의 시대 서방 강대국들이 사용하던 식민지 경영 방식이었다.


프랑스에 대한 투쟁

1882년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면서 민족의 독립을 표방하는 반(反)프랑스운동이 맹렬히 추진되었고 프랑스 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베트남인의 독립운동은 20세기에 들어와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중국·일본 등지에 그들의 독립운동 단체가 만들어졌다. 이 과정에서 호찌민이 주도하는 베트남 공산당이 결성되었다. 공산당은 그 후 각파의 정치세력을 규합하여 비엣민을 설립하고 2차대전의 종결을 맞이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아 1927년에는 베트남 국민당이, 1930년에는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조직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일본이 베트남에 침입하자, 많은 민족주의 세력 중 가장 조직력이 뛰어났던 공산주의 계열은 베트남 독립연맹(비엣민)을 결성하였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1945년 8월 전쟁이 끝나자 비엣민을 중심으로 베트남민주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전쟁 전의 지배권을 되찾고자 다시 군대를 파견하였고 이는 호찌민이 지도하는 민족 세력인 비엣민(월맹)과 남북으로 대립하게 된다. 이로 인해 1946년 말부터 양국 사이에는 전쟁이 발발하였다.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이라고 부르는 타우 장군의 정권이 들어섰다.


베트남 전쟁

베트남은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으로 분단되었고 1964년부터 1975년까지 베트남은 미국에 맞서서 베트남 전쟁(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치려야 했다. 타우 정권은 1966년 새 헌법을 제정·공포하고 1967년에는 총선거를 실시하여 정·부통령과 상·하의원을 선출하였는데, 1969년 2월 월맹군이 베트남에 대하여 전면 공격을 개시하자 미국대통령 닉슨은 ‘베트남 전쟁의 베트남화(化)계획’을 발표하였다. 1972년 1월 미국과 월맹 간의 비밀회담이 계기가 되어 1973년 1월 파리에서 미국, 북베트남, 남베트남, 베트콩 간에 휴전 협정인 파리평화회담이 조인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4월 월맹군은 협정을 위반하고 맹렬한 공격을 재개하여 1975년 4월 30일, 월맹군이 사이공을 점령하자 30년에 걸쳤던 베트남 전쟁은 월맹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후 1979년 캄보디아의 침공으로 중화인민공화국 등과도 전쟁(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치렀으며, 1980년대 중반 이후 도이 머이라는 개방 정책을 펼쳐 서방 세계에 문호를 개방하였다

우리의 날개인 대한 항공은 아주 조용하고 편안하게 4시간 30분의 비행 끝에 하노이 공항에 무사히 착륙했다. 베트남 시간으로 10시 5분이다. 나는 시계를 두시간 뒤로 돌렸다. 베트남 수도의 관문인 하노이 노바이 국제공항은 기대했던 것보다 작고 시설이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다 접어 두기로 한다. 일단 짐 찾는데 40분이 걸렸다. 짐을 실어나르는 벨트에는 거의 5분여에 가방 하나씩 나오는 듯하다. 우리 일행 6명이 모두 짐을 찾는데 무려 40분이 걸렸다. 아마도 짐을 다 인력으로 옮기는 모양이다. 우리 김포 공항도 아마 이랬을 것인가? 아니다. 지금 청주 국제 공항도 이렇지는 않다.

 

그 대신 입국 수속은 아주 간단하다. 베트남 현지인이 "레드캡투어"라는 표찰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한국인 가이드를 만났다. 버스에 올랐다. 가이드 보조와 운전기사가 무든 짐을 차에 실었다. 한국인 가이드는  하롱베이(下龍)시까지 3시간 정도 걸린다고 설명했다. 김희웅 실장이라는 가이드는 친절하고 한 가지라도 더 알려 주려고 계속 이야기를 한다.

 

하룡시의 날씨는 우리 가을 날씨 쯤 되는 듯하다. 인천에서 입고간 옷을 그대로 입고 있어도 덥지 않다. 새벽 두 시에 투안차우 모닝스타 호텔(Tuan chau morning star hotel) 에 도착했다. 로비에서 방을 배정 받는 동안 아가씨가 따뜻한 계피차를 대접했다. 참 친절하다. 가이드는 과일 바구니를 하나씩 선물한다.  객실에 들자 아주 따뜻한 기운이 방안에 돈다.  깨끗하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였다. TV에서는 YTN이 나온다. 창문을 열어 볼 새도 없이 두 시가 넘어 잠자리에 들었다. 아주 깊은 잠에 빠졌다. 아침 6시 50분에 기상했다.

 

1월 7일 나는 안선생님과 같은 방에서 잤는데 동시에 일어났다. 사실 나는 일찍 잠이 깨는 형인데 조용히 누워 있었다. 커튼을 여니 밖이 보였다. 호텔은 바다 가운데 섬에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가이드로 부터 들은 것 같다. 커다란 칼로 깎은 것처럼, 흙으로 빚어 구워 놓은 것처럼 갖가지 모양의 섬이 산재해 있다. 조물주가 손가락에 묻은 진흙을 바다에 휙 뿌려놓은 것이 아닐까?

 

바다는 아주 고요하다. 양식장도 떠도는 배도 없다. 섬들만 보기 좋게 흩어져 있을 뿐이다. 원시의 모습 그대로이다. 뉴스에서는 서울은 영하 12도라고 전한다. 구제역이 더 심하게 퍼져간다고 한다. 호텔의 아침 식사는 뷔페이다. 나는 어제의 과식을 생각하고 흰죽 한탕기와 식빵 한 조각, 계란 반숙 하나를 먹었다.

 

우리가 이틀간 묵은 Tuan chau morning star hotel

호텔 창에서 바라본 다도해

고급스런 방갈로들

 

하롱베이

 

 

하롱 만는 베트남 북부, 꽝닌 성 통킹만 북서부에 있는 만의 명칭이며, 크고 작은 3,000개의 기암괴석과 섬들이 존재한다. 한자로는 "泳下龍"으로 표기한다, (그 중에서, "下龍"은 한월어로 표기하고, "泳"은 한자가 아닌 베트남어의 고유어의 쯔놈) 1994년에 유네스코의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마치 명작 조각품을 감상하는 듯한 섬들의 경관은 태양의 위치에 따라서 빛이 변하고 비나 안개에 의해 또 다른 정취가 있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지질학적으로는 북쪽은 계림으로부터 남쪽은 닌빈까지 광대한 석회암 지역이다. 석회암 지역이 풍화 작용으로 깎여나가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중국이 베트남에 침공해 왔을 때 용 가족이 침공해온 적을 물리치고 입으로 토한 보석이 하롱 만의 섬들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현재는 무인도이지만 약 7,000년 전의 신석기 시대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또 수세기 전까지는 해적의 은신처로서 이용되었고 몽골군의 침공 시에도 군사적으로 이용되었다.

호텔에서 9시 30분에 출발하였다. 우리와 4박 6일을 함께할 또다른 분들은 40대 5쌍의 부부이다. 구미에서 왔다고 한다. 그 중에 한 분은 충주가 고향이라고 한다. 알고 보면 다 지척이다. 대표를 만나 모든 행동을 함께 하기로 했다.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가이드는 계속 이야기를 한다. 베트남의 수난의 역사, 베트남의 민족, 베트남의 생활 등을 말이다.  여러가지 선택 관광이 있었지만 우리는 씨푸드와 쾌속관광만 하기로 했다. 가이드는 발맛사지를 끝까지 권했지만 우리는 끝까지 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아주 거금의 투자이다.

 

선착장은 아주 쉽게 도착했다. 우리는 배에 오르는 대로 바로 갑판으로 올라갔다. 이 많은 섬들은 하늘에서 용이 내려와 내뱉은 보석이라고도 하고 떨어진 용의 비석이라고도 한다. 그 아름다움이 과연 용이 내뱉은 보석이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선실로 내려오라는 전갈이 왔다. 다뜻한 차를 한 잔씩 마셨다. 우리는 가져간 안주와 소주를 마시고 구미 여성 회원들이 준비해온 과일을 먹었다. 그러나 바로 점심시간에 먹어야 하는 유명한 하롱베이 선상 요리를 즐기기 위해 배를 아껴야 했다.

 

이윽고 잠시 배에서 내려 동굴관광에 들어 갔다. 천궁동굴은 석회암동굴로 각종 진귀한 종유석과 석순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중국 황룡 동굴을 구경했기에 별로 신기할 것은 없었다.

 

출구에서 나와 내려오는 곳에 꽃이 만발했다. 우리나라 진달래 모양인데 덩굴이었다. 붉은 꽃이 만발해서 아주 아름답다. 관광객은 우리나라 사람도 있고 베트남 사람들도 아주 많다. 때로 중국인도 있다. 서구인들이 또 아주 많았다. 중국 관광지에 비해 서구인들이 많이 돌아 다닌다. 해안에 다리를 놓았다. 다리를 건너 선착장에 이르자 베트남 토산품이나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이 줄지어 있다. 과일은 아주 탐스럽다. 그러나 처음 보는 것들이라 사고 싶지 않다. 그렇게 뭐든 마구 먹어 소화시킬 수 있는 힘이 내게는 없다. 가게는 생각보다 깨끗하고 잘 정돈되어 있다. 고구마 옥수수 사탕수수 같은 것들은 눈에 익었지만 모양은 조금씩 다르다. 과자나 신발 같은 공산품은 우리 눈에 차지 않았다.

 

선착장으로 가는 길

선실에서 따끈하게 차 한 잔

수많은 유람선

범선이랄까 돛단배랄까

 

 

섬과 어울린 유람선 - 작은 배는 행상

동굴로 향하는 다리- 베트남 국기가 보이는 곳이 동굴 입구

봉 티엔 동굴이란 뜻인가?

동굴입구에서 - 이용원 선생님

같은 자리에서

석순과 종유석

석순의 아름다움

동굴 출구의 아름다운 꽃-이름을 모르는데 이 꽃이 우리 진달래만큼 많다.

동굴에서 나와 다리를 건너 유리네 유람선으로

선착장 주변의 가게들

 

다시 배에 올랐다. 티탑이라는 가장 높은 섬의 전망대에 올라간다고 한다. 멀리서 우리가 올라갈 티탑 섬이 보였다. 갑자기 저기를 또 어떻게 올라가나하는 약간의 근심이 일었다. 그러나 바로 근심하고 있는 자신을 근심하게 되었다.

 

이제 그야말로 유람이 시작된 것이다. 갑판 위는 쌀쌀하다. 배가 멈추면 바로 아이들을 시켜 장사를 하는 작은 배들이 달려든다. 뱃전에 올라서서 아주 위험하게 바나나나 베트남의 이름 모를 과일을 판다. 무조건 1달러이다. 살 수가 없다. 사서 바로 버리려면 몰라도 먹을 수는 없을 것 같다. 과일을 파는 어린이들이 한 달 이상 씻지 않은 것 같다. 그렇다고 1달러를 그냥 줄 수도 없다. 그랬다가는 그만한 아이들이 떼로 몰려든다고 한다. 사지 않으면서도 과거 우리 어린 시절의 우리의 모습을 생각나게 했다. 결국 마음씨 약한 정우종 선생님이 파인애플과 바나나를 샀다. 그런데 계속 다른 것도 사라고 요구한다. 그 맑은 눈빛과 연민을 느끼게하는 손짓은 진실일까 연기일까? 부모인지 배후인지 어른은 배의 키를 잡고 먼 산을 바라보고 있다.

 

배는 우리 16명이 전세를 낸 것이다. 우리나라 같으면 다만 열 여섯명으로 이렇게 큰 배를 띄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넉넉하게 즐겼다. 기기 묘묘한 섬을 구경하다가 양식장인지에 들러 가이드가 물고기를 샀다. 배에서 회를 뜨고 요리를 하여 점심을 먹었다. 비싸기도 하지만 아주 훌륭한 점심상이다. 다금바리회라고 하는데 맛은 다금바리가 아니다. 우리는 가져간 소주를 다 마셨다. 구미 손님들도 소주가 거나하다. 여성회원들이 더 맛나게 먹는 것 같다. 우리는 가끔씩 술잔을 주고 받았다. 그러나 나는 술을 조심해야 하기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이 불편함을 누가 알아주랴. 술이 지독하게 마시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겨우 조금씩 받아 입에 축였다. 사실은 현지 술을 팔아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술을 마시며 풍경을 즐겼다.  바람은 쌀쌀하지만 풍경이 좋고 입이 즐거우니 더 바랄게 없을 듯하다.

 

어린이를 시켜 물건을 파는 장삿배

기기묘묘한 섬

가이드 김희웅 실장은 멋쟁이다

베트남 모자 -나중에 잃어버렸다

키쓰 바위

고요한 바다와 용의 비늘

이완호 교장선생님

섬을 배경으로

참이슬과 다금바리회 새우튀김

술을 피해서

 

일행이 술이 거나해질 때쯤 우리는 어느 선착장에 도착했다. 여기서 쾌속정을 타기로 했다. 관계자들이 달려와서 안전조끼를 입으라고 하는데 온통 고팡이 투성이다. 그래도 그냥 입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정말 입을 맘이 없는데 할 수 없이 입었다. 쾌속정은 쾌속정이랄 것도 없었다. 그리고 큰배가 못들어가는 곳이라더니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고 정작 큰 배가 못갈만한 곳이 이르자 작은 쾌속정도 가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선택한 일이니 어쩔 도리가 없다. 20불이 아깝다. 2불이라면 그러 대로 적절할 것 같았다.

 

쾌속정은 바로 돌아서 티탑이라는 섬에 이르렀다. 여기서 배에서 내려 섬으로 내려갔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초가집 모양의 원두막도 있고 화장실도 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곳에 백사장이 있다는 것이다. 석회암석이 삐죽이 솟아 오른 섬 아래에 누가 모래를 퍼다 부었을 리도 없는데 모래장이 있다. 그것도 아주 넓다. 고운 모래 밭을 거닐어 보았다.

 

정상에 오르는 길은 계단으로 되어 있다. 계단이 400여개라고 하는데 좁고 베트남 사람들의 발 크기에 맞추었는지 발이 큰 우리가 걷기에는 좀 위험했다. 베트남 사람들은 잘 올라가지 못한다. 성큼성큼 올라갔다. 정상에는 커다란 정자각이 있다. 사방으로 다도해가 펼쳐져 있다. 모두가 무인도일 것이다. 장가계에서 한 감탄을 여기서 다시 한 번 한다. 그러나 기이하기는 해도 아름답다고 하기는 어렵다. 우리 홍도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아름다움과 조화로움을 발견할 수는 없다. 우리 시각에는 우리 입맛이 길들여졌기 때문일까? 사진을 몇 장 찍고 내려와 다시 우리 탔던 유람선을 타고 고요한 바다를 일렁이며 유랑하였다.

 

구미 손님들과 우리 회원 몇 분은 선실에서 흥이 나 있고 나는 갑판에서 몇 분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바닷바람이 꽤나 차가웠다.  그러나 청주의 바람만 하랴. 바닷물과 섬을 바라며 때로 머물러 떠날 줄 모르는 배 위에서 공연히 흔들거렸다. 선장도 흥이 나는지 늘 다니는 바다와 섬에 취했는지 떠날 줄을 모른다.  

쾌속정을 타고

 

 

Ti Top에 내려서-여긴 백사장도 있다.

섬에 있는 원두막

배에서 내리며

기이한 모래장

티탑으로 오르는 게단 입구

정상에서 바라본 하롱베이

이용원 안중묵 선생님

섬, 또 섬

거기 또 한 섬

범선 한 척

모래장에서 -안선생님

배와 섬을 배경으로

 

하롱베이 유람을 마치고 시내로 돌아 왔다. 발맛사지를 받지 않는다고 섭섭해 하던 김희웅 실장은 재래시장 구경을 하라고 한다. 입구에는 수많은 오토바이가 무질서하게 세워져 있다. 시장은 청주의 작육거리시장의 5분의1 쯤 되었다. 그러나 시설이라든지 물건의 종류라든지 청결도는 비교할 바가 아니다. 과일은 풍성하지만 고급스럽지는 않았다. 기념품 가게, 옷가게, 신발가게, 학용품 가게가 있고 생선가게 같은 것은 우리나라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고깃집은 냉장고도 없이 그냥 도마 위에 고기 덩이를 죽 늘어 놓고 팔고 있다. 새끼 돼지를 통째로 바비큐 하면서 베어 팔기도 한다.   날이 어두워서 사진을 다 찍지 못한 것이 한이다.

 

재래시장은 아주 작아서 바로 끝이 보였다. 우리는 다른 곳으로 한 바퀴돌아 버스로 왔다. 저녁 식사 시간이다. 저녁식사는 진미라는 한식당에서 삽겹살로 먹었다. 베트남 술(보드카) 두 병을 샀다. 맛은 괜찮았다. 중국 술처럼  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값도 아주 싸다. 나도 한 잔 마셨다. 취한다. 전에 중국을 여행할 떼는 평양 쪽 식당을 많이 이용했는데 이번에는 전혀 아니다. 이곳 교민들이 약속을 한 모양이다. 식사후 호텔에 들었다.

 

재래시장 입구의 오토바이 주차장

과일가게

과일 가게

과일

학용품- 초등학교 학습장인가

베트남의 택시 - 아주 작다

저녁 먹은 진미 식당

 

베트남에서 첫날 관광을 이렇게 마무리 한다. 피곤해서 쉽게 잠들었다. 내일은 아주 일찍 5시에 기상이다. 하노이까지 가서 호치민 유적지를 돌아본 다음 저녁 비행기로 씨엠립으로 간다. 따뜻한 물로 몸을 씻고 자리에 누웠다. 안선생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침대에 누워 이역에서 첫날 관광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