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생활과 일상/에세이의 뜨락

에세이 뜨락 - 추억의 막걸리- 김정자

느림보 이방주 2010. 4. 16. 22:33

   
잔잔한 이야기 코너인 '에세이 뜨락'은 지역 수필가들이 1주일에 한 번씩 방문, 삶의 여정에서 건져올린 생각을 수필, 꽁트 등의 형식으로 들려주는 작은 사랑방입니다.

'막걸리는 술이 아니고 밥이나 마찬가지다.'라는 천상병 시인의 말이 생각난다. 그만큼 막걸리는 우리 민족에게 친근한 술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나라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술이다. 기록을 보면 삼국사기에서부터 전해졌다 하며 막걸리 이름의 유래는'막 거른 술'이라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술은 입에도 대지 못하지만 때로 피치 못할 자리에서 받아든 막걸리 한 잔에서 고향 같은 친근감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일까? 막걸리 하면 옛 추억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 나를 끔찍이도 귀여워하시던 할아버지께서는 늘 막걸리를 즐겨 드셨다.

중앙공원 경로당에 나가시어 해 질 녘에 집에 오실 때면 저만치 둑에서부터 내 이름을 부르시며 대문에 들어서셨다. 그럴 때면 할아버지에게선 막걸리 냄새가 폴폴 나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매일 경로당에서 내기 골패와 장기로 시간을 보내곤 귀가하셨는데 기분이 좋으면 그날 내기 장기에 승자로 끝이 난 날이지만 행여 기분이 나쁠 때면 호주머니가 털려서 오시는 날 같았다. 그런 날이면 어머니는 잽싸게 광으로 가셔서 양은 주전자에 막걸리를 들고 나오시든지 그렇지 않으면 전방으로 달려가셨다.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막걸리 한 대접 따라 드리며 할아버지의 마음을 위로하시기 위해서였다.

또 한 가지 막걸리에 대한 추억이 생각난다. 들에 일꾼을 얻어 모심기를 하노라면 어머니는 새참으로 광주리에 갖은 반찬을 장만하여 밥과 찌게 고등어조림 장떡 등 한 광주리 차려 머리에 이고 막걸리가 든 양은 주전자는 나에게 들라며 뒤따라오라 하였는데 어느 날은 좁은 논둑길을 잘못 밟아 넘어지는 바람에 막걸리를 쏟아 혼쭐이나 한참을 논둑에 주저앉아 울기도 했었다. 생각하면 막걸리는 내겐 먹지는 못하지만, 추억의 술이기도 하다.

일 년에 큰 명절 때면 어머니는 집에서 술을 빚으셨다. 어머니가 술을 빚기 위해 찹쌀로 고두밥을 쪄서 말릴 때가 어린 내게는 너무도 좋았다. 쫄깃쫄깃 입 안에서 씹히는 고두밥을 배가 부르도록 먹고 싶었지만, 맛보기밖에는 주지 않아 언제나 입맛만 다시곤 했었다. 그 고두밥의 촉감과 맛과 고소한 향기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방아에 누룩을 찧을 때 어머니의 얼굴은 언제나 제신(祭神) 앞에 임하는 그대로의 경건한 표정이었다.

술을 담글 때는 주로 찹쌀이나 멥쌀 고두밥을 찐 다음 수분을 건조하게 해 지에밥을 만들고서 여기에 누룩 빻은 것을 따뜻한 물에 비벼 독에다 넣고 일정한 온도에서 발효시키고자 이불을 둘러놓으면 3∼4일 뒤 매캐한 주정 냄새와 함께 뽀그락뽀그락 소리를 내며 술이 괸다. 온 방 안을 채워 오는 향긋한 술 냄새. 5∼6일째가 되면 익은 정도를 보아서 처음으로 체에 걸러 시음에 들어간다. 이때 술 거르는 체를 용수라고 하였다. 이 대목에 웃지 못 할 사연이 있다. 우리 할아버지의 성함이 쓸 용자 지킬 수자로 '용수'였다. 어머니는 술을 거를 때면 할아버지가 계신 사랑방을 향해 "얘야 부엌에 가서 용수 가져오느라"라고 하며 눈을 끔쩍하시면서 할아버지 눈치를 살피기도 하였다. 평소에 엄하시고 역정을 잘 내시던 할아버지가 그때만은 못 들은 척 하시고 헛기침으로 반응 하시면 온 식구가 낄낄거렸다.

할아버지의 성함과 술 거르는 체의 이름이 같았으니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웃음이 나오면서 할아버지가 그립고 시어른을 위해 전심으로 술을 빚던 어머니도 보고 싶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모두 내 곁을 떠나신 지금, 막걸리를 보면 그 분들 얼굴이 떠오르고 용수가 생각난다. 그 속에서 어머니 곁을 따라다니며 고두밥을 뜯어 먹던 어린 소녀가 된다. 그 때는 어른들이 왜 막걸리를 좋아할까 의아해 했는데 이젠 내가 그 나이가 되어 보니 어렴풋이 그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다. 희고 걸쭉한 막걸리에는 어르신을 공경하던 어머니의 정성과 경건한 기도가 녹아있다. 또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정이 물속에 흐르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막걸리는 서민에게 값이 싸서 좋을뿐더러 막걸리의 다섯 가지 덕이 있다고 한다. 허기를 다스려 주는 덕, 취기가 심하지 않은 덕, 추위를 덜어주는 덕, 일하기 좋게 기운을 돋워 주 는 덕, 의사소통을 원활케 하는 덕이라 전한다. 본디 한국인은 사발에 가득 부어 시원하게 들이키는 희고 걸쭉한 이 막걸리를 통해 일의 흥을 돋우고 정을 나눠왔다.

막걸리는 단순한 술이 아닌 것 같다. 다섯 가지 덕이 아니라도 막걸리 속엔 우리네 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발효된 삶의 애환이 녹아있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용수: 다 익은 술독 안에 박아 넣어서 맑은 술을 얻는 데 사용하는 도구이다. 주로 가늘게 쪼갠 대나무나 싸리나무, 버드나무 가지나 칡덩굴의 속대, 짚 등으로 촘촘하게 엮어서 둥글고 깊은 원통형 바구니 모양으로 만든 체의 일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