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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면 그녀를 만난다. 눈을 감고 아무리 상상을 해도 봄꽃 같던 시절의 모습만 아른거린다. 중년이 되어 해후라니 조금은 긴장되고, 설렌다.
석 달 전쯤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꿈인 듯싶었다. 친구는 지인의 말대로 혹시나 하고 미국에서 한국 인터넷에 들어와 내 이름을 치고 세심하게 살펴보았단다. 설마 했는데 어느 문학 홈페이지 회원정보란의 내 소개가 확실한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왜 그리 가슴이 뛰던지 전화버튼을 누르는 데도 손가락이 바르르 떨렸다며 말을 잇지 못한다. 나인들 그 친구를 잊고 살았을까.
새침하지만 명랑한 친구와는 달리 난 내성적이고 낯가림이 심했다. 그런데도 그 친구 집을 하루가 멀다 하게 들락거렸다. 친구 집에 가려면 가파른 언덕길이 있어서 항상 숨이 턱에 닿았었다. 그래도 학교를 파하면 친구가 손을 이끄는 대로 싫다않고 따라갔다.
문이 닳도록 오가는 딸 친구가 귀찮고 밉상일 수도 있었을 텐데 늘 환한 미소로 반겨 주시던 어머니도 눈에 선했다. 건재하시다니 감사한 일이었다. 동생들도 친누나, 언니처럼 나를 살갑게 잘 따랐었다. 지금은 모두 미국에서 잘살고 있다니 대견스러울 뿐이다. 그런 친구 가족의 편안한 분위기 때문에 소심한 내가 반죽 좋게 자주 친구 집에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인생은 크고 작은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인가 보다. 우리가 성장하면서 예전처럼 자주 만날 수는 없었지만, 여전히 든든한 친구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친구는 야속하게도 대학 졸업 후 결혼하여 미국으로 떠났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다든가. 간간이 오가던 연락마저 언제부터인지 무소식이 되었다. 삼십 여년 공백의 세월동안 친구를 찾고 싶었어도 방법이 없었다. 이미 친구의 친정도 이사했는지 연락이 닿지 않았다.
가끔은 친구가 몹시 궁금하고 그립기도 했지만, 사정도 잘 모른 체 미운 생각도 들었다. 이젠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니 내가 친구로서 부끄러워진 건 아닐까. 소녀적의 순수한 추억을 모두 잊은 건 아닌지. 괜한 자격지심마저 생겼다.
오히려 무심한 사람은 나였다. 친구는 내가, 처음 만날 때부터 쓴 편지 40여 통을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어떤 편지를 보냈는지 기억조차 희미하지만, 뜻밖의 말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푹, 쏟아졌다.
고국을 떠나니 마음도 번잡했을 테고 가져갈 갈 짐도 많았을 텐데. 그저 사춘기 시절 유치한 감상에 불과한 편지를 잊지 않고 챙긴 친구의 우정이 고마웠다. 오랜 결별의 시간마저 우린 추억의 편지로 함께 공유한 셈이니 가슴이 뜨거워진다.
친구는 인터넷 전화니 요금은 걱정하지 말라며 자주 국제전화를 걸어온다. 그리고는 통화를 할 때마다 이 편지 기억하느냐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낭송하기도 한다.
친구가 만들어 준 회상의 시간엔 과연 내가 보낸 편지가 맞는지 가물가물한 이야기도 있다. 어느 한 부분은 까마득히 묻혀 있다가 아, 그랬었지 하고 신기하게 되살아나는 사연도 있었다. 멋을 잔뜩 부려서 도로 뺐고 싶은 머쓱한 내용도 없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나이를 잊은 채 철없이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 시절의 꿈과 우정만은 새록새록 피어났다.
내가 친구에게 펜으로 종이에 편지를 썼듯 요즘 손 글씨를 쓰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우편함을 열어보면 세금 고지서나 통신문으로 가득 차 있다. 가끔은 아날로그의 진짜 편지가 그리울 때가 있다. 손 글씨로 쓴 편지글을 읽으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 사람의 속내가 전해지기도 한다.
글씨체를 보면 그 사람의 성격도 어느 정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금은 대부분 컴퓨터의 편리함에 익숙해져 전자메일로, 문자메시지로 소식을 전하는 바람에 그 순간의 마음을 읽지 못한다.
친구가 내 편지를 아직도 보관할 수 있었던 건 따뜻한 체온이 담긴 정 때문일 수도 있다. 나도 글을 쓰기 위해선 으레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지만, 종이에 펜으로 편지를 써 본 적이 언제인가 싶다.
고국에 온 친구에게 어떤 선물이 좋을까 고심했다. 식탁에 앉아 차를 한 잔 마셨다. 그 친구가 좋아한다는 내 글씨체로 한껏 멋을 부렸다. 아무래도 마음에 안 든다. 써 내려간 편지를 구기고는 다시 시작해본다.
'꽃향기 가득한 사월에 널 만날 생각을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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