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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音)에 대한 감각이 둔하고 가락이나 목소리의 높낮이 등을 분별하지 못해서 노래를 잘 못 부르는 사람을 보고 음치라고 하는데, 나는 길눈이 어두워 길치다. 운전을 하기 전에는 내가 그렇게 심각한 길치 인 줄을 몰랐는데, 운전을 하면서 내가 정말 못 말리는 '길맹'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침마다 딸애를 태우고 출근하는데, 학교 앞에 딸애를 내려주고 나면 번잡한 시내로 접어들게 된다. 딸애 때문에 출근길은 언제나 시내를 통과해서 출근하고, 퇴근길에는 무심천변을 따라 퇴근한다. 이 두 길이 내가 다닐 수 있는 나만의 출, 퇴근길이다.
언젠가 한번은 직장에서 회식하고 같은 방향이라 동료를 옆에 태웠다. 동료의 집이 바로 딸애가 다니는 학교 앞이었다. 3년 동안 아침마다 다닌 길이라 눈을 감고도 갈만한 길이었지만, 퇴근길엔 한 번도 그 길로 다녀보지 않아 학교로 진입하는 삼거리에서 당황하고 말았다. 낮이었으면 그렇게까지 당황하지 않았을 텐데, 깜깜한 밤이라 매일 아침 지나다닌 길이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길 같아 좌회전을 하는 길에서 사고가 날 뻔했다.
차가 별로 안 다니는 늦은 시간이라 우여곡절 끝에 집에 도착했지만, 처음 접하는 길에 대한 불안감으로 등줄기에 땀이 흘러내렸다. 아침에 분명히 반대편으로 지나왔는데 왜, 가는 길은 알지 못하는지. 나는 한 번에 한쪽 뇌만 쓰게 되어 있나 보다. 지나는 길 한쪽만 보게 되고 건너편엔 무엇이 있는지, 어떤 건물이 있는지 신경이 가지 않는다. 그런 나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던 남편도 요즘은 다니면서 도로나 건물에 신경을 안 써서 그런 거라며 위로의 말을 건넨다.
운전을 한 지 10년이 넘었다. 운전경력 10년이면 남들은 못 갈데없다고 하는데, 난 아직도 고속도로는 물론이고 장거리 한번 나가보지 못했다. 꼭 가야 한다면 이정표를 보고서 찾아갈 수야 있겠지만, 우선 모르는 길에 대한 불안감과 두려움 때문에 선뜻 운전대를 잡지 못한다. 드라이브를 하고 싶어도 못 하고 주차장에 차를 세워둔 채 안타까운 시간을 보낼 때가 잦다. 어떻게 하면 길을 잘 알고 목적지가 어디든 운전해서 다닐 수 있을까 싶은 생각에 남편한테 조언을 구하면, 상세하게 도로 설명을 하다가도 내가 못 알아들으니 짜증을 부린다.
타고날 때부터 음치가 있듯이 나도 태어날 때부터 길맹으로 태어났나 보다. 외출을 했다가 길을 잘못 들어 처음 갔던 길로 되돌아가서, 돌아올 때 나도 내가 한심하고 불쌍해서 웃는다. 청주로 이사 온 지 10여 년이 지났지만, 주로 다니는 길이 집과 회사 정도다. 집에서 회사 가는 길과 회사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것도 방향이 틀리지 않게 왔던 길로 왔다 왔던 길로 가는 것밖엔 하지 못한다.
중학교 다닐 때에도 눈 속에서 길을 잃고 몇 시간을 헤맨 적이 있다. 사흘 내리쏟아진 눈이 무릎까지 차 오던 날, 학교에서 돌아오다 길을 잃은 것이다. 30분이 넘는 통학 거리였지만, 평소엔 잘 다니던 길이?모두 하얀 세상이 되어 있어 길이 분간되지 않았다. 서너 시간을 눈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보니 마치 눈에 홀린 것처럼 엉뚱한 동네가 나오기도 하고, 너무 긴 시간을 눈과 싸워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현기증이 나고 얼어버린 발은 감각도 없었다.
밤이 되니 눈은 더 하얗게 빛이 났고, 도로와 인도의 경계선도 구분되지 않았다. 어떻게 집에까지 왔는지, 돌아와서 이틀을 끙끙거리고 앓았던 그날 일을 생각하면 아득해진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눈 속에서는 길을 잃어버리기가 십상이고, 그래서 눈 속에 갇히면 길의 감각을 잃어 동사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남편은 청주시내는 어디든 길이 연결되고 통하기 때문에 겁먹을 필요 없고, 길을 잘못 들었어도 당황하지 말고 그냥 가라고 한다. 그러나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남편의 말처럼 나는 언제쯤이면 자유롭게 청주 시내를 내 집 드나들듯 헤집고 다니며 운전을 할 수 있을까. 회식이 있거나 모임이 있을 때마다 모르는 장소 때문에 사전에 미리 한 번씩 가봐야 하는 내 고통을 누가 알아줄까. 겁이 많아 평생 운전을 못 할 거라고 비웃던 남편 때문에 오기로 면허를 취득했지만, 내 눈이 나를 도와주지 않아 속상하다.
가끔 선글라스를 멋지게 머리에 걸치고 여유만만하게 드라이브를 즐기는 여성 운전자들을 볼 때면 나도 모르게 부러워진다. 그들도 나처럼 이렇게 길을 몰라 고생한 기억이 있을까. 언제 하루 날을 잡아 종일 운전하고 구석구석 다니며 길을 숙지하겠다던 야무진 생각도 막상 운전대를 잡고 나면 슬그머니 사라져버린다. 우선은 모르는 길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음치는 연습을 해도 안 된다는데, 나도 영원한 길치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까. 낯선 길에서 헤매 일 때마다 심장을 졸아붙게 하는 차한테 정말 미안하다. 아마도 내차가 심장이 있었다면 벌써 몇 번쯤 심장마비를 일으켰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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