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생활과 일상/에세이의 뜨락

에세이 뜨락 - 소통- 임형묵

느림보 이방주 2010. 4. 9. 22:32

잔잔한 이야기 코너인 '에세이 뜨락'은 지역 수필가들이 1주일에 한 번씩 방문, 삶의 여정에서 건져올린 생각을 수필, 꽁트 등의 형식으로 들려주는 작은 사랑방입니다.

"싸리나무 하면 고향의 아주머니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마을 아낙들이 팽나무 정자 밑에 삼삼오오 둘러앉아 걸쭉한 입담 주고받으며 싸리채반 엮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유년의 추억 한 자락이 불현듯 떠오르는군요. 뭉클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하는 글 잘 읽었습니다." sookja37의 아이디를 가진 분이 류영렬님의 <싸리나무 찬가> 수필을 읽고 내 카페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유년의 추억을 댓글로 남겨 놓았다.

나는 답례의 글을 이렇게 달았다.

"저도 님 덕분에 다시 한 번 읽어 봅니다. 고맙습니다."

며칠 지나 내가 단 답 글을 다시 읽어보니 성의라고는 전혀 없어 보였다. 내가 써놓고도 맘에 들지 않았다. 상대방은 곰국을 끓이는 진지함으로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하며 다가왔는데, 나는 지나가는 말로 답례를 하고 말았다. 더군다나 상대방이 댓글을 단 지 14일이나 지났는데도 모르고 있다가.

"정말 귀한 글 읽었습니다. 저도 시골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이런 좋은 수필은 된장국처럼 구수합니다. 서재에도 찾아뵙겠습니다." <싸리나무 찬가>작가의 글을 내가 운영하는 카페에 옮겨오면서 그 답례로 남긴 댓글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필요할 때는 아쉬워하는 말투로 사근사근 마음을 내려놓고, 그렇지 않으면 의례적으로 인사 표시만 하는 내 자신이 밉기까지 했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다. 주면 받으려 하고, 받을 때에도 더 받아야 직성이 풀린다.

얼마 전의 일도 그렇다. 대학생인 딸애와 눈높이를 같이하지 못해 벌어진 일이다. 아이가 저녁에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면서 아내에게 눈인사하며 나간다. 그런데 나는 안중에도 없나 보다. 아이의 처지에서는 엄마가 편하겠지만, 가장을 의식하지 않는 아이의 행동에 서운한 생각마저 들었다. '나를 무시하는 건 아니겠지.' 스스로 위무하기도 했지만 미심쩍어 아내에게 물었다.

"애가 나에게 인사를 안 하고 나가는데, 내가 애한테 서운하게 한 게 있어 그러나? 못 해준 게 있나?"

아내는 아니라 했다. 애들은 아빠가 고생하는 것도 알며, 아빠 생각도 많이 한다고 했다.

그랬다. 딸아이는 늘 하던 대로 인사를 해온 것이다. 상대방이 한 명이면 그 사람에게. 여럿이 있으면 '자신의 존재'를 그들 중 아무에게나. 인사는 꼭 누굴 지명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평상시 지내온 대로 가족 구성원 중 아무에게나 알려주면 그만이었다. 아이가 버릇없어 그리 한 것도 아니고 예의가 없어서 그런 가벼운 행동을 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딸아이는 우리나라가 동방예의지국이라고 해서 꼭 무릎 꿇고 넙죽 절하는 그런 문화를 고집하지 않았다. 아이만의 방식으로 상대방과 소통했다. 아내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데 나만 예민해 있었나 보다.

우리는 하루에도 많은 사람을 만나고 부딪칠 때마다 인사를 나눈다. 그럼에도 인사는 으레 아랫사람이 먼저 하는 것이 예의라고 안다. 또한, 인사를 받으면 꼭 목례를 해야 하고 말로 표현해야 정중하다고 여긴다. 아랫사람에게도 먼저 어깨를 툭 치며 "힘들지 않아, 요새 좋은 일이 있나 봐" 하면 좋을 텐데, 대우만 받으려고 한다. 꼭 나이 많다고 표시를 낸다. 밖으로 나가는 아이에게 '잘 놀다 와라'하고 내가 먼저 마음을 보였더라면…….

휴대전화가 상용화되기 전의 일이었다. 조문(弔問)을 갔다가 같은 아파트에 살던 계원을 만났다. 상가(喪家)에서의 우연한 만남이지만 너무나 반가웠다. 그 와중에 계원의 전화벨이 어둠을 갈랐다. 통화 내용을 추측하건대 모임을 주관하는 총무인 듯했다. 그런데 계원인 형은 상대방과 몇 마디 주고받더니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노발대발했다.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부고(訃告)를 문자 메시지로 보낼 수 있느냐고. 부고장을 돌리지 못할망정 일일이 전화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성화를 했다. 듣고 보니, 그게 도리일 것 같았다. 사람이 죽고 사는 일은 가벼운 인사치레나 단순한 연락으로 할 일이 아닌 것 같았다. 문자 메시지를 보지 못하거나, 내용을 잘못 보내기라도 하면 큰 결례가 아닌가.

휴대전화가 늘어나면서 형이나 내가 근심했던 그런 우려는 현실이 되어갔다. 바쁜 생활 속에서 편지나 전화로 예를 갖춘다는 것은 되레 '예의'가 아니었다. 전화가 오면 걸어가면서도 자연스레 통화하는 요즘이다. 새해 인사나 축하의 꽃다발도 엽서나 카드 대신 휴대전화가 도맡는다. 한 발 더 나아가 젊은 세대들은 전화도 귀찮아 그들의 이야기를 문자로 소통한다. 몇 줄의 언어로도 마음을 전달하기에 딱 좋기에 엄지족들은 손가락을 움직이며 온 종일 울고 웃는다. 전자우편(이메일)이 낯설고 어색할 정도다.

인사를 강제하거나 강요할 수 없다. 상품을 판매하는 매장에서도 고객의 마음이 상하면 아무리 상품이 좋더라도 다른 매장을 찾는 것과 같다. 고객과 최초 접점에서 승부를 내는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15초란다. 밝은 표정과 해맑은 미소, 거기에 따뜻한 말 한마디면 매장을 방문하는 고객의 하루의 피로가 녹는다. 상대방과의 첫인상도 인사를 나누는 2~3초 안에 결정되지 않을까.

이 거칠고 험난한 세상 내가 먼저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존경 가득한 배려와 따스함이 뭉글뭉글 피어오르는 마음이 이어져야 한다. 마지못해 만나는 자리가 아니라 마음과 마음의 소통이 있어야 한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이 있어야 한다.

거울을 본다. 못난 얼굴이지만 편안한 미소를 연습해 본다. 입을 움직이고 볼에도 바람을 불어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