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17일-2010년 1월 21일까지
▣ 여정 : 인천 → 장사 → 장가계(2박) → 장사 (1박) → 인천
▣ 기간 : 2010년 1월 17일 → 2010년 1월 21일 (3박 5일 : 20일에 귀국 예정이었으나 항공사 사정으로 21일에 귀국)
▣ 안내 여행사 : 노랑풍선 여행사 (469,000 원, 현지 가이드 교포 3세 장금자)
▣ 함께 가신 분 : 이효정 선생님 부부, 이용원 선생님 부부, 정우종 선생님 부부, 안중묵 선생님 부부, 느림보 부부(10명), 현지에서 여수 중앙여자중학교 선생님 4분 합류
▣ 청주 → 인천공항 : 리무진, 인천공항→장사공항(대한항공 KE 819), 장사 공항→ 장가계시(현지 전용 관광버스), 장사공항→인천공항(대한항공), 인천공항 → 청주 (청주 콜밴)
▣ 상세 일정
- 제 1일 : 인천 출발, 장사 도착 후 서호루 식당에서 저녁식사, 장가계로 이동 凱天大酒店(개천호텔) 투숙
- 제 2일 : 장가계 무릉원 관광 (寶峰湖 유람선 관광, 天子山 케이블카 등정, 양가계 관람, 원가계 풍경구 답사 , 백장협 차창 관광, 금편 계곡 관광, 개천호텔 투숙)
- 제 3일 : 십리화랑(모노레일), 황룡동굴, 만복 온천 온천욕, 장사 광성호텔 투숙
- 제 4일 : 호남성 박물관, 열사 공원, 김구선생 독립운동 유적지, 10시 20분 장사 출발
- 제 5일 : 인천공항 도착(2시 10분), 청주도착 (5시10분)
장사시는 호남성 수도이다.
장사시에서 장가계시까지 교통지도
◈ 제 1일 : 인천에서 장가계시까지◈
1월 17일 3시 발 대한 항공으로 장가계 무릉원으로 떠난다. 오후 1시에 여행사 안내원과 만나기로 했기 때문에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청주 시외버스정류장에서 10시에 출발하는 공항행 리무진을 미리 예매해 두었다. 그래서 아침에 좀 여유를 부렸다. 넉넉하게 9시 30분에 집에서 나왔다. 정류장에는 함께 가기로 한 안선생님 내외분, 이용원 선생님 내외분, 이효정 선생님 내외분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계셨다. 우리가 도착하자 바로 정우종 선생님 내외분이 도착하셨다. 우리는 모두 즐겁고 가벼운 기분이었다. 2008년 여름에 후지산을 함께 다녀왔기 때문에 호흡은 잘 맞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번 여행은 이효정 선생님이 다 계획하고 여행사와 연락하는 것을 해결했다. 나는 앞 자리에 앉아서 구경만 했다.
출발준비
인천대교
차는 거침없이 달렸다. 영하 15도까지 곤두박질쳤던 날씨도 많이 눅었다. 인천대교를 건너 공항이 가까워지자 정말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2009년에는 건강 관계로 비행기 타는 여행을 하지 못했다. 새해를 맞아 첫달에 가깝지만 떠날 수 있어서 정말 기분 좋다.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을 때, 앞자리에서 응원해준 이 선생님이 정말 고맙다. 공항에 도착하여 짐을 든 채로 점심을 먹었다. 공항 식당의 식사는 비싸다. 그 대신 깨끗하다. 나는 해물 짬뽕을 주문했다. 토종 중국음식점 짬뽕과는 다르게 섬세한 맛이 없다.
가이드를 만나 탑승권을 받고, 단체 비자를 건네 받았다. 그리고 가방 두 개를 부치고 출국 수속을 마쳤다. 기다리는 시간은 언제나 지루하다. 그러나 비행기 탑승 시간을 기다리는 것 만큼 설레고 지루한 일도 없다. 사실 그건 출국 때보다 입국 때가 더 그렇다. 여행에 달인인 이효정 선생님이 <좋은 생각>을 읽고 있었다. 그렇다. 참 좋은 생각이다. 탑승구역에도 서점이 있을까? 면세점이 늘어선 곳으로 기웃거리며 다녀 보았다. 있다. 주머니에 있는 한국수필가협회 어느 회원이 나의 <손맛>을 받고 보내준 문화상품권이 생각났다. <고산자>를 샀다. 소설가 박범신이 쓴 대동여지도를 그린 고산자 김정호의 생애를 그린 장편 소설이다. 한 30쪽을 읽었다. 이야기가 맛을 내기 시작할 때쯤 탑승시간을 알리는 방송이 나왔다.
비행기 창가에서
비행기는 자리가 많이 비어 있었다. 셋이 나란히 앉는 것보다 자리를 비워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옮겨 앉았다. 창밖의 풍경이 아름답다. 우리 조국의 산하는 아름답기 그지 없다. 항공기는 남으로 기수를 돌려 태안 반도의 상공을 지나는 듯하더니 어느덧 올망졸망한 섬이 아기자기한 바다 위를 날아간다. 하늘은 아주 맑다. 구름이 하얀 치자꽃처럼 몇 송이 동동 푸른 하늘을 떠다닌다. 그 아래 손으로 퍼올릴 수 있을 듯 푸른 바다가 보인다. 장난감 같은 작게 보이는 배들이 하얀 꼬리를 길게 늘이고 어디론가 떠나간다.
그것도 잠깐 바로 육지가 보인다. 잘 다듬어진 농지이다. 산허리 군데 군데 성냥갑 같은 하얀 집들이 일정하게 보이는 것으로 보아 중국 땅이다. 평야지대를 지나 어느덧 험준한 산줄기를 넘어 서니 어느새 사방은 어둑해지기 시작한다. 여기 저기 반짝 불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비행기는 중국 땅 호남성 정부가 있는 장사시의 황화 공항에 내려 앉았다. 인천공항에 비하여 매우 작지만 호남에서 가장 큰 공항이라고 한다. 입국 수속도 간단하다. 다만 여자 회원 중 한 분이 사진과 인물이 좀 달라 잠시 지체되었다. 중국은 성형이 없는 나라이니까. 해외에서 들어오는 여행객은 우리가 전부였다. 짐도 아주 쉽게 찾았다.
하늘에서 본 중국
호남성은 넓이가 한반도와 비슷하다고 한다. 인구도 6,000만이라고 하니 우리나라와 비슷한 크기이다. 중국인구가 13억이라는데 호적에 올리지 못한 사람이 2억은 된다니 그들의 대충사는 삶이 오히려 부럽다. 중국인들의 평생 소원이 첫째 제나라 글자를 다 아는 것, 둘째 제 나라 음식을 다 먹어 보는 것, 세째, 제 나라 땅을 다 밟아 보는 것이라고 하는데 누구도 이 세 가지 소원 중에 하나라도 이루고 죽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장사시>
3000년의 역사를 가진 고성(古城)
장사는 호남성의 성도로, 전국24개 역사문화유명도시 중의 하나이자, 우수한 관광도시이다.뿐만 아니라 호남성의 정치, 경제, 문화, 과학, 교육, 비즈니스와 여행의 중심지이며, 중국의 남쪽 지역의 중요한 자원, 기술, 원자재의 집산지이자 교통의 요충지이다. 장사는 부용(芙蓉), 천심(天心), 악록(岳麓), 개복(開福), 우화(雨花) 5개 구(區)와 장사(長沙), 망성(望城), 녕향(寧鄕) 34현, 류양시로 구역이 나뉘어져 있다. 총면적은 11,800평방킬로미터, 인구는 613만이며, 그중 도시 면적이 556평방킬로미터이며 인구는 199만 명이다. 20세기 초에 영국·일본 등과 통상항해조약을 체결하면서 개항장이 되었으며 1933년에 시(市)로 승격되었다.
1. 자연지리
장사시는 양 옆이 높고, 가운데 부분이 들어간 안장형태의 지형을 하고있다. 마치 매가 날개를 핀 듯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남쪽으로는 형악이, 북쪽으로는 동정호(洞庭湖)를 내려다보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류양의 대위산(大圍山)이, 서쪽으로는 녕향의 위산이 위치하여 마치 튼튼한 두 날개와 같다. 장사는 호남성의 동북쪽에 있으며, 아열대 계절풍의 습윤한 기후가 나타난다. 연평균 기온은 17.20도이며, 연평균 강수량은 1,360mm이다. 장사는 북회귀선에 근접하여 4계절이 분명하고, 여름에 비가 충분히 내리며, 또한 매우 덥다. 거기에 토지도 매우 비옥하고 수량도 풍부한데다 하천도 밀집 분포하고 있으며, 작물생장도 기간도 길고, 풍부한 생물자원이 매장되어 있다. 고등작물은 1973종으로, 쌀, 과일, 야채, 약재 기타경제작물 등이 있어서, '미시(米市)'라는 별칭이 있었다. 유명하고 귀한 녹나무는 장사의 시목(市木)이며, 붉은 진달래는 장사의 시화(市花)이다.
2.교통
장사는 육지, 하늘, 해상교통이 매우 편리하여 사방으로 편하게 이동할 수 있다. 경광(북경-광주), 낙잠철로의 대동맥이 남북을 관통하고, 절강-강소철로, 호남-귀주철로, 석문-장사철로가 동서로 연이어 접해있다. 또한, 319, 109,106 3개의 국도가 도시에서 교차되어 전국으로 가는 교통망을 형성한다. 황화(黃花) 공항은 호남에서 제일 큰 공항으로, 이미 30여 국제, 국내노선이 개통되어 있다. 훌륭한 위치와, 편리한 교통은 장사가 중부지역의 물류, 정보, 인재의 집산지이자, 동서 경제 협력의 다리이자 요충지로 거듭나게 했다.
3.역사적인 고성(古城)
일찍이 서주(西周)시기에 장사라는 지명이 있었으니, 이미 3000여년이나 되었다. 춘추전국시대, 장사는 초(楚)나라의 중요한 진(鎭)으로, 진대(秦代)에는 장사군(長沙郡)이 설치되었고, 한대에는 장사국(長沙國)으로 거듭나, '초한(楚漢)의 유명한 도시'라는 이름을 얻었다.
현재 장사는 중요한 문화재 보호단위(單位)가 140여 곳이 있으며, 그 중 국가급의 문화보호단위가 7곳이다.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는 문화재도 4만여 개에 달하며 그중 1급 문화재도 100여개에 이른다. 1970년대 이래 장사는 계속해서 대량의 역사문물이 출토되었으며, 그 중에 마왕퇴한묘와 삼국 손오기년간독(孫吳紀年簡牘)은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4.산업
농후한 역사, 문화의 분위기 속에서, 근대에는 장사시의 공업, 특히 하이테크 산업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어, 몇몇 유명한 고등학교를 의지하여, 악록산대학과학기술원과 류양생물의역원을 지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방과학기술대학, 중남[中南]공업대학, 호남[湖南]대학, 사범대학 등 23개 대학이 있다. 뛰어난 인재가 모이는 효과는 국가급의 하이테크 기술개발구, 국가급 경제기술개발구를 형성하였다. 국방과학기술대학의 은하컴퓨터, 엔지니어, 자기부상열차, 중남대학의 가루 야금 등 하이테크기술 역시 그 명예를 오래도록 누렸다. 공업도 급속도로 발전하여 알루미늄, 유리, 방적, 동력기기, 무기 등의 공장이 세워졌으며, 상수(湘繡)라고 부르는 전통적 자수제품도 유명하다. 그밖에도 전자, 기계, 식품, 방직 등이 발달한 종합 공업도시이다.
5.혁명의 성지
파란만장한 중국의 근현대사 속에서 장사는 훌륭한 혁명가들이 배출되어 중국혁명의 발원지의 하나가 되었다. 이 오래되고 신기한 토지위에서 담사동, 황흥 등이 나타났으며, 모택동, 유소기, 호요방, 주용기 등의 당과 국가의 지도자들이 태어났다. 지금도 장사는 공산당의 유적지가 관광명소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곳이 많다.
현지 가이드를 만나 버스로 안내되었다. 교포 3세 장금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長沙市에 있는 동양 최대의 식당 西湖樓에 가서 저녁 식사를 하였다. 식당은 식당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크다. 작은 왕궁처럼 어마어마하다. 식당으로 들어가는 문은 대문이 아니라 성문이었다. 누각이 우리 상당산성 공남문의 서너배는 되는 것 같았다. 커다란 하나의 성이다. 성문을 열고 대궐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주차장에 세워 놓은 차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한꺼번에 4,500명이 식사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별채로 안내되었다. 쌀밥, 미역국, 생선조림, 만두, 두부부침, 감자 볶음, 돼지고기볶음 같은 음식이 나왔지만 크게 입에 맞지는 않았다. 그러나 2007년에 왔을 때보다는 향이나 기름이 덜하다. 2004년 태산, 곡부를 방문했을 때에 비하면 거의 한국 음식이다. 서호루에서도 우리가 먹은 방이 아마도 한국인 전용 별실인가 보다. 식당은 어두웠지만 붉은 등불을 여기 저기 달아 놓아서 꼭 중국 영화의 한 장면에 등장하는 인물이 되어 들어온 기분이었다.
밖에서 본 동양 최대의 西湖樓
서호루 식당의 일부
서호루에서 먹은 중국음식
저녁을 먹고 나오니 중앙의 커다란 홀에서는 연회가 베풀어지고 있었다. 무희들이 무대에 나가 춤을 추고 홀에는 사람들이 흥청거리고 있다. 중국인들은 3년 전보다 더 기름이 흐르고 6년 전보다는 호화롭게 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중국은 그냥 보아도 엄청난 경제 성장을 이루고 있고, 사람들의 삶도 훨씬 더 윤택해졌다. 아직도 관광지에서 가마를 메는 사람이 있고, 한국인 관광객을 향하여 '천원'을 호소하고 있지만, 예로붜 속부자인 그들의 금고에 얼마나 들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내가 무쏘를 12년 째 타는 것, 아파트에 16년째 사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앞에서는 '천원'을 호소하지만 돌아서면 우리를 비웃을 것만 같다.
중국은 그렇게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맘 편하게 '만만디'를 자랑하고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면서 한국의 '빨리빨리'를 속으로 내놓고 비웃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빨리빨리' 하더라도 중국의 '만만디'하는 추월을 막기에는 너무나 힘이 부치다. 엄청난 물적 자원과 인적 자원을 어떻게 이길 수가 있을까? 그리고 작은 그들의 체구에서 나오는 배포를 가늠할 수도 없다. 그런데 우리의 좁은 시야는 아직도 '세종시' 수정안이나 '청주 청원 통합 문제'를 놓고 아등바등하고 있다. 정말 웃긴다.
차는 어둠을 뚫고 덜컹거리며 달리고, 가이드는 영남말도 아니고 북한 말투도 아닌 말로 계속해서 지껄인다. 고속도로는 넓고 곧지만 차는 계속 덜컹거린다. 의자 사이가 너무나 비좁아 다리를 뻗을 수도 오무릴 수도 없다. 괴로움이다. 시트는 거칠고 딱딱하다. 이렇게 앉아서 4시간 혹은 5시간을 달려야 한다. 그래도 중국인들은 잘 참을 것이다. 한국인의 체구를 모를 리도 없는 그들은 아무렇지도 우리에게 이것을 감내하도록 하고 있다. 자존심 쯤은 그냥 접어두고 가장 적은 밑천으로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우리의 주머니를 노리고 있다.
사방은 캄캄해서 밖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자다가 졸다가 밖을 내다 보다가 다리를 주무르다가 어느덧 장가계시에 있는 개천 대주점(개천 호텔)에 도착했다. 도어맨이 바로 쫓아와 가방을 객실까지 운반해 주었다. 정말 아깝지만 1000원을 주었다. 이만달러를 바라보는 한국인의 자존심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시골치고 호텔은 깨끗하다. 물도 따뜻하다. 그래도 방은 춥고 습습하다. 우리가 낸 여행비는 거제도에서 냄새 나는 호텔에서도 10만원 주고 하룻밤을 묵은 것을 생각하면 3일간 호텔비 정도밖에 안된다. 불평없이 그냥 잤다.
'여행과 답사 > 해외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 장가계 삼림공원 3 (제 2일 : 장가계 무릉원) (0) | 2010.01.26 |
---|---|
중국 장가계 삼림공원 2 (제 2일 : 장가계 무릉원) (0) | 2010.01.24 |
21. 우리의 금빛 날개로 (0) | 2006.08.27 |
20. 난파선의 분수, 빤떼온에 내리는 하늘의 빛 (0) | 2006.08.27 |
19. 고대 로마사의 흔적 포로 로마노 (0) | 2006.08.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