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5일
여름 햇살은 한없이 따갑다. 하늘은 우리나라 가을 하늘이 무색할 정도로 청명하다. 그 파란 하늘의 색깔이 눈을 돌리면 바로 벼가 익어가는 누런 들판이 넘실거릴 것만 같다. 따가운 햇살이 우리를 힘겹게 한다. 그러나 그늘에만 들어가면 시원하다.
꼴로쎄움을 돌아보고 우리는 점심 식사를 하고 포로 로마노로 향했다. 꼴로쎄움에서 포로로마노로 가는 언덕에 올라 내려다보자 광활한 폐허의 도시가 눈앞에 된다. 이곳은 고대 로마 정치뿐만이 아니라 산업과 종교의 중심지인 공공 장소였다고 한다. 정치 중심인 원로원과 법정, 아크로폴리스, 성당, 신전, 법원, 감옥, 시장 등이 폐허가 되어 중심가인 듯 도로 양편으로 펼쳐진 하나의 커다란 구릉이다.
언덕에서 바라본 포로 로마노
무너진 신전
이탈리아는 로마시대부터 번영을 누린 나라이다. BC 27년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최초의 황제가 된다. 최초의 통일된 제정이 40여 년간 계속되다가 로마는 여러 개의 도시국가로 형성된다.
옥타비아누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조카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가 죽은 후 카이사르의 보호를 받으면서 살았는데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후 자신이 카이사르의 후계자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라는 이름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로 개명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3두 정치를 하다가 필립피 전투에서 카이사르의 암살자를 쳐부수고 승리하였다. 이에 안토니우스는 동방을, 옥타비아누스는 서방을, 레피두스는 아프리카를 장악했다가 레피두스를 탈락시키고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를 격파한 후 로마를 통일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전쟁에서는 약했지만, 일을 신중하게 처리하고 속국으로부터 충성의 맹세를 받고, 비상대권을 원로원과 민중에게 돌려줌으로써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존엄자)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그는 공화정의 명목을 유지하면서 실질적으로 제정을 시행하였다. 그가 내정에 충실을 기하면서 그의 통치 기간인 41년간 로마는 평화를 유지하였고 라틴 문학의 황금시대를 이룩하였다. 이 포로로마노는 옥타비아누스 곧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개선문의 일종인 티투스의 아치도 꼴로쎄움의 옆에 있는 꼰스딴띠누스 대제의 개선 문과 비슷한 모습이다. 2000년 전에 세워진 건축물이 그 예술성과 함께 고스란히 남아 있다. 로마의 현존하는 개선문 가운데 가장 오래 되었다고 한다.
티투스의 아치
베스타 신전은 지금은 무너지고 기둥만 몇 개 남아 있지만, 그 아름다운 모습은 변하지 않은 것 같다. 베스타신전은 불의 여신인 베스타를 모시던 신전이라고 한다. 그래서 처녀 사제들이 제사를 올리던 곳인데, 주변의 폐허에 우뚝 남아 있어서 그런지 신성한 느낌까지 들었다. 이러한 신전이 어떻게 이렇게 망가졌는지 알 수 없다. 자연적인 지진의 영향인지, 아니면 세월의 탓인지, 누군가의 무자비한 발자국인지 모른다. 설에 의하면 2차 대전까지 어느 정도의 모습이 남이 있었다고 하는데 당시에 포격으로 무너졌다고도 한다.
불의 여신인 베스타를 모시는 베스타 신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을 딴 바실리카 율리아는 법정이다. 지금은 다 무너지고 벽만 남아 있는데 그 규모를 짐작하고도 남았다. 원로원 건물은 옥타비아누스가 공화정을 실시한 후 정치의 최고기관으로 집정관(행정과 군사를 담당하는 최고 관직)을 선출하던 곳이다. 지금 보기는 매우 소박한 건물이지만 당시에는 가장 큰 권력을 행사하던 곳이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가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붙여줄 정도로 그 권한은 선언적인 의미를 지녔던 것 같다.
바실리카 율리라 법정
원로원의 내부 모습
싸투르누스 신전은 농업의 신인 싸투르누스신을 모시던 곳이라는데 아직도 그 아름다움과 거대한 규모로 남아 있었다. 신전위에는 알파벳으로 알아보지 못할 말이 쓰여 있다. 아마도 라틴어인가 보다. 포로로마노나 꼴로세움의 여러 곳에서, 또는 거리에서 S.P.Q.R.이라는 약자를 많이 봤는데, 이것은 이 라틴어의 첫 글자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의미는 ‘로마 원로원과 서민들’이라는데 현재 로마 시청의 상징이라고 한다.
싸투르누스 신전
씨투르누스 신전 부근
그밖에 성 베드로가 갇혔던 마메르띠노 감옥, 꾸오바디스 교회, 가라깔라 욕장 등을 둘러보았다.
안토니우스와 파우스티나 신전
우리는 쎄띠미우스 세베루스의 개선문을 지나 몇 개의 계단을 올라 깜삐똘리오 광장에 이르렀다. 이 광장에서 베네치아 광장 쪽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이것은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라고 한다. 우리는 뒤쪽에서 돌아 들어갔기 때문에 이 계단을 오르지 못했다. 광장의 정면에 보이는 건물은 12세기경에 건축한 세나또리오 궁전이라고 한다. 이곳은 현재도 로마 시장의 집무실과 의회가 들어 있다고 한다. 바로 옆에 까삐똘리노 미술관이 있는데 닫혀 있었다. 광장에는 로마의 황제인 아우렐리우스의 기마상이 있었다. 우리는 궁전의 뒤로 돌아 다시 포로노마로 쪽으로 내려오려고 언덕 위에 섰다.쎄띠미우스 쎄베루스 개선문
깜삐똘리오 광장
언덕 위에서 폐허가 된 고대의 도시를 내려다보면서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당시에 어쩌면 모든 건물들이 하나로 뭉쳐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부서진 붉은 벽돌 속에 숨은 옛이야기를 말해 주는 옛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스산한 마음을 안고 돌조각이 발에 차이는 옛 도로를 걸어 꼴로쎄움 전철역으로 돌아왔다.
종일 로마를 뜨겁게 달군 햇살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무너진 붉은 벽돌만 바라보면서 지낸 하루가 피곤하다. 인간과 권력의 흥망성쇠가 동서고금이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고구려, 발해의 거대한 문하 흔적을 남에게 점령당하여 역사의 밑바닥에 매장되어가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갈라지는 아픔이다. 다행이 학계에서 최근에 고구려 역사 발굴에 힘을 기울이고 있지만, 그것은 중국의 역사 왜곡 시도에 대한 대응일 뿐이다. 전철을 타고 숙소로 돌아오면서 참으로 별수 없어 보이는 로마 시민을 바라보았다. 외모로 보면 그들이 우리보다 나을게 없는 듯하다. 그러나 자기네 역사를 지켜낸 그들이 한없이 부러웠다.
떼르미니역 지하상가에서 수박을 샀다. 1.4kg이나 되는 큰 수박이 약 6000원이다. 그 시원함이 오늘의 아픔과 갈증을 조금은 가셔 내는 듯하다.
(2006. 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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