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생활과 일상/삶과 문학

충북 수필문학회 여름 문학심포지엄

느림보 이방주 2009. 8. 12. 08:06

 

충북 수필문학회 여름 문학심포지엄

- 수필문학의 허구 유형과 수용 한계-

 

1. 일시 : 2009년 8월 11일 오후 6시 30분

2. 장소 : 거구장 회의실

3. 참석 대상 : 충북수필문학회 회원 40명 정도

4. 주제 : 수필문학의 허구 유형과 수용 한계

5. 주제 발표 : 박영수 회원

6. 지정 토론 : 조영의, 임형묵 회원

7. 사회 : 이방주

8. 사진 : 홍종희 회원이 촬영한 것을 홈페이지에서 복사하였음 

충북수필문학회의 심포지엄날이다. 금년 여름 내가 참석할 수 있는 문학 세미나 중 마지막인 것 같다.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나는 이 심포지엄의 진행을 맡았기 때문에 며칠 전부터 주제 발표를 할 박영수 회원의 원고를 받아 검토하고, 지정 토론을 할 조영의, 임형묵 회원의 토론 원고를 검토하면서 어떻게 진행해야 할까를 연구하였다. 발표자들의 소개를 하는 방법, 진행하는 순서, 질의 응답의 방법과 순서,  중간중간 넣어야 하는 말을 검토하고 계획했다. 쉽게 얘기해서 홀기를 작성했다. 특히 내가 신경 쓴 것은 발표하시는 분들이 시간을 지나치게 많이 차지한다든지, 너무 형식적으로 간단히 발표했을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깊이 생각했다. 또 진행자가 중간 중간 하는 말을 발표하는 이들의 의견을 객관적으로 보면서  주제에 넘어서지 않도록 하면서도 천박하게 보이지 않아야 하며, 수필에 관한 일반적 상식이 담기는 말이 되게 하기 위하여 몇편의 관련 서적이나 논문을 읽었다.

 

6시 30분에 시작이지만 발표하는 분들과 말을 맞추기 위해서 학교에서 5시 45분에 출발하였다. 거구장 주차장이 식당에서 멀기 때문에 도착하니 6시 10분이었다. 박영수 회원은 이미 도착하여 좋은수필사에서 선정한 한국수필가 100인의 문고판 '망초꽃 핀 언덕"이라는 자신의 작품집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아마도 저자가 사서 나누어 주는 것은 아닐까. 문학은 이렇게 척박한 환경에서 이루어진다. 그 분은 주제 발표만 하기 때문에 지정 토론을 할 조영의 회원과 임형묵 회원과 한 자리에 앉아 소개할 약력, 발표와 질의 내용을 맞추었다.

 

7시가 다 되어 회의를 시작할 수 있었다. 사무국장의 개회 선언과 회장을 대신하여 박순철 부회장의 인사말이 있었다. 다음에는 심포지움이 시작된다는 안내와 함께 이혜진 부회장의 심포지움에 앞선 인사말이 있었다. 어차피 사회가 발표자들을 인사 소개해야 하기 때문에 내가 소개해야 하는데, 사무국장이 사회를 넘겨 주기 전에 다 소개해 버렸다. 그러다 보니 부회장이 소개하고 사무국장이 소개하고 진행하면서 또 소개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그래서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나는 모두 발언을 "많은 문인들이 이 시대를 수필의 르네상스 시대라고 합니다. 수필의 중흥기를 맞이하여 우리 충북수필문학회가 추구해야 할 변화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시포지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아울러 내가 사회를 보게 된것도 사실은 시대에 변화에 따른 충북수필의 변화라고 생각했다.

 

박영수 회원은 평소 그분의 열정대로 엄청나게 많은 분량과 다양한 조사를 통하여 발표 준비를 해 온 것이 눈에 보였다. 나는 연세 드신 분이 매사에 이렇게 최선을 다하는 것을 보고 새삼 감동했다. 사실 처음에는 수필문학의 허구에 관한 논의는 이미 퀘퀘 묵은 진부한 이야기라는 생각을 했다. 많은 수필가들이 이미 수필에 허구를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수필에 수용할 수 있는 허구를 어디까지로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될 뿐이다. 그러나 그 분이 준비해 온 내용을 보면 우리 충북수필에서는 다시 한 번 논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회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 분을 좋은 수필사에서 선정한 한국의 수필가 100인 안에 든 분이라고 소개했다.

 

발표를 시작하면서 아주 짧게 하겠노라고 해서 나는 다른 걱정을 했다. 그분의 성격상 지나치게 짧게 해서 형식적으로 흐르거나, 주제발표자들보다 지정토론자들이 더 자세하고 길게 발표를 하면 어떻게 할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허구에 관한 논란, 허구 수용의 범위를 설명하면서 구체적인 예시까지 들다보니 시간이 많이 흘러서 1시간 가까이 되었다. 그래도 회원들은 지루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회장단에서 자꾸내게 사인을 보냈다. 시간을 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달랐다. 많아야 20분 정도 더 걸리는데 이야기를 다 듣는 것이 회원들에게도 보탬이 되고 그동안 준비해 온 발표자도 보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끝까지 발표를 마쳤다.

 

< 발표 원고>

 

수필문학의 허구 유형과 수용의 한계


       박  영  수

 

• 들어가며


  수필은 자신을 진솔하게 드러내 놓는 고백문학이요, 체험의 문학입니다. 수필의 생명은 사실을 바탕으로 한 진실추구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사진을 찍듯이 사실(체험)의 기록이나 전달에 그친다면 수필이 문학이 될 수 없는 일입니다. 소재의 의미화, 주제의 형상화를 통해 예술성(문학성)을 확보해야만 합니다.

  수필가는 오직 진실만을 말해야 하는 법정에 선 증인이 아닙니다. 단순한 사실의 전달자가 아니라 많은 독자들에게 공감과 감동을 줄 수 있는 창조적 예술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문학의 사전적 의미는 '정서·사상을 상상의 힘을 빌어 문자로 표현한 언어 예술'입니다. 즉 문학의 핵심이 상상력이고, 상상력이 문학(작품)의 창조를 가능케 합니다.

  일찍이 베이컨은 '사실에 매이지 않고, 사실들을 마음대로 변형시켜 사실보다 더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상상이 문학의 바탕'이라고 갈파했습니다. 이 상상(imagnation)의 광맥을 캐 나가다 보면 허구(fiction)와 만나게 됩니다. 상상과 허구, 형제간쯤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동안 수필에서 상상이 소홀히 다루어진 것은 '허구의 문학이 아니라 체험의 문학이라는 본질을 너무 편협하게 해석한 결과'(김우종)이고, '소설처럼 허구를 통하여 없는 것을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도 새로울 것이 없는 우리의 실제체험 속에서 작가의 눈으로 새롭게 선택되는 소재를 가지고 형상화 하려는 것'(이정림)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심포지엄의 주제를 '수필에 있어 허구의 유형(類型)과 수용의 한계'로 설정하고 말씀을 드려 보겠습니다.

  먼저 80년대 이후 전개된 수용에 대한 찬·반 논쟁의 핵심을 조명해보고 최근 부분적 수용으로 기울고 있는 저변의 논리, 그리고 허구의 종류(유형)와 한계를 가늠해 보겠습니다. 곁들어 졸저 <망초꽃 핀 언덕>을 텍스트로 삼아, 작품 속의 허구부분을 솔직히 털어 놓으면서 하나의 예로 접근해 보고자 합니다.

  수필에 대한 이론정립이나 이렇다 할 수필관을 가지지 못한 사람으로서, 과분한 주제발표의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평소 이 문제에 대하여 고민도 하고 적극 활용도 하고 계시는 문우들을 모신 자리이기에, 용기를 내어 두서없이 말씀을 드려 보겠습니다.



• 정진권·김시헌의 허구 논쟁 그 후


  '허구'는 소설·희곡의 전유물이고, 수필은 '허구가 아닌 사실의 기록'이어야 한다는 기존 틀에 최초로 반기를 든 파이오니어는 충북(영동) 출신 문인 정진권입니다.

  그는 석사학위논문(80년)에서부터 '수필문학이 허구성을 거부해야할 아무런 이유가 없으며, 오히려 이를 과감히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83년 한 세미나에서 발표한 '수필문학의 허구성 고찰'의 다음 부분에 허구성 수용의 당위성이 잘 담겨 있음을 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여 본인은, 수필문학이 허구성을 거부해야할 아무런 이유가 없으며 오히려 과감하게 그것을 도입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중략)

   문학작품을 읽어보면 여러 가지 다양한 인생이 반영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의 인생에서 취재는 하지만, 그것을 수정하고 변형하고 보충하고 새로이 조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새로이 조직하는 일 또는 그 결과(작품)를 허구라고 부른다. 역사나 전기의 경우와 같이 실제의 인생을 그대로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생(세계)을 창조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허구는 창조적 활동 내지 창조적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수필을 문학의 한 장르로 믿는다면 수필문학의 허구성을 부정할 이유가 없다.(중략) 요컨대 수필가가 수필을 제작할 때 꼭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겠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는 것이며, 독자가 어떤 수필을 읽을 때 그것은 사실 그대로의 기록으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처럼 현대수필 개척기에 내려졌던 '붓 가는 대로 쓰는 글', '무형식이 그 형식'에 이은 '허구불가'란 기존 틀에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선 정진권에게 반론을 제기하여 찬반논쟁의 불을 지핀 이는 김시헌입니다. '수필과 허구-정진권씨의 구성론을 중심으로'에서 다음과 같은 논리로 포문을 열었습니다.


  씨는 체험 그대로를 수필 속에 옮기는 것을 사실의 묘사라고 하였지만, 수필을 써 본 사람이면 누구나 체험의 사실을 신문기사처럼 묘사하지는 않는다. 작자가 나타내려는 주제도 생각해야 되고, 체험의 속에 담겨 있는 철학적인 의미도 정리해야 되고, 표현도 주제가 요구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게 나타내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과정을 허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허구는 전혀 없었던 사건을 새로 만들어 내는 일이다. 주변의 기초 체험을 토대로 해서 있을 수 있는 사건을 상상으로써 작품 속에 만들어 넣는 일이다.

  소설의 허구라고 하면 누구나 이해가 간다. 소설 속에 있는 일인칭의 표현은 작가가 아니고 작품 속의 주인공임을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수필 속에 표현되는 '나'라는 일인칭은 바로 작가 자신을 말한다. 그런데 실제로 체험하지도 않은 새 사건을 허구로 엮어서 수필의 내용을 채운다는 것은 문제가 아닌가?


  김시헌은 정진권이 허구도입의 예로 든 자신의 작품 '귀를 후비며'에 대한 논리를 반박하고, '허구는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아야 하고 만약 허구로 씌어졌다면 어떤 방법으로든 암시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정진권이 다시 반격합니다. '허구와 수필-김시헌 선생께 답함'(수필공원 통권 3호·1983)을 통해 '필자가 수필문학의 허구성을 말한 것은 첫째 수필은 사실의 기록이어야 한다고 믿는 통념을 부정하는 것이요, 둘째는 수필문학의 창조적 지평을 확대해 보자는 것이었다.'며, 김시헌이 허구를 '전혀 없었던 사건들을 새로 만들어 내는 일'이라고 한데 대하여 '체험을 수정하거나 보충하며 새로이 꾸며 내는 일 또는 그 결과가 허구'임을 거듭 밝혔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수필이 사실의 기록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깨져야 한다는데는 의견을 함께 했습니다.

  이 무렵 윤모촌도 허구수용 반대론에 가세하여 '수필문장은 진실을 재현하는 것뿐이고, 그런 까닭에 그것은 인격의 표출로 귀결된다.'며 '문학과 예술만을 강조하여 허구를 도입하는 것은 수필의 본질을 망각한 것이며, 수필을 말장난으로 빠뜨리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또 허구론이 무성해 가는 것은 '수필에 문학이라는 말을 붙여야만 한다는 일종의 열등의식 같은 것이고, 문학이 아니라는 견해에 대한 피해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까지 허구론을 폄하하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허구론에 동조하는 이들이 늘어갔으며, 수용반대론의 선봉장이었던 김시헌도 '허구'와 '허구성'을 구분하여 '허구성'은 인정하는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2002년 '수필과 비평' 세미나에서 허구로 된 수필은 거짓말로 된 수필(독자 편에서 볼 때)이고, 허구성이 있는 수필은 주체험은 그대로이고 주제를 살리려는 목적에서 부분의 수정이 있는 수필로 구분한 김시헌은 '사실 그대로는 문학이 될 수 없으며, 허구성에 의해서 창작성이 확보될 수 있다'며 허구성 수용 이유로 들었습니다.

  청주고교 출신 김태길도 2003년 우리 충북수필 세미나에서 '최소한의 허구 인정론'을 편 바 있습니다. 또한 우리 회원이었던 목성균도 '뼈대가 바르면 조미료를 치듯 또 간을 맞추듯이 허구가 들어가도 된다.'면서 절창의 '세한도'를 놓고 어느 부분이 허구임을 털어 놓은 바 있습니다.

  이미 고인이 된 두 분(김태길 2009·목성균 2004)의 유지(遺志)를 새기며, 논지의 핵심을 인용해 봅니다.


  전통적으로 옛날의 수필에는 허구가 인정되지 않았으나 이제는 절대로 안 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곧 환상적인 것, 로맨스, 상대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면 최소한의 허구를 인정해야 합니다.

  기억은 굴절된 기억을 쓸 수밖에 없으므로 다소의 허구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허구는 최소화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 수필과 콩트, 소설이냐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서 장르간의 벽이 허물어지는 경향이 있으므로 장르를 심하게 구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김태길;충북수필 17호)


  나의 룰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거짓말(허구) 안하기입니다. 나의 이야기를 붓 가는 대로 쓰는 것이라면 당연히 솔직해야 하겠지요.

  그런데 나는 수필을 위한 약간의 거짓말을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약간의 거짓말이 어느 정도를 이르는 말이냐? 글쎄 그게 문제입니다. 그러나 나는 분명 그리 생각합니다. '솔직히'란 말은 '양심에 비춰서'라는 말이니까 양심에 가책을 안 느끼는 정도의 거짓말을 해도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입니다. 나를 위한 거짓말이 아니고 수필을 위한 거짓말은 해도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지요. (목성균;나의 수필)



• 유형과 기법에 대한 이유식의 시론(試論)


  이제 수필이 소설처럼은 아니더라도 일정부분 허구를 수용해야 한다는 쪽으로 대세는 기울어진 듯합니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수용하고, 어디까지를 한계로 잡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 기준은 정립되지 않았습니다.

  이유식은 그동안 수필계에서 허구의 유형으로 나와 있던 ①문장미학론 ②합금론 ③내밀론 ④한계론을 다음과 같이 6단계로 세분·수정하였습니다.('허구의 수용과 현대수필의 새로운 모색' <수필학> 11호)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당의정론 ; 쓴 가루약을 쓰지 않게 먹기 위해서 환을 만들어 당의를 입힌다.

② 금반지론 ; 100% 순금은 안 된다. 합금이 되어야 견고해지고 일정형태가 유지되며, 세공도 가능하다.

③ 감초론 ; 약효를 높이면서 쓴 맛을 없애주는 감초 역할

④ 화장술론 ; 얼굴을 더 예쁘게 보이기 위해서 화장을 함.

⑤ 부분성형수술론 ; 전체 성형수술이 아니라 눈이나 코를 좀 멋지게 보이기 위해서 성형한다.

⑥ 요리론 ; 생선찌개를 요리할 때 주재료만 가지고 요리하지 않는다. 간장, 고춧가루 같은 양념과 부재료가 들어가야 한다.


  이 논문에서 허구를 독자가 인지할 수 없는 '기법(작법)론적 허구'와 반쯤 인지할 수 있는 '수사적 허구'로 분류한 이유식은, 그 방법론의 체계화를 시도하였던 바, 이 탁견은 수필이론서에 그대로 인용되고 있음을 봅니다.(박양근의 <좋은수필창작론>)

  본인 또한 이 논리에 공감하면서, 이유식이 제시한 '허구의 종류와 그 기능' 부분을 그대로 인용, 요약해 보겠습니다.


(1) 작법론적 허구

  동일 시간대와 공간대에서 일어나지 않은 사건을 오버랩 시켜 사실과 완전히 융합된 허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런 허구를 도입하는 종류로서 구성적 동기 부여, 사건의 수정·보완, 상상적 허구, 반전(反轉)적 동기로 구분한다.

  ① 구성적 동기 부여

  작품 구성에 있어 시간의 간격을 초월하여 경험한 것을 조합한다. 예로 들면 순간순간 눈에 보이는 거리의 풍경을 그리려고 할 경우, 거리로 나선 동기가 설득력이 없으면 이전에 느꼈던 생각이나 경험을 사건 진행의 서두로 삼아 본문과 조합하는 기법이다.

  ② 사건의 수정·보완

  주제와 소재를 연결시킬 때 필요하다. 주제와 소재 간에 통일성을 기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나 사건을 축소하거나 확대할 경우가 있다. 그리고 사물의 의미를 발견하거나 주제를 형상화할 경우에도 논리의 적정성이 요구된다. 이러한 가감에서 정황, 배경, 사건에 대한 수정과 보완이 불가피해진다. 따라서 허구 기법을 도입하면 현장감과 생동감이 강화된다.

  ③ 상상적 허구

  수필 구성에서 작가의 추억, 화상, 연상, 공상이 끼어들 때를 말한다. '수필적 자아'가 품고 있는 느낌에 해당한다. 이런 저런 것을 상상하는 장면에서 찾을 수 있으며 현재나 과거와 달리 미래에 관한 공상에서는 허구가 끼어들 수 있다. 가령 과거의 일을 재생하는 과정에서 없었던 일을 "…듯싶다, 마냥 …처럼" 등의 어법으로 사실화한다면 이것은 '상상적 허구'가 될 것이다.

  ④ 반전적 허구

  결미에서 부딪치는 황당한 상황을 살려보기 위한 기법의 허구이다. 콩트에서 반전으로 사용하는 기법과 유사하며 호기심과 흥미를 유발하려는 의도적인 계산에서 일부러 삽입한 허구이다.


(2) 수사적 허구

  표현상의 과소화나 과장화를 말한다. 글을 쓰는 경우 수사적 표현이 나오기 마련이며, 이에 따른 가감도 따르게 된다. 유머수필, 풍자수필, 실수담 등에서 흔히 발견되는 경우로서 어조나 필치로 보면 어느 정도의 허구가 가미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망초꽃 핀 언덕>에 실린 몇 작품의 경우


  독자들이 수필을 읽는 첫 번째 이유는 즐거움을 얻는데 있을 것입니다. 즉 품격, 철학, 문학성 모두 중요하지만, 우선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읽어주고,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작품을 써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제가 재미있게 읽힐 수 있는 스토리수필(서사수필)에 천착하여, 유머(해학)수필까지도 넘보고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이런 창작경향이 작품 속에 허구 또는 허구적 요소가 들어갈 여지를 만든 것 같습니다.

  그동안 발표된 1백여 편의 작품 가운데 '현대수필 100인선간행위원회'의 요청에 따라 40편을 골라 수필선집 <망초꽃 핀 언덕>을 상재했습니다만, 그 중 7편에 독자가 전혀 인지할 수 없는 작법론적 허구기법이 쓰였습니다.

 제가 입을 다물고 있으면 아무도 모를 허구 부분을 솔직히 털어 놓고, 왜 그랬는가, 앞에 열거한 족보에 있는 방법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가) '내 마음속 붉은 악마'의 경우


  그 순간 이게 웬 일, 아들과 함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생면부지 아낙이 나를 와락 껴안고 괴성을 질러대며 팔팔 뛰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들어갔어요?”

  하는 어설픈 질문에

  “골인예요, 황선홍선수예요!” 했다.

  환호의 한 순간이 지나자 그녀는 언제 그랬냐 싶게 이내 모르는 사람으로 되돌아갔다. 나도 애써 옆쪽을 외면해 버렸다.

  후반에 추가 골이 터지자 붉은 악마들의 함성은 포효(咆哮)로 변해버렸다. 열광의 도가니였다. 옆의 여자가 또 나를 얼싸안고 방방 뛰었다. 이번에도 앞이 가려 슛 장면을 보지 못했던 나는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또 들어갔어요?”

  그녀는 더 높이 뛰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기종료 휘슬이 울리자 그녀는 다시 나를 끌어안았다.

  “끝났어요. 이겼어요.”

  또 한 차례의 격정이었다.


  제10회 충북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내 마음속 붉은 악마'(원제·붉은 악마)의 중간부분인데 여기서 '생면부지'로 표현한 그 아낙이 사실은 친구와 함께 온 안면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물론 포옹을 나눌 수 있는 사이는 아니었으나 사실 그대로 '아는 여인'이라 하지 않고 '생면부지'라 한 것은 월드컵 첫 승리의 감동을 현장에서 맛보았던 모든 사람들이 붉은 마음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그 사실을 극대화 시켜 소재의 의미화를 기해 보자는 뜻에서입니다.

  심사평자(김홍은)는  '사실이든 아니든 이 대목에서 독자들에게 묘한 뉘앙스를 던져줌으로써 웃음을 터트리게 하고 있다'고 하여 혹여 눈치를 챈 것이 아닌가도 싶었으나(방점 찍은 부분 참조) 그래도 앞에 열거한 이유식의 '독자가 전혀 인지할 수 없는 작법론적 허구' 중 '사건의 수정·보완' 유형에 넣고 싶습니다. 왜냐? 많은 분들이 사실인 것으로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또 '뱃심 두둑한 친구가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골든 벨을 울렸다'하는 대목도 그날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로얄호텔 로비에서 관전하던 미국과의 대전 때입니다만, 주체험과 부체험의 관점에서 시간을 옮겨와 주제의 형상화를 북돋고자 한 것입니다.

나) 해학수필 '벌침그라'의 경우

  <수필과 비평>에 발표했다가 유머(해학)수필이라 하여 <선수필> (2007 가을호)과 <좋은수필>(2009 봄호) 그리고 현대해학수필선(도서출판 운디네)까지 재 수록된 '벌침그라'는 제 작품 중 허구가 가장 짙게 들어간 때문인지 반응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대야산 계곡에 우리 몇 만 아는 아지트가 있고, 무덥던 여름날 삼계탕 준비를 했던 것이나 성냥이 없어 낭패를 당했던 얘기, 모두 체험한 사실입니다. 또 봉침소동이 일어난 것도, '집사람이 한 번 더 다녀오라'고 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다만 그날 하루에 있었던 사건은 아니었고 벌에 쏘인 사람도 후배가 아니라 등산 멤버입니다. '벌침그라' 결사부분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팬티차림으로 옆에서 코를 골던 후배가 슬그머니 일어나 숲속으로 사라졌다. 배에 손을 얹고 가는 폼이 배탈이 난 듯했다. 한참 만에 그는 끙끙대며 돌아왔다. 재수 없게도 땅벌집 위에다 일을 보다가 봉침(蜂針)세례를 맞았다는 것이다. 사타구니를 움켜쥐고 오만상을 찌푸리는 그의 거동에 폭소가 터질 뻔했지만 누룩 디디듯 꾹 참았다. 모든 것이 나로 인해 일어난 사단이었다. 후배는 내려오는 동안 뒤뚱뒤뚱 거위걸음을 흉내 냈다. 일행들이 웃음을 참느라 쿡쿡거렸다.

  이튿날, 아침부터 전화벨 소리가 요란했다. 어제 벌에 쏘였던 그였다.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무슨 일이야? 병이 났어?”

  다그쳐 묻는 말에는 대꾸도 않더니 생뚱맞은 부탁을 해 오는 것이 아닌가.

  “거기 오늘 또 가면 안 될까요? 집사람이 자고 나더니 벌침이 몸에 좋은가 보대요. 또 맞고 오라잖아요, 힛힛….”


  만일에 이 부분을 사실대로 '그날은 이런 일이 있었고 그 며칠 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고 별도의 화소로 삼았다면 글의 템포나 현장감, 생동감이 느슨해졌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제의 형상화를 북돋기 위해 사건을 재구성해 본 것입니다. 여기에는 언젠가 청주문협 문학기행의 차중에서 누군가가 던진 유머 한 자락도 참고가 되었음을 밝힙니다. '벌침그라'를 제목으로 삼으면서 고민을 좀 했으나 아마도 이 작품을 읽어주시는 분이면 그 저변의 의도를 헤아려주실 듯합니다. '구성적 동기부여'와 '사건의 수정·보완'이란 두 항목에 해당된다고 보겠습니다.


다) '산에서 만나던 노인'의 경우


  버릇처럼 고인의 영정 앞에 향을 사르고 묵도를 올리던 나는 소스라쳐 놀라버리고 말았다.

  ‘아니, 저 분은?’

  아하, 바로 그 영감이었다. 아침 등산길에서 10년 넘게 마주치던 노인, 그토록 소식을 몰라 애태우던 선지자 같던 그 '형님'의 초췌한 얼굴이 하이얀 국화꽃송이에 파묻혀 이승의 마지막 호사를 누리고 있었다.

  나는 노인의 아들인 동창생과 매우 의례적인 문상 절차를 밟고 바로 일어섰다. 아침 산에서 맺어진 '형님' 사연은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았다. 그냥 마음속에 묻어두고 싶었다. 부의금 봉투를 내밀면서 접수 보는 사람에게 장지(葬地)가 어디냐고 물어보았다.

  ‘내일 아침 7시 충주로 가서 화장(火葬)을 합니다. 납골당은 경기도…’

  말을 가로막았다. 더 듣고 싶지가 않았다. 노인에게 산 오르기 연습은 도로(徒勞)였음에랴. 영혼이 떠나가면 육신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산에서 만나던 노인' 끝부분)


  아침마다 등산길에 만나던 노인이 있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몸이 쇠잔해가며 목표지점이 정상에서 중간 봉우리로, 산 어귀로 내려만 가더니 언제부터인가 모습이 보이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백방으로 수소문해 보았으나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구러 두어 해가 지난 어느 날, 산에서 가끔 마주치던 친구로부터 노인의 소식을 접했습니다. 며칠 전에 장례를 치렀다는 것이고, 뜻밖에도 노인의 아들이 얼굴정도 알고 지내던 동년배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위 인용부분에 나와 있는 문상 갔던 이야기는 허구입니다. 친구로부터 이미 장례까지 치렀으며 '화장을 한 뒤 어느 납골당에 모셨다'는 한발 늦은 소식을 접하면서 '산 오르기 연습은 도로'였다는 그 느낌을  극대화, 의미화시켜보자는 뜻에서 상상력을 발동해 본 것입니다.

  '상상적 허구'로 분류해 보고자 합니다.


라) '망초꽃 핀 언덕'의 경우

  

 <충북수필>(제16호 2000)에 발표했다가 <수필과 비평>(2002 11/12월호)의 '나의 대표작' 코너에 다시 실린 '망초꽃 핀 언덕'은 '바람결에 띄우는 들꽃 사연', '강 건너 봄이 오듯'에 이은 첫사랑 연작수필 제3탄으로, 이번 수필선집의 제목으로 삼은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중앙공원 은행나무 그늘에 초로의 남녀가 서 있다'라고 쓴 첫 대목부터 거짓말입니다. 실제는 '종합운동장 정문 앞'이었고 <충북수필>에 발표할 때는 사실대로 썼던 것입니다.

  '종합운동장 정문 앞'이라 하고 보니 영 분위기가 나지 않아 '중앙공원'으로 장소를 바꿨습니다.(당시 문화원이 그 곳에 있어 선택의 여지가 있었음) 이 때문인지 첫 발표 때는 무반응이던 독자들이 한 마디 고쳐서 다시 나가자 전화가 좀 걸려왔습니다. 더구나 <수필과 비평> 그 다음호 월평에 '<인연>이 지니지 못 성숙한 인간미를 박영수에서 찾고 위안을 얻었다. 이제 한국 수필은 유년기의 사랑을 다루되 미성숙에서 벗어난 당당한 자화상을 그려내고 있다.'(박양근)고 호평을 받자, 전화벨이 더 많이 울렸습니다. 서두의 첫마디가 얼마나 민감한가를 알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첫사랑(짝사랑)을 소재로 하고 보니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상대방이 있어 허구는 고사하고 허튼 소리 한마디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초고를 써서 검열(?)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충북수필>(14집)에 실린 '강 건너 봄이 오듯'은 그녀에게 혼쭐이 난 작품입니다. 다음 대목을 보아 주십시오.


  "저… 숙이예요."

  꿈결인 양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홀연 40년의 세월을 뛰어 넘어 나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중략)

  "편지를 읽다가 눈물을 많이 흘려서 목이 가렸어요."

  목소리의 감이 잡히지 않았던 것은 세월 때문만이 아니었다.

  "둘째 장이 젖어버려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아요."


  우편물로 원고를 받아 본 그녀의 첫 전화는 '잘 썼네요.'였으나 다음날 전화는 영 딴판이었습니다. 바로 위에 소개한 부분 중 '둘째 장이 젖어버려 잘 보이지 않아요.'가 걸린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가 잘못됐다는 말은 안하고 그냥 '전화 통화도 하지 않았어야 했다'고 원망만 하는 거였습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아내가 '눈물에 젖어 글씨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남편이 본다면 부부싸움 나지 않겠느냐'고 눈을 흘기는 바람에 알아차리고 '그 부분을 빼겠다.'고 했더니 OK사인이 났습니다. 그러니까 사실대로 다 쓰지 못해서 거짓말을 한 셈이 될까요?

  다시 '망초꽃…'으로 돌아옵니다. 40년 만의 재상봉을 이루게 했던 단초가 망초꽃 그림인데 이 부분에 대한 묘사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밝히고자 합니다. 다음을 보아 주십시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옛날 함께 거닐던 ‘추억의 언덕’이 우리를 불러내고야 말았다. 그녀가 그린 추억의 편린이 철옹성의 빗장을 스스로 풀게 한 것이다.

  윤 사장으로부터 아내의 유화전시회가 열리고 있으니 슬쩍 가보라는 전화를 받고 찾아간 인사동의 한 미술관에 그녀는 보이지 않았지만 뜻밖에도 낯익은 그림 한 점이 나를 반겼다. 거기 추억이 서린 고향의 냇가 언덕 망초밭이 되살려져 있었다. 그녀와 나만이 알고 있는 언덕이었다. 나는 한참이나 그 작품과 마주하고 서서 있었다.

  청주에 오겠다는 전화가 걸려온 것은 그 사흘 뒤였다.

  남편이 그림 한 점 전해주려 간다기에 자기는 망초꽃 핀 언덕이나 보려고 동행한다는 것이었다. 고집을 접은 핑계가 그럴싸했다.


  문제의 그림은 농촌마을 풍경화로, 마을 어귀에 하이얀 꽃이 무수히 피어 있었으나 그 꽃이 망초꽃이 아닐 수도 있고 '그녀와 나만이 알고 있는 추억의 언덕'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검열이 무사히 통과되고 그림까지 선물 받게 된 것은 아마도 그녀가 문학의 허구성 내지는 상상력을 이해한 때문이 아니었던가 생각됩니다. '상상적 허구'로 분류될 듯합니다.


• 나오며


  수필이 부분적이든 제한적이든 허구를 수용함으로써 예술성을 확인하고 감동․진실의 창출을 기해야 한다는데 는 여러분들께서도 전폭 공감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이 허구를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휘두를 수도 없고, 모든 수필에 통용되는 것처럼 확대해석 해서도 안 될 일입니다. 또한 '어디까지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도 논란거리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수필작가마다 기준과 방법이 다를 수밖에 없고, 또 작가 개인에 게 맡겨야할 일입니다. 저는 오늘 한 때 우리 문학회 회원이었던 분(고 목성균)에게 육성으로 들었던 '뼈대가 바르면 조미료 치듯 또 간을 맞추는 정도의 허구는 들어가도 된다.'는 말과, 앞 인용문 중에서 '약간의 거짓말은 미덕'이고 '허구 수용 정도는 양심에 비춰서, 양심에 가책을 안 느끼는 정도의 거짓말'이라고 한정한 그 소박한 논리를 이 글의 '나오는 말'로 삼고 싶습니다.

  졸작 4편에 들어있는 허구부분을 고해성사하듯 털어 놓았으나 허구적 진실을 창조하여 문학성을 확보하는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저 서사적 콩트수필을 즐겨 쓰는 사람으로, 독자들에게 읽힐 수 있는 재미있는 수필창작을 위해 안간힘을 썼다는 정도로 아시고 참고삼아 주셨으면 합니다.

  지난 수필의 날(7월15일) 상경 길에 터미널 대형서점에 들려 '국내수필'코너에서 한참을 머물렀습니다. 청주에서처럼 그 곳에서도 눈길을 끄는 산문집 대부분이 인기 높은 시인․소설가 아니면 사회명사들의 책이었고 전문 수필가들의 것은 가뭄에 콩나기였습니다. 그나마 한 구석에서 차은량의 <꽃멀미>를 발견하고 다소 위안을 받았다고 할까요.

  한국 수필계의 현주소를 들여다 본 것 같은 씁쓸함은 오후에 열린 제9회 '수필의 날' 행사장까지 이어졌습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지원하던 창작집출판보조금이 지난해부터 끊겼으므로 부당한 차별화를 규탄하는 탄원서에 서명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시, 소설, 희곡 등 그 많은 문학의 장르 중 유독 수필만이 제외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부당한 처사는 즉각 시정되어야 하고, 이를 위한 우리 모두의 단합된 노력이 긴요합니다만, 근본적으로는 수필문학의 문학성, 그리고 위상 제고를 위한 자구노력이 더욱 절실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중앙문단이니, 지방문단이니 하는 구분은 의미가 없습니다. 문인이면 누구나 한국문단의 일원이고, 서울이 그 중심일 수도 없습니다.

  이미 잘 알고 계시는 문제를 가지고 장광설을 늘어놓은 듯합니다. 수필의 시대, 상상과 허구가 수필창작 활성화를 기할 수 있는 바람직한 기법의 하나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면서 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약하면 수필문학의 예술성 확보를 위해서 허구를  제한적으로 수용해야 하며 수용의 제한은 작가에 따라 다를 것이며 이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수용의 방법을 작가와 작품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사례를 들어 설명하였다.

 

 경청하는 회원들

 

 

다음에는 지정토론자인 조영의 회원의 지정 토론 시간이다. 나는 조영의 회원을 2004년 한국문예진흥원에서 지원하는 문예진흥기금을 받은 분이라고 소개하였다. 지정토론에 대하여도 많이 신경이 쓰였다. 물론 주제 발표자 만큼 내용에 깊이 들어가지는 않겠지만 주제 발표자에게 대하여 동의를 하든 반론을 제기하든 그 근거는 확실히 제시해야 한다. 그냥 질문만 하고 만다면 교사가 수업을 하고 학생이 질문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는가? 조영의 회원은 내가 생각대로 그렇게 약간의 근거를 제시하면서 허구 수용에 대한 공감을 표하면서 질문을 하였다. 시간이 많이 갔지만 토론은 매우 진지하게 전개 되었다. 지정토론자로서 상당히 깊이 있게 연구해 온 흔적이 보였다. 이에 대한 질의와 응답이 계속되었다. 7시에 시작한 심포지엄이 이때 8시 가 되었다. 1시간이 걸린 것이다. 나는 그만큼 진지하고 깊이 있게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때 나는 주제 발표할 때 사례를 드는 것 정도는 생략하도록 할 수도 있었는데 하지 않은 것을 조금 후회했다. 그러나 그대로 진행했다.

 

<조영의 회원 토론 내용>

                    수필을 쓰는 작가의 자세


 문학 사가들은 21세기를 수필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시는 시인만을 위한 시가 많고, 소설은 분량이 많아 읽기 어렵다는 이유입니다. 최근에 발표되는 시중에는 이야기 중심적인 시가 많고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도 ‘수필의 형식을 빌려 쓴 글이다.’ 라고 하는 평론가도 있습니다.

평소 존경하는 박영수 선생님의 논제의 글을 먼저 읽게 된 것에 대해 감사드리고 많은 부분 공감하면서 읽었습니다. 때로는 일침으로, 또 사회 풍자와 위트가 있는 글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한 저는 수필 선집 『망초꽃 피는 언덕』의 ‘망초꽃 피는 언덕’ 글을 읽으면서 신선한 바람을 타고 오르는 감미로움을 느꼈습니다.

제가 마치 첫사랑을 만난 듯 따뜻했고 첫사랑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제가 첫사랑을 만나고 나서 글을 쓴다고 해도 선생님 같은 글을 쓰지 못할 것입니다. 제 글은 서사수필보다는 설리적(設理的)이거나 예화를 들어 쓰는 글이 많습니다.


조영의의 글이 좋은 이유는 문체가 간결하다는 점이다……또한 시인의 감수성으로 충만해 있다. 잘 쓴 산문시를 읽는 느낌이 든다(도종환 『뒤로 걷는 여자』발문)


 글의 군더더기가 없는 반면 스토리가 없다보니 뭔가 답답하고 미진하며 드라이(Dry)하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건조하다는 말 대신 간결하다, 담백하다 라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제 글은 허구성 보다 편견이나 좁은 식견으로 예화를 들기도 하고 저만의 글속으로 빠져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주제를 통하여 많이 배웠고 글을 쓸 때 탁마의 자세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 박영수 선생님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오늘의 주제인 ‘수필문학의 허구 유형과 수용의 한계’에서 제 견해는 ‘허구’를 ‘사실 같은’ 것으로 하고 싶습니다. 또 시점을 변화시키기 위한 상상력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지만 ‘마술’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마술은 기술의 속임수라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마술이 끝나고 나면 속았다 라고 하지 않습니다. 재미있고 흥미 있고 감탄하며 또 보고 싶어 합니다. 기술을 배우고려고도 합니다. “마술은 관객들이 마술사를 째려보게 만들어 순수하게 빠져들고 동화되어 매혹되는 일이다” 마술사 이은결의 말입니다.

수필도 마찬가지입니다. 허구로써 속이는 것이 아니라 허구로써 작품의 흥미와 가미(加味)를 더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단 동화되고 감동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작가의 자세입니다.

박영수 선생님의 논제와, 논제 속에 인용된 이유식 선생님의 ‘작법론적 허구’에 동의하면서 몇 가지 궁금한 점을 여쭈어 볼까 합니다.

하나는 독자가 객관적으로 아는 사실은 허구로 쓸 수가 없어도 모르는 사실은 작자의 사유에 의한 상상력으로 임의로 꾸며도 된다(내밀론)에 동의하면서 선생님 글을 ‘양심에 가책을 느끼는 정도의 거짓말’이라고 하셨는데 앞으로도 계속 약간의 가미를 위한 글을 쓰실 건지요?

또 하나는 ‘문장미학론’에서 제기되는 논거로, 독자에게 호기심을 유발하기 위하여 「그녀를 만나러 간다.」를 ‘그녀’ 대신 ‘그’를 쓸 경우의 허구와, 솔직하게 써서 파문을 일으킨다면 어떤 쪽이 더 바람직한지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다음의 글은 수필집에서 읽은 글입니다. 요약하면 「나는 중학교 선생님이다. 현장학습을 가려고 학생들에게 8시까지 오라고 했다. 모두 왔는데 3명이 늦었다. 출발 무렵 2명이 뛰어온다. 한명은 오지 않았지만 그 애는 평소 말썽을 피우고 지각을 반복하는 학생이다. 버스는 약속시간에 출발하여 교문을 빠져서 나가는 순간 지각생이 뛰어온다. 그러나 태우지 않고 그대로 버스는 출발한다.」 서두의 글입니다. 글은 이후 떼어놓고 온 학생에 대한 미안함과 교육자로서의 사명감, 자신을 돌아보는 번민으로 하루가 지나고 학생과 극적인 화해로 마무리 됩니다. 그런데도 서두를 인용한 것은, 수필은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글이다’(윤모촌)와 ‘수필문학이 허구성을 과감히 도입해야 한다.(정진권)의 견해로 볼 때 위의 작품은 사뭇 차이가 있습니다.

위의 글은 작가를 모독하기 위함이나 사적인 감정이 있음은 절대 아니고 수필을 쓰면서 늘 한계에 부딪쳤던 고민의 글이었기에 인용했음을 말씀드립니다.

또한 수필 원형자체가 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허구와 관련된 논의는 해결이 안 된다고 봅니다. 단 시대에 맞게 변해가야 하고 원형의 범주 내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만이 21세기 수필의 시대로 지향하는 작가의 자세라고 봅니다.

끝으로 보르헤스(1899~1986. 아르헨티나 출신의 시인․소설가)의 글로써 고견을 여쭙겠습니다.


 '더 이상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 현재의 이야기는 과거 이야기의 또 다른 판본일 뿐, 이제 문학의 문제는 새로운 이야기의 창출이 아니라 기존 문학의 재편성과 재해석일 뿐, 옛 이야기를 다시 쓰기로 하였다.'


보르헤스의 이 말이 픽션의 종언을 선언한 것으로 받아들다면 21세기는 분명 수필의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요약하면 허구 수용에 대한 동의이다. 허구를 마술에 비하여 설명하면서 허구로써 속이는 것이 아니라 허구로써 가미하는 것이라고 적절하게 표현하였다. 그리고 허구 수용에 관한 몇 가지 방법과 한계에 대하여   질의가 있었다. 인격과 허구에 대한 질문도 하였다.

 

다음에는 지정토론자인 임형묵 회원의 토론과 질의가 있었다. 임형묵회원은 이론에 밝고 성실하며 꾸준히 글을 쓰는 수필가라고 소개했다. 이 때 배가 고픈 회원 한 분이 불만을 토로했다. 이의를 제기하는 내용은 토론이냐 질의냐 하는 것이다. 왜 질의자가 토론을 하느냐는 것이다. 그 분은 지정토론을 질의로 착각한 모양이다.  나는 밥보다는 수필이 중요하므로 발표를 계속하도록 했다.  임형묵 회원도 끝까지 발표하고 박영수 회원께서도 꺼리낌없이 답변에 응했다.

 

< 임형묵 회원 토론 내용>

 

  수필을 공부하고 배우는 계기

 

 이번 기회를 통해 삶의 문학인 수필을 깊이 있게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수필 문학이 걸어온 길과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가장 시급한 것은 수필문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누구나, 아무거나, 맘대로’가 아닌, 수필 이론의 재정립입니다. 수필은 아무나 쓸 수 있는 글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수필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져야 합니다. 작가건 독자건 수필문학의 경시 풍조가 만연돼 있다는 점입니다. 21세기는 분명 수필의 시대이고, 수필이 미래의 문학입니다. 



   수필은 진실의 문학으로 진솔성을 강조한다.


 수필은 작가 자신이 보고 느낀 사실이나 생각, 사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한다. 자기 고백의 문학이며 독백의 문학이다. 정목일 선생은 수필에 대해 ‘자신의 삶을 거울에 비춰 보는 일’이라 했다. 진실의 문학임을 피해갈 수 없다.


   ① 체험(사실)

   ② 체험(사실) + 허구

   ③ 허구


 소설은 위 세 가지 중 어느 것을 택하더라도 상관하지 않는다. 그만큼 영역이 넓다. 시(詩)는 가급적 ①과 ②의 범위 안에서 작품을 이끌어나간다. 그에 비해 수필은 ①이 전부라 할 정도로 자유롭지 못하다.


  수필은 체험(사실) 기록의 문학이라 재미가 덜하다

 

 젊거나 늙거나, 잘 살고 못 살고를 떠나 하루 밥 세끼 먹는 게 인생이다. 삶도 그러한데 글도 있는 사실 그대로 기록하면 도진개진이다. 그래서 소설과 시는 작가가 경험한 체험과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지 않고 정형화된 틀을 벗어나려는 시도를 한다. 감동과 재미를 위해 상상력을 동원하고 허구를 끌어들인다. 그런 시도가 글에서 조미료 역할을 하고 때로는 청량제처럼 신선함을 준다. 그럼에도 수필문학은 있는 그대로의 체험, 경험의 기록과 느낌을 강조한다. 수필문학의 특성이기도 하다.

  

   상상과 허구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삶의 기록이 기억이지만, 누구나 기억력에 한계가 있다. 시간이 흐르면 웬만한 것은 잊힌다. 그럴 때 상상력이 힘을 발휘한다. 기억을 재생해 낸다. 상상은 메마른 대지위에 내리는 비처럼 삶을 윤택하게 하고 태깔을 빛나게 한다. 상상력의 사전적 의미는 실제로 경험하지 않은 현상이나 사물에 대하여 마음속으로 그려 보는 힘이라 했다. 그렇듯 상상은 인간이 생각하는 모든 작용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도 간혹 상상과 허구를 같은 개념으로 해석하는 우(愚)를 범한다. 넓게 해석하면 상상이나 허구의 차이가 모호하지만 별개로 구분하여야 한다고 본다. 허구는 상상의 일부일 뿐 전부는 아니다.


   허구 도입의 유혹

 

 o 감동과 재미를 자아내려고 억지로 허구를 끌어들인다. 

 o 작가의 경험 부족, 소재의 빈곤, 깊이가 없는 사색에서 온다.

    - 곰국은 오래 우려내야 맛이 있다

 o 시간에 좇기는 원고청탁과 빈번한 작품 발표

 o 작가의 우월주의와 조급성도 문제


   허구 도입의 논쟁


정진권 - 허구 도입에 적극적. 수필문학에서 허구성을 거부해야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과감하게 도입해야 한다는 입장. 사실 기록의 통념을 부정, 수필영역 확대

김태길, 목성균, 이유식, 박영수 - 최소한의 허구는 인정

          . 약간의 거짓말은 미덕(美德)

          . 뼈대가 바르면 조미료 치듯 또 간을 맞추는 정도의 허구는 들어가도 된다.

이유식 - 독자가 인지할 수 없는 ‘기법(작법)론적 허구’와 반쯤 인지할 수 있는 ‘수사 적 허구’로 분류

조동일 - 수필은 실제로 있는 사실을 전달하며, 전달을 위해 허구나 비유를 사용할 수 있는 일이다.

김시헌 - 허구 도입에 반기. 허구를 도입할 경우에는 어떤 방법으로도 암시해야 한다.

         . 허구는 전혀 없었던 사건을 새로 만들어 내는 일 

         . 나중에 주 체험은 그대로 두되 주제를 살리기 위해 부분 수정은 가능하다며 수용 쪽으로 돌아선다.

윤모춘 - 허구 수용 반대론 입장. 허구를 도입하면 수필의 본질을 망각하는 것.

         . 수필을 말장난으로 빠뜨리게 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

권대근 - 허구 수용은 신중해야 한다.

         ① 주제의 효과적 전달을 위해 소재나 화제의 일부분

         ② 예술적 구성상 어쩔 수 없는 재료의 부분적 삽입이나 보충

         ③ 개인적으로 유추되는 인과관계나 어떤 일에 부차적으로 따르는 상식

         ④ 필자가 경험한 내용 중의 일부

김우종 - 수필 장르에 대한 분명한 개념 정립 없는 상태에서 문학성을 높이기 위한 의욕만 앞서 타 장르의 기법을 모방(갈 곳 없는 수필 장르)


   수필문학에 대한 예의

  

 1977년 문학과지성사에 발표한 이문구 소설 『관촌수필』은 6.25전쟁 때 풍비박산된 가족사를 그린 소설이다. 하지만 작가 이문구는 이 소설이 상상력으로 짜인 허구가 아닌 실화에 토대를 둔 이야기들이라 소설 제목에 <수필>이란 이름을 올렸다.


   허구 도입의 문제점과 우려

 

 o 허구가 지나치면 수필 고유의 본질과 속성을 무시하게 되어 수필 장르가 흔들린다.

  - 허구를 토대로 글을 쓸 수 있는 문학의 장르는 수필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많다.

 o 독자 대부분이 ‘수필은 자기 체험의 문학’이라고 알고 있는데, 허구라면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까?

   - 허구라고 밝혀지면 감동은 사라진다.

   - 허구를 도입한 수필가 자신이 막상 타인의 작품을 심사할 때 허구성이 드러나면 당선작에 올리겠는가?


   생각

     - 하얀 거짓말, 빨간 거짓말

 

 살다보면 바른 말만 하고 옳은 생각만 할 수 없다. 못해도 잘한다 하고, 못 생겨도 근사하다고 해야 상대방은 좋아한다. 사실 그렇게 살아야 세상이 편하다. 곧이곧대로 하는 사람들을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니, 재미가 없다느니 하며 부정적인 온갖 수식어를 갖다 붙인다. 상대방을 즐겁게 하는 ‘하얀 거짓말’은 어느 면에서는 필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본의 아니게 들켜 ‘빨간 거짓말’이라고 탄로 나면 ‘양치기 소년’이 된다.


   - 허구를 ‘양념’으로 삼거나 ‘밥’으로 만들든 작가의 양심에 직결된다고 본다.

 

 수필문학에서의 허구는 예술성과 극적 감동을 위해, 그것도 꼭 필요한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도입해야 한다지만 소설처럼 자유롭다면 수필로 보기 어렵다. 수필을 쓰는 입장에서는 허구도입에 신중해야 한다. 허구는 소설의 바탕이지 수필의 출발은 아니다. 지나친 도입은 내가 쓴 글이 남의 글이 되고 만다.  



<네이버 국어사전>

 → 상상력 : 실제로 경험하지 않은 현상이나 사물에 대하여 마음속으로 그려 보는 힘

 → 창조력 :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힘이나 능력. 생각

 → 생  각 : 1. 사람이 머리를 써서 사물을 헤아리고 판단하는 작용.

             2. 어떤 사람이나 일 따위에 대한 기억.

 → 허  구 : 1. 사실에 없는 일을 사실처럼 꾸며 만듦

             2. <문학>소설이나 희곡 따위에서, 실제로는 없는 사건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창조해 냄. 또는 그런 이야기.

 → 거짓말 :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꾸며 대어 말을 함. 또는 그런 말


임형묵회원은 허구 수용에 대하여 매우 회의적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매우 조심성있게 해야된다는 것이다. 지나치면 수필문학의 정체성이 흐트러질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곧 허구는 소설의 바탕이지 수필의 출발이 아니라는 것이다

 

심포지엄은 어렵게 어렵게 끝이 났다. 종전의 심포지엄과 다른 것은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회의가 아니라 토론과 이견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충북수필의 발전된 모습이라고 본다.

 

나도 할말은 많다. 그러나 사회를 맡았기에 내 말을 해서는 안된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렇다. 오늘날 모든 문학 양식들이 자신의 독자성을 잃고 수필로 수렴되고 있다. 이 시대의 대중은 감동을 주면서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선호하고 있다. 그러한 독자들에게 읽히는 문학은 바로 수필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소설은 이미 자기고백의 수필 형식을 얻어가고 있고, 시는 행과 연을 이어 놓으면 그냥 수필이 된다. 짧고 재미 있으면서도 진한 감동을 원하는 독자에게 수필만큼 적절한 양식은 없다.  우리는 끊임없는 습작과 연수를 통하여 소설의 바탕인 허구를 빌리지 않고도 수필이 아니면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수필만이 이루어낼 수 있는 이야기감를 찾아내야 한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감을 낱낱이 파헤쳐 감동을 줄 수 있도록 사생결단을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수필문학의 중흥기에 수필의 정체성을 지켜낼 수 있는 첩경이다. 물론 허구를 전혀 배제할 수 없는 추세라면, 수필에서 차용할 수 있는 허구를 소설이나 시에서 바탕으로 삼는 허구와 전혀 다른 개념으로 제한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매우 뜻깊은 심포지움이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이렇게 깊이 있는 심포지엄은 근래에 드문 일이었다고 생각했다. 수필문학에 대하여 내가 평소 가졌던 생각을 더욱 확고하게 굳혀 주었다. 세상은 아는 사람 만이 볼 수 있다. 금덩이도 금인 줄 알아야 가치가 있으며, 진실도 진실인 줄 알아야 가치가 있다고 본다. 문인에게는 글이 보이고 기업인에게는 돈이 보인다. 개에게는 도둑이 눈에 뜨이고 돼지에게는 먹이가 가치있게 보인다. 문인의 눈에 보여야 할 것은 뻔하다. 격조높은 언어로 형상화하는 삶의 진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

 

 심포지엄을 마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