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 13일
충북수필문학회 문학기행을 떠나는 날이다. 목적지는 김삿갓 계곡 문학 기념관인데 주변에 있는 조선민화박물관과 영월의 단종대왕 유적지인 장릉과 청령포를 들러 오기로 했다.
김삿갓 문학관은 김삿갓이 방랑 생활을 떠나기 전에 살았던 은거지인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노루목에 있다. 이곳에 난고 김병연의 묘소와 생가가 있기 때문에 영월군에서 여기를 관광지로 개발한 것이다. 김병연은 누구나 다 아는 것처럼 평생 방랑생활을 하다가 전라도 화순에서 죽어 인근에 매장한 것을 아들 김익균이 이곳에 옮겨 모신 것이다. 전설처럼 전해오던 김삿갓 묘소에서 지석이 발견된 것은 한 20년 전쯤이다.
1. 김삿갓 계곡
이곳은 내가 지금부터 36년전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받아 4년간 근무한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 인근에 있다. 김병연 묘소의 바로 앞 계수가 충북과 강원의 경계이다. 의풍리는 우리 충북에서는 가장 벽지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은 그렇지도 않다. 지금은 영춘에서 베틀재를 넘어 들어가는 길이 모두 포장되어 자연을 찾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 승용차로 단양에서 40분이면 족하다. 나도 1년에 서너 번씩은 잊지 않고 찾아간다. 옛날에는 걸어서 3,40리는 가야 차를 만날 수 있었다.
의풍리 남쪽으로는 경북 영풍군 단산면 마락리와 경계를 이루고, 동쪽으로는 같은 군의 부석면 남대리와 경계를 이루며 북쪽으로는 김삿갓 문학관이 있는 강원도 와석리와 경계를 이루는 3도 접경지대이다. 지도를 보면 충북의 제일 북동쪽으로 꼭지점이 있는데 여기가 바로 거기이다. 영춘면 소재지를 간다 하더라도 베틀재라는 큰 고개를 넘어야 같은 면 동대리를 통하여 영춘에 도착할 수 있다. 마락리 쪽은 백두대간 고치령을 넘어야 평지가 나온다. 동쪽으로도 백두대간 마구령을 넘어야 부석사가 있는 부석면과 통한다.
걸어서 가면 베틀재는 우리 지방이지만 남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 만큼이나 멀고 멀다. 영춘면 소재지에서 향교를 지나 한국전쟁 의풍 전투에서 전사한 13용사의 무덤이 있는 밤재를 넘어서 시오리는 가야 동대리를 만나고 동대리에서 걸어서 20리를 올라서면 고개 정상이다. 여기서 걸어서 10리를 내려가면 의풍 마을이 나온다.
충북 단양군 영춘면 상리 동대재 중턱에는 6.25 전쟁 당시 자유수호를 위해 인민군과 맞서 싸우다 산화한 13명의 경찰관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순국 13용사 묘역이 있다.
<의풍 전투와 13용사>
영춘면 의풍, 동대, 남천리 일대는 6.25 당시 퇴각하던 인민군과 경찰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갔던 인민군은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UN군의 인천 상륙작전 성공으로 주력부대의 보급로와 퇴로가 차단되자 태백준령인 영춘으로 숨어들어 마을에서 식량과 가축을 빼앗는 등 주민들에게 큰 피해를 줘 진압에 나섰던 경찰과 빈번하게 교전을 벌였다.
당시 국군의 주력부대는 9.28 서울 수복과 함께 북상, 인민군 패잔병들로부터 지역을 지키는 일은 경찰과 지역주민들의 몫으로 남았다.
이에 따라 단양 지역 경찰과 청년단원들이 경찰부대를 조직, 1년여 동안 인민군에 맞서 싸웠으며 이 가운데 1951년 6월과 11월 등에 걸쳐 김치운(당시 30세).김병호(당시 24세) 경사와 박노현(당시 33세) 순경 등 모두 13명의 경찰관이 목숨을 잃었다.
전쟁이 끝난 뒤 이들의 무덤은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었으나 1985년 단양경찰서가 선배들의 호국정신을 기리고 영령을 위로하기 위해 교전이 가장 치열했던 동대재(밤재) 중턱에 유해를 안장하고 매년 현충일 추모행사를 열고 있다. <네이버>
고치령은 마락리에서 단산으로 통하는 고개인데 고개 정상에 단종의 모시는 산신각이 있다. 사람들은 여기에 하필이면 단종 산신각이 있는가 의문을 갖기도 한다. 이것은 금성대군이 영주 지방 순흥으로 귀양와서 단종 복위를 꾀하다 안동으로 옮겨 결국 죽음을 당하였다. 금성대군이 복위 운동을 할 때 순흥 부근의 선비를 비롯한 민관군이 금성대군을 일심으로 도왔다. 그때 금성대군의 전령들이 순흥에서 단산면 소재지를 거쳐 고치령을 넘어 마락리를 지나 의풍 고치동으로, 노루목으로, 옥동으로, 맛밭으로, 지금의 고씨굴 앞을 지나, 영월 청령포로 폐위된 단종을 만나러 다녔다고 한다. 그 길이 바로 이 고치령인 것이다. 이렇게 순흥지방의 백성과 관리가 모두 금성대군을 믿어 복위를 꿈꾼 사건이 바로 정축지변이다. 한 때 이 지방이 초토화되었다가 나중에 회복되었다고 한다. 이때 단종은 태백산의 산신령이 되고 한 많은 금성대군은 소백산의 산신령이 되었다고 이 지방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래서 두 분이 만나는 장소인 양백지간(태백산맥과 소백산맥) 고치령에 백성들이 산신각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고치령에서 발원하여 마락리에서부터 청령포까지 흐르는 물은 그냥 물이 아니라 단종과 금성대군의 눈물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고치령에 있는 산신각(2008. 8. 23. 백두대간 산행 때 이효정 선생님이 찍은 사진)
젊은 시절 나는 이 고개를 그런 사연을 모르고 넘어다녔다. 한때는 장마가 져서 계곡물이 순식간에 사람을 삼켜버릴 수도 있는 위험이 있는데도 출장을 다녀왔다. 철부지일 때 계수가 얼마나 무서운지 몰랐다. 지난해 여름 백두대간 고치령을 출발점으로 삼았다기에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이효정 선생님과 친구 연철흠 선생과 함께 여기서 출발하여 도래기재까지 걷기도 하였다. 그리고 금성대군의 전령은 아니지만, 다시 이 고치령으로 와서 이효정 선생님의 차를 타고 영월 청령포까지 달려보기도 하였다. 전령들이 걸어간 고난의 길을 차를 타고 달린 것이다.
마구령은 남대리에서 부석면 소재지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아마 이 고개로도 전령들이 넘어 다녔으리라고 생각된다. 의풍학교에 근무할 때 학구인 용담, 솔개실을 거쳐 남대초등학교 앞을 지나 이 고개를 넘어 부석사를 간 적도 있다. 이 마구령도 지난 여름 백두대간을 걸을 때 여기서 쉬면서 억수로 퍼붓는 비를 맞으며 물이 뚝뚝 떨어지는 샌드위치를 먹던 곳이다.
마구령에서 바라보면 삼도봉이 보인다. 이곳이 바로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 부석면 남대리, 영월군 하동면 내리가 한 꼭지점에서 만난다. 삼도봉에 오르면 내리 쪽으로 비스듬한 평원이 있다. 이곳에 화전민들이 약초를 재배하면서 살고 있었다. 지금도 살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 당시에 참으로 착한 분들이 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젊은 총각 선생 셋이서 하도 배가 고파 의풍학교 교사라는 것을 밝히고 점심값을 주겠다고 하자 닭을 잡아 점심을 내오던 것을 잊을 수가 없다. 내리에서 산 줄기를 타고 계속 내려가다가 어느 계곡에 들어섰는데 거기에 하동초등학교 와석분교장이 있었던게 기억 속에 아련하다.
2. 김삿갓 문학관과 나
김삿갓 문학관이 있는 노루목은 당시에는 의풍초등학교 학구였다. 학교가 있는 강원도 옥동까지 길이 험하기 때문에 3km정도 되는 의풍으로 학교에 다녔다. 그러나 경상도 어린이들은 자기 마을의 학교를 다녔다. 강원도 아이들이 전교에 한 2,30명은 되었다. 당시에 의풍학교는 전교생이 한 260명 쯤 되었으니까 지금으로는 굉장히 큰 학교이다. 그래서 그 골짜기의 교육 선진학교였다.
김삿갓 문학관이 있는 노루목은 옛날에 잘 삶아놓은 감자처럼 인심 좋은 학부모들이 옥수수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다. 옥수수를 삶아 놓았다고 전갈이 오면 가야 했고, 꺽지를 잡아 매운탕을 끓여 놓았다고 해도 가야 했다. 1년에 두 번 가는 소풍 중에 한 번은 반드시 노루목으로 가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이곳 학부형들이 강원도라 무시한다고 바로 학교로 쳐들어 왔다. 우리는 염치없이 수시로 드나들며 얻어 먹었다. 그 때 우리반 이명희라는 어린이의 아버지인 이상운씨의 집이 있던 곳은 지금 김삿갓 묘역을 넓히느라고 헐리고 집터마저 메꾸어졌다. 그 집 바로 뒤 옥수수 밭에 있는 무덤이 김삿갓 무덤이라고 그 때 이미 주민들은 어른들의 전해오는 이야기를 전했다. 그 때 학부모 중에 김성규씨는 우리반의 김종칠 아버지였는데 그는 김삿갓 생가가 있는 마대산 중턱 빼어난 절경의 계곡에 살았다. 그 때 그 분의 특이한 어조인 '강냉이 잡수러 오세요"하는 강요에 못이겨 의풍에서 장건지를 거쳐 10리도 넘는 어둔이 고개를 넘어 1050m 마대산 중턱 그의 삶의 터전까지 찾아 올라간 일이 있다. 그 때 먹은 찰강냉이와 계곡에 흘러내리는 자연수를 마시던 일과 디딜방아로 찧은 새까만 보리밥에 어린 열무를 간장에 버무린 겉절이를 넣어 비벼 먹던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스물 두셋 젊은 나이에 겪은 그런 색다른 경험들이 오늘의 나를 욕먹지 않는 선생으로 만들어 주었을지 모른다. 나는 맑은 공기와 맑은 물을 마시고 거칠지만 세속의 때묻지 않은 음식을 먹고 살아온 그분들의 삶의 진실을 이해한다.
그 분은 지금 김삿갓 문학관 앞에서 노루목상회식당이라는 간판을 걸고 상업을 하고 있다. 지금도 가면 "다리가 통통한 놈으로 고르느라 온 닭장을 다 헤맸네요" 하면서 닭볶음을 내온다. 오늘도 만났다. 70이 넘었어도 내 자식을 넷이나 가르쳐 주었다면서 90도로 허리를 굽힌다. 오늘도 찾아 갔더니 '이방주 교장선생님 오셨네'하고 반긴다. 내가 아직 교장이 아니라고 하면 교장될 때를 기다리다가 먼저 죽을 것 같다면서 "인품이 교장 못지 않으니 이제부터 그냥 교장이라고 부르겠다고 한다." 나는 교장이란 말이 별로 맘에 들지 않았으나 형님 같은 분의 소망이니 그냥 두었다.
김삿갓 생가는 김성규씨 댁 바로 등넘어 골짜기에 있었다. 그 때 한문 서당에서 훈장 노릇을 하다가 어린 제자와 정분이 난 한 훈장이 옥수수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그 정분의 딸이 우리 반에 있었다. 훈장님의 후손답게 머리도 좋고 공부도 잘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학교를 보내지 않았다. 나는 학교에 나올 것을 권하기 위해 아마도 한 열 번은 그 집을 방문했을 것이다. 훈장님은 갈 때마다 "지지바가 공부는 해서 뭐합니까? 제 이름자나 쓰고 거스름돈이나 받을 줄 알면 됏제."하면서 답답한 이야기를 했고, 그의 첩실인 젊은 제자는 마른 대추를 한 되박 퍼주며 뒤로 돌아섰다. 나는 어린 그 제자가 딱해 그냥 내려왔다. 그 집이 지금 김삿갓 생가이다. 처자식을 버려두고 방랑생활을 하던 감삿갓의 옛집에 또 처자식을 버리고 젊은 제자를 아내로 새로 얻어 자식을 낳고 사는 70년대의 훈장이 살아온 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삶에 개념 없었던 그 훈장님도 여기서 물소리 바람소리를 들으며 한시를 읊기도 했을 것이다.
의풍학교 이야기를 하려면 한이 없으니 바로 문학기행 이야기를 해야겠다. 아니 이미 한 이야기가 지루하니 문학기행 이야기까지는 간단히 하겠다.
3. 출발
우리는 청주기계공고 앞에 모여 버스로 출발하기로 했다. 7시 50분까지 모이라기에 아내더러 이야기 했더니 출발 장소까지 태워다 주었다. 출발지에는 유인종 사무국장님이 이미 나오셔서 짐을 버스로 옮기고 계셨다. 나는 연세 많고 점잖으신 그 분이 그런 일을 하시는게 공연히 내일을 미룬 것 같아 죄스럽다. 얼른 맥주 한 박스를 옮기며 책임을 면하려 했다. 정상옥 수필가, 남소현 수필가도 총무일을 맡아 준비하느라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 안내를 맡은 송부일 선생님도 부산하게 움직이고 계셨다. 차에 오르니 김정자 선생님이 먼저 와 계셨다. 선생님은 내 자리와 박순철 부회장님, 임형묵수필가 등 몇 분의 자리까지 이미 마련해 놓으셨다. 이어 회원들이 몰려 온다. 오늘은 시민과 함께하는 문학 기행이라 어린이들이 많이 참석했다. 박순철 부회장님이 오시기에 그 분과 함께 앉았다. 출발에 앞서 마음이 편안하다.
그런데 어떤 대학 교수가 인사를 왔다. 편안하고 행복하게 다녀오라고 인사를 한다. 고마웠다. 교육계에 큰일 할 분이라고 소개를 했지만 그 분에게 맡길 수 있는 교육계에 큰일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고등학교 국어 선생으로 오려나? 내 자리를 뺏기는 거 아닌가? 우리나라 교수들도 교수로서 본분을 다하면서 대학교육에 전념했으면 좋겠다. 중등교육을 맡은 우리도 할 일은 할 만큼 하는데 왜 대학에 있는 분들이 보통교육에 대해 걱정을 하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오히려 그 동네가 더 걱정인데 말이다. 우리가 가르쳐서 수능 시험까지 다 치러서 점수표까지 들려 보내도 제대로 아이들을 뽑지 못하는 데가 우리나라 대학이다. 그런데 그 분들이 보통교육을 걱정한다. 보통교육을 사랑하며 여기에 36년간 몸담아 온 나는 이것이 못마땅하다.
유인종 사무국장님의 사회로 부회장님들의 인사와 회원들의 자기 소개가 이어졌다. 차는 내덕동, 율량동을 거쳐 청주 여고 앞으로, 라마다 호텔앞으로 19번 국도로 들어 섰다. 이류에서 좌회전하여 충주 산단 공사장을 거쳐 고구려비 옆을 지나 조정지댐 부근의 중앙탑 휴게소에서 잠시 화장을 고쳤다. 물이 줄어 전처럼 아름답지는 못하다.
제천을 지나 영월이 가까워오자 기사님이 길을 잘못 들어선 건지 아니면 시간이 남아 일부러 그런 건지 우리가 다니던 길이 아니었다. 궁금했지만 분위기를 생각해서 그냥 있었다. 기사는 아주 차분하고 편안하게 운전했다. 영월에서 시내 중심가를 거쳐 동강다리를 지나 맛밭을 지나 하동의 계곡으로 들어서자 회원들은 탄성을 올리기 시작했다. 마치 스위스의 어느 산촌 마을을 들어선 것 같은 절경을 그냥 지날 수 없었을 것이다. 회원들 모두가 자연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삶을 생각하고 작품을 구상하였으리라. 송부일 선생님의 그 해박하고 줄줄이 나오는 해설이 처음 오는 분들이나 김삿갓에 대해 전혀 지식이 없는 사람에게는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다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혹 있었을 것이다. 또 김삿갓의 생애를 모르는 문인이 누가 있을까?
충주 중앙탑 휴게소
4. 김삿갓 문학관
<김병연>[金炳淵, 1807~1863]
조선 후기 시인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심(性深), 호 난고(蘭皐)이다. 속칭 김삿갓 혹은 김립(金笠)이라고도 부른다. 아버지는 김안근(金安根)이며 경기도 양주에서 출생하였다.
1811년(순조 11) 홍경래의 난 때 선천부사(宣川府使)로 있던 조부 김익순(金益淳)이 홍경래에게 항복하였기 때문에 연좌제의 의해 집안이 망하였다. 당시 6세였던 그는 하인 김성수(金聖洙)의 구원을 받아 형 병하(炳河)와 함께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피신하여 숨어 지냈다. 후에 사면을 받고 과거에 응시하여 김익순의 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답을 적어 급제하였다.
그러나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벼슬을 버리고 20세 무렵부터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스스로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생각하고 항상 큰 삿갓을 쓰고 다녀 김삿갓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전국을 방랑하면서 각지에 즉흥시를 남겼는데 그 시 중에는 권력자와 부자를 풍자하고 조롱한 것이 많아 민중시인으로도 불린다.
아들 익균(翼均)이 여러 차례 귀가를 권유했으나 계속 방랑하다가 전라도 동복(同福:전남 화순)에서 객사하였다. 유해는 영월군 태백산 기슭에 있으며, 1978년 그의 후손들이 광주 무등산에 시비를 세우고, 1987년에는 영월에 시비가 세워졌다. 작품으로 《김립시집(金笠詩集)》이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
하동면 소재지는 정말로 절경 중의 절경이다. 태백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과 푸른 산이 어울린 데다가 하천이 정비되고 농경지가 정비되어 마치 외국의 부유한 농촌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하동면 소재지에서 모퉁이를 돌아 계속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면서 달리면 김삿갓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남대천을 만나게 된다. 나도 다닐 때마다 운전을 하느라고 주변을 잘 돌아 보지 못했는데 오늘은 눈이 호강을 한다. 이 좁은 계곡은 표현할 수 없이 맑고 깨끗하다. 바위와 물과 소나무가 어우러진 절경이 궁금한 사람들은 한 번 가보는게 편하다. 어떻게 인간의 언어로 자연을 다 말할 수 있으랴.
11시 쯤해서 드디어 김삿갓 계곡에 회원들이 내렸다. 휴일을 맞아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다. 나는 여러번 왔지만 혹시 사진 촬영이 있을 것 같아 회원들을 따라 올라 갔다. 그리고 사진을 찍은 적도 없고, 여행기를 적은 적이 없어 다시 한 번 올라 갔다.
여길 오면 나는 난고 김병연의 묘소 바로 밑에 있던 이상운씨 집에서 소주 마시던 생각을 먼저 한다. 꺽지를 잡아서 말려 두었다가 튀기면 아주 훌륭한 소주 안주이다. 여름에는 꺽지, 모래무지 등으로 끓인 매운탕으로, 겨울에는 꺽지 튀김으로 안주를 삼아 밤새워 김삿갓 얘기를 하며 그의 시를 읊으며 술을 마시면 산골의 늦게 떠오르는 해가 계곡을 밝혔다. 부인이 끓여주는 해장국으로 속을 달래고 그의 딸인 명희 손을 잡고 십리 길을 걸어 함께 출근한 적도 있다. 나는 그 분이 김삿갓처럼 보였다. 머리도 좋고 아는 것도 많은데 왜 그런 산골에 와 살았는지 모른다. 혹시 김병연과 같은 사연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 분도 죽을 나이도 아닐 때 세상을 버렸다고 한다. 살았으면 김성규씨와 연세도 비슷하고 똑같이 호인이라 비슷해서 함께 소주를 마셔도 충분할 텐데 말이다.
의풍을 떠난지 6년만에 나는 고등학교 선생이 되어 단양여고, 단양고교에 근무하게 되었다. 그후 한 87년 쯤으로 기억되는데 퇴계와 사랑을 나누다 자결한 기생 두향이의 묘소를 말목산 아래 강선대에서 찾아 제를 지내 주고 재미를 붙인 나는 당시 단양고 선생들 중에 한량이라는 이들을 부추겨 김병연 묘소에 제를 지내기로 했다. 나는 축을 쓰고 친구인 여석 우세종 선생이 준비를 했다. 그리고 후배들이 잘 따라 주어서 충청일보 기자를 꼬드겨 그 차를 타고 거의 10년만에 여길 다시 찾아왔다. 그 때도 이상운씨 집은 그대로 있었다. 이상운씨 마당에서 옥수수를 수확하던 김성규씨가 나를 알아보고 '이방주 왔다. 이방주가 돌아왔네. 야, 이방주가 정말로 왔네."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함께간 친구 우세종선생이 '너는 의풍의 역사적 인물여. 우리가 이율곡, 이퇴계하는 것처럼'하고 우스겟소리를 해서 한참을 웃었다.
그 때는 옥수밭이었던 묘소가 정비되고 '蘭皐 金炳淵之墓' 라는 비목이 하나 쓸쓸히 서 있었다. 제를 지낸 것이 10월 3일이다. 그 이듬해부터 영월군 문화원에서 삿갓제를 준비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김삿갓을 단양에게 뺏길 뻔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삿갓묘 바로 앞 개울이 충청북도와 경계이니까 말이다. 단양 두향제는 단양 청년들이 그 이듬해부터 계속 5월 5일날 지내다가 문화원에 인수해서 지금까지 계속되고 삿갓제는 영월군에서 지금까지 지낸다고 한다. 내가 만약에 학계에 저명 인사가 되어 있다면 지금 그 일에 대하여 취재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그 때 함께 간 이들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그래도 모두가 술이나 좋아하는 한량들이었기에 지금은 거사가 되어 있고 그것으로 만족해 하고 있다.
김병연이 김삿갓이 되고 그의 묘가 여기에 있게 된 사연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굳이 설명하는 일 자체가 진부한 일이다. 또 그의 작품과 시비의 시를 감상하는 것도 우습다. 거기 가서보면 감싯갓 시집을 판다. 한권 사서 보면 생애와 작품과 작품 해설까지 나온다. 10,000원이면 될 것이다. 다만 그 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김병연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이었다. 그런 역사에 태어나서 그런 부도덕한 사회를 원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식들을 다 부인에게 맡겨 놓고 방랑생활을 한 것은 무책임하고 비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낭만적으로 생각하고, 여기 찾아온 여인들도 모두 멋진 남성으로 생각하겠지만 자신의 남편이 그렇게 했다고 하면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뛰어난 문학적 감성을 가진 사람이고 학문에 대한 깊이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남겨 사람들에게 읽히는 작품은 대부분 언어유희다. 풍자와 해학이 있고 당시의 지배계층이나 부유한 사람들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한시도 아니고 국문시도 아니다. 그는 충분히 한시든 국문시든 쓸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술을 마시고 그렇게 해학적이고 완곡한 표현으로 사람들을 놀리고 세상을 희롱한 것이다. 그냥 편하게 읽을 수 있는 멋진 한 편의 시이다. 그러나 멋은 예술의 필요 조건은 될 수 있어도 그것만으로 문학의 충분 조건을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긴 이제 한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그 해학적인 시의 숨겨진 의미를 파헤쳐 고도의 상징성이 있는 시라고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그렇게 후세 사람이 자기 기준으로 높에 평가하기로 말하면 좋은 작품 아닌 글이 어디 있겠는가?
문학관 관람을 하고 회원들이 정원을 돌아보는 동안 나는 김성규씨를 찾아갔다. 부인과 딸 영애가 반갑게 맞아 준다. 영애도 남편이 곧 군청의 과장이 된다고 자랑을 했다. 인사만 드리고 바로 돌아오려니가 커피라도 마셔야 한다고 한다. 요즘 약을 먹고 있는데 약을 먹는 동안 커피가 해롭다지만 내게는 그 약보다 더 달았다.
김삿갓 문학관은 비교적 많은 자료를 수집하여 준비해 놓아서 볼거리가 많았다. 기획전시실, 영상실, 난고 문학실, 일대기실, 자료실을 마련해 놓고 작품과 일대기를 보기좋게 정리해 놓았다. 조각품도 있었다.
김삿갓 문학관 주차장의 영월 관광 안내도
마대산 등산로(김삿간 묘소 앞)
김삿갓 묘로 올라가는 회원들(살마들이 있는 곳은 충북, 냇물 건너 오른 쪽은 강원도)
묘소 앞의 시비
시비
두상
묘소 앞의 회원들
묘소 앞에서 충북수필 문학회 회원들
김삿갓 문학관
문학 세미나
문학관 앞의 시비
주차장에 있는 예쁜 화장실
문학관옆의 맑은 시냇물(남대천)가물어서 물이 많이 줄었다.
5. 조선민화박물관
문학관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고 12시 30분 쯤해서 오던 길을 되짚어 조선민화박물관으로 출발하였다. 조선민화박물관은 문학관에서 다시 영월 쪽으로 조금만 내려오면 길옆에 이정표가 나온다. 이곳을 지나다니면서도 들러보지 않았는데 경치도 좋고 여러가지 짜임새 있게 꾸며 놓아서 볼거리가 많았다. 우선 박물관으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이나 출렁다리도 재미 있고 마당에 가꾸고 있는 소나무 분재도 일품이었다. 관람료를 3000원이나 받는 것이 좀 불만이었지만 들어가서 꼼꼼이 살펴 본다면 비싸다는 생각은 사라질 것이다.
전시실이 몇 개로 구분되어 조선시대 민화 뿐 아니라, 현대 민화, 고가구, 문인화, 문자도, 춘화도까지 다양하게 먀련되 있고, 일반인이 참여하는 민화 체험도 실시하는 것 같았다. 전문해설사가 재미있게 해주는 설명도 들을 만하다. 사진은 찍지 않았다. 이름이 박물관이니까. 어변성룡도와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까치호랑이 그림, 구운몽도가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춘화도는 형식과 크기가 똑 같았다. 그러나 재미는 있었다. 춘화도는 일본의 그림도 있고 병풍 형식으로 꾸민 것도 있고 족자도 있었다. 그림이 적나라해서 잠깐 보기는 재미있지만 곧 싫증이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천편일율적이고 어떤 상징적인 의미도 발견할 수 없었다. 신윤복이나 김홍도의 춘화도 같이 해학성도 없다. 적나라하게 보여주지 않고 암시로도얼마든지 사람들은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 춘화도는 그런 것이 멋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적나라한 그림은 일본에서 들어온 것이다. 신윤복이 세상을 떠난 후에 일화풍의 춘화를 혜원의 화풍으로 그려서 팔아먹은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그림에는 단원과 혜원의 화풍이 혼합된 것도 있다고 하니 춘화가 어지간히 상업성이 있었던 모양이다. 어떤 여자 분은 춘화도를 계속 촬영하고 있었다. 뭣에 쓰려나?
조선민화박물관
박물관으로 올라가는 회원들
출렁다리를 건너서
계단을 올라
회원들
민화 박물관 입장하는 회원들
소나무 분재
반숭례, 박순철, 이은희 수필가
임형묵, 유인종, 김영한 수필가
누구실까?
민화박물관 앞 계류와 아름다운 풍광
6. 장릉
민화박물관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고 서둘러 버스를 타고 예전에 금성대군의 전령이 청령포로 단종을 만나러 가던 길을 따라 영월로 다시 나와 장릉에 도착하여 늦은 점심을 먹었다. 우리가 점심을 먹은 곳은 장릉 정문 앞에 있는 전망좋은 집이었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보니 장릉 기사 식당이었다. 곤드레 비빔밥을 먹었는데 곤드레 나물과 묵나물, 도라지, 표고, 나물취, 계란 프라이를 넣은 비빔 대접에 밥을 넣고 덧상으로 나온 콩나물, 무생채, 열무김치를 넣고 집된장찌개를 잔뜩 집어 넣고 비볐다. 들어간 것도 별로 없는데 맛을 꿀맛이다. 거기에다가 매콤한 지고추 한 입에 모든 스트레스가 싹 가시는 기분이다. 이은희 수필가가 묵은 김치 안쪽을 주면서 싸서 먹어보라고 권하기에 먹어 봤더니 예전에 한겨울에 찬밥을 화로에 올려 놓고 무청김치를 밑에 깔고 참기름을 듬뿍 쳐 비볐을 때의 맛이 난다. 내가 기막히다고 했더니 반숭례 수필가님이 또 한 쪽을 주었다.
이어 동동주가 들어와서 술을 마시지 않으려고 했는데 김정자 선생님이 한 잔을 권하기에 마셨다. 젖빛 술에 찹쌀밥 알갱이가 동동 뜨는 동동주다. 달콤하고 싸늘한 맛이 오장을 씻어내리는 기분이다. 더 마시고 싶었지만 건강을 생각해서 꾹 참았다. 우리 회원들의 친절과 호의로 하루가 풍성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비빔밥의 재료로 나물 한 가지가 맛이 신비롭고 부드러워서 주방에 가서 일하시는 분들에게 물어봐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냥 묵나물이라고만 하는데 그건 묵나물이 아니다. 묵나물이란 산에서 나는 나물을 섞어 말렸다가 나중에 다시 물에 불리거나 삶아 무쳐 먹는 것을 말하는데 이건 금방 뜯어다 슬쩍 데친 것이다. 처음 보는 맛이다. 야속했다.
점심먹은 전망좋은 집
곤드레 비빔밥
단종 기념관앞을 지나는 회원들
장릉은 언제 가도 마음이 아프다. 그 소박한 능침도 마음을 아프게 하고, 관리를 문화재청에서 하는지 영월군에서 하는지 소홀한 관리가 마음 아프고, 단종의 일생이 마음 아프다. 여기는 정자각도 다른 능침보다 규모가 작고, 신도도 좁고, 가깝고 능침도 작고, 석물도 소박하다. 게다가 산줄기를 따라서 능침 바로 앞까지 길을 내고 포장을 해 놓았다. 사람들은 단종을 임금으로 공경하지 않는다. 그냥 비운의 왕으로 애닯은 마음만 가지고 있다. 그래서 신도도 밟고 제절에도 올라선다. 정자각에도 올라서서 신주모시는 곳까지 들어간다. 뭇사람이 짓밟는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단종에 대한 모든이의 사랑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도 동구릉이나 다른 능침보다도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어린 나이 외롭게 살아온 그 분의 넋이 많이 위로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단종대왕도 아내를 무척 사랑했다는데 범부로 태어났더라면 아내(여산송씨인 정순왕후)와 사랑을 나누며 얼마나 행복하게 살았을까?
입구에는 낙촌비각이 있다. 단종의 무덤을 찾아낸 영월군수 박충원을 기리기 위한 비각이 있다. 그리고 단종을 위해 몸바친 268인의 위패를 모신 장판옥도 색다르고 능제향에 올리는 물을 뜨던 영천도 색다르다. 정려각은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여 몰래 장례를 지내준 영월호장 엄홍도의 충절을 기리는 문이다. 단종릉제향은 전주리씨 장릉봉향회가 지내는 10월 3일의 제향과 영월군민이 단오 때 지내는 제향이 있어 제향도 두 번이다.
단종역사관에는 단종의 시대, 단종의 승하, 단종의 복권 등 단종의 생애와 아울러 능제향이나 민간 신앙 등의 지식을 얻을 수 있다. 또 사육신과 생육신의 행적도 정리해 놓았다.
장릉은 능침의 전면이나 후면의 소나무가 일품이다. 여기에 이렇게 소나무가 잘 자란 것은 어떤 연유일까? 단종을 향한 당시 선비들의 일편단심이 아닐까? 아니면 그의 애석한 죽음을 바라보는 세종대왕이나 문종대왕 넋일까? 아니면 어머니인 현덕왕후의 안쓰러움일까? 회원들은 신도를 따라 정자각까지 올라 간다. 사실 신도는 제향 때 대왕의 위패를 모시고 가는 길이다. 위패를 모시고 가는 대축관만이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아무리 마음을 달래려고 해도 그런 우리 일행의 모습이 참으로 섭섭했다.
단종(1441-1457)
이름 홍위(弘暐). 문종(文宗)의 아들. 어머니는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 비(妃)는 돈령부판사(敦寧府判事) 송현수(宋玹壽)의 딸인 정순왕후(定順王后).
1448년(세종 30) 왕세손(王世孫)에 책봉되고,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세자(世子)에 책봉되었다. 1452년 문종의 뒤를 이어 왕위(王位)에 올랐는데, 그 전에 문종은 자신이 병약하고 세자가 나이 어린 것을 염려하여 황보 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에게 세자가 즉위하여 왕이 되었을 때의 보필을 부탁하였다.
한편 집현전(集賢殿)의 학사인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 등에게도 좌우협찬(左右協贊)을 부탁하는 유언을 내렸다. 그런데 1453년 그를 보필하던 황보 인 ·김종서 등이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에 의해 제거당하자 수양대군이 군국(軍國)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였으며, 단종은 단지 이름뿐인 왕이 되었다.
1455년 단종을 보필하는 중신(重臣)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던 한명회(韓明澮) ·권람(權擥) 등이 강요하여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었다. 1456년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응부(兪應孚) ·유성원(柳誠源) 등이 단종의 복위(復位)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모두 처형된 후 1457년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강원도 영월(寧越)에 유배되었다.
그런데 수양대군의 동생이며 노산군의 숙부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다시 경상도의 순흥(順興)에서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사사(賜死)되자 노산군에서 다시 강등이 되어 서인(庶人)이 되었으며, 끈질기게 자살을 강요당하여 1457년(세조 3) 10월 24일에 영월에서 죽었다.
단종복위운동을 하다가 죽음을 당한 성삼문 등의 6명을 사육신(死六臣)이라 하고, 수양대군의 왕위찬탈(王位簒奪)을 분개하여 한평생을 죄인으로 자처(自處)한 김시습(金時習) 등 6명을 생육신(生六臣)이라 한다. 단종의 억울한 죽음과 강봉(降封)은 200여 년 후인 1681년(숙종 7) 신원(伸寃)되어서 대군(大君)에 추봉(追封)되었으며, 1698년(숙종 24) 임금으로 복위되어 묘호(廟號)를 단종이라 하였다. 능은 단종이 목숨을 끊은 강원도 영월의 장릉(莊陵)이다.
장릉 공신당, 정자각이 보인다
영천
능침으로 오르는 계단
능침으로 가는 소나무 숲길
장릉(문인석만 있고 무인석이 없다. 너무 소박해서 슬프다)
장릉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청령포로 향했다. 장릉에는 세 번째 와 본다. 의풍에 근무할 때 의풍에서부터 맛밭까지 60리 길을 걸어 나와서 맛밭에서 버스를 타고 영월 단종제를 구경한 적이 있다. 줄다리기, 단종 제향 등 각종 놀이를 구경하고 갈 곳이 없어 여관에 들었는데 한 방에서 일곱 명이 포개 잔 일도 있다. 그리고 다시 60리를 걸어 의풍으로 돌아 갔다. 그런 영월이다.
몇 해 전 나는 헌종 성황제의 능침인 경릉 제향에 초헌관으로 봉행한 적이 있다. 후손이 없어 제향을 봉행하지 못하던 경릉은 아버지께서 경릉봉향회를 조직하셔서 제향을 올리게 되었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다는 빌미로 초헌관을 맡게 된 것이다. 초헌관으로 봉행에 참여했지만 능제향에서 심부름이나 하던 몸이라 절차를 몰라 허둥대었다. 그러나 경건한 마음으로 참여하면 예법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터득하였다.
7. 청령포
청령포는 예전에는 그냥 고추밭 가에 사공이 나룻배로 건너 주었는데 지금은 통통선 두 대가 연신 사람을 태워 날라도 기다려야 했다. 우리 일행은 도선을 기다리기 겸해서 왕방연 시비 앞에서 슬픈 전설을 간직한 청령포를 바라보았다. 생각하기에 따라 이렇게 수려한 경관을 만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왕방연 시조비에서 바라보면 청령포 경관이 한 눈에 보인다. 멀리서 바라보니 삐쭉삐쭉 솟은 육륙봉과 그 앞에 반달처럼 반원을 그린 청령포 수림지의 소나무가 일품이었다. 그리고 그 앞을 굽이 돌아 흐르는 강을 보면 한스러운 단종의 운명이 남의 일 같아 보이지 않았다.
왕방연 시조비는 그냥 대충 보아도 몇 글자 오자가 있었다. 시대를 넘어서서 표기가 바뀌었다 하더라도 같은 한 작품에는 같은 시대의 표기법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단어는 15세기 표기이고 저 단어는 16세기 표기를 쓴다면 어떻게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겠는가? 왕방연의 시비이니 왕방연이 살았던 15세기 표기법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되었다.
시간이 없어서 청령포는 멀리서 바라본 것으로 만족하고 청주로 떠난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다. 일행이 모두 주차장 쪽으로 가기에 따라오다가 '욕심을 버리는 곳'이라는 의미 있는 이름을 붙인 화장실에 다녀 왔더니 아무도 없다. 버스에 가보아도 아무도 없다. 이은희 수필가와 함께 다시 나루터에 가 보았더니 회원들이 거기에서 배를 타려고 줄을 서고 있었다. 뒤에 붙어 배를 탔다. 배는 금방 청령포 모래장에 우리는 부렸다. 맨 나중에 타니 내리는 것은 제일 앞이다.
소나무 숲으로 들어서니 바로 단종 어소가 있다. 단종 어소는 단종이 유배 당시에 머물던 집으로 기와집이었다. 이것은 복원한 건물이다. 30년 전에 왔을 때는 볼 수 없었던 집이다. 방안에는 밀랍으로 만들어진 인형이 있었다. 단종대왕 앞에 엎드린 밀랍 인형은 키가 엄청나게 키가 크다. 아마도 순흥에서 온 전령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궁녀들이 기거하던 행랑채는 초가집이다.
단종어소에는 단종대왕 작품인 어제시 편액이 걸려 있었다. 소년시대에 나라의 어려운 일을 맡았다가 적소에 내려온 어린 단종의 서정이 절절하다. 번역이 너무 직설적으로 되어 있어서 전달이 잘 안되었지만 한시를 그대로 읽으면 그 절절한 슬픔과 어린 왕의 외로움이 눈을 뜨고 읽을 수가 없다. 특히 '끝이 보이지 않는 원한'이나, '한가닥 외로운 혼' '우거진 소나무' '소리쳐 울어 예는 남한강' 세상의 맹수들이 두려워 '그리움의 사립을 닫는' 마음은 읽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아마도 그가 두려워 했던 맹수는 호랑이나 표범만이 아닐 것이다. 소년이라도 일국의 왕을 지낸 사람이 소나무 숲과 호표를 두려워하겠는가? 또 그가 닫은 것은 사립만이 아니라 조정에 대한 세상에 대한 마음의 문도 굳게 닫았을 것이다.
御製詩
千秋無限寃 천추의 원한을 가슴 깊이 품은 채
寂寧荒山裏 적막한 영월 땅 황량한 산 속에서
萬古一孤魂 만고의 외로운 혼이 홀로 헤매는데
蒼松繞舊園 푸른 솔은 옛 동산에 우거졌구나
嶺樹三天老 고개 위의 소나무는 삼계에 늙었고
溟流得石喧 냇물은 돌에 부딪쳐 소란도 하다
山深多虎豹 산이 깊어 맹수도 득실거리니
來夕掩柴門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노라. <어제시 편액을 촬영하여 채록>
우리는 역사를 그냥 역사로 치부하고 만다. 그러나 역사는 바로 내가 걸어갈 방향을 일러주는 지남차이다. 무심히 단종의 유적을 돌아보는 사람은 없겠지만, 과거로 치부하고 그저 유적지 한 바퀴를 돌았다는 생각으로 심상하게 넘어갈 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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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령포
멀리서 바라보이는 청령포
왕방연 시비
유인종 사무국장님
욕심을 버리는 집
청령포를 설명하는 김영한 수필가님
청령포어소 행랑채
단종이 귀양 와서 사셨던 어소
단종대왕의 어제시
관음송
금표비
금표비 전면
에세이 뜨락
망향탑
임형묵 선생님과 함께
8. 문학기행을 마치며
4시 40분쯤 청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7시까지는 충분히 대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사무국장님은 전한다. 기사는 돌아오는 길은 아주 쉽게 찾아 제천을 거쳐 충주를 옆에 두고 청주까지 2시간만에 달렸다. 청주에 도착하여 송부일 수필가가 경영하는 소영 식당에서 닭볶음으로 저녁 식사를 하고 충북수필문학회의 단결을 외치며 오늘 행사을 멋있게 마무리 한다. 오늘을 준비한 부회장님, 사무국장님, 두분 총무님에게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안내를 맡으셨던 송부일 수필가의 자상함에도 박수를 보낸다. 다만 회장님이 병환중이라 참석하시지 못한 것이 애석하고 쾌유를 빌 뿐이다.
2009.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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