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생활과 일상/삶과 문학

지금 황산벌에는 -한국수필작가회 문학기행-

느림보 이방주 2008. 5. 25. 08:53

2008년 5월 24일

 

  한국수필작가회 문학기행 가는 날이다. 한국수필작가회는  월간 <한국수필>지의 추천을 받아 등단한 사람들의 전국 모임이다. 청주 회원은 전부 6명이다. 박영자 수필가, 김종선 수필가, 김정자 수필가, 그리고 나, 최근에 전성희 수필가와 이효순 수필가가 추천되었다. 우리는 그냥 작가회라고 한다. 나는 몇 년 전부터 이 모임이 이사가 되었다. 이사라 해도 하는 일은 별로 없다. 이사회에 참석해서 중요 사항을 결정해야 하지만, 대부분 평일날 회의가 더구나 서울에서 열리기 때문에 참석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일 년에 한 번이라도 이 모임에 참석하면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는 저명한 수필가들을 만난다. 최근에 조경희씨가 돌아가시고 나자 서정범 교수님까지 발걸음이 뜸해졌다.

 

  오늘 문학 기행은 논산을 중심으로 한 백제 문화의 탐방이다. 주요 탐방지는 쌍계사, 개태사, 관촉사, 백제군사박물관, 윤증 고택이다. 이중에 윤증 고택은 조선시대 유학에 심취한 선비 문화를 들여다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고속도로 청주 나들목에서 기다렸다. 서울 회원들을 태운 버스가 나들목으로 나와서  우리를 태우고 가기로 되어 있었다. 김정자 선생님 바깥선생님께서 연로하신데도 우리를 거기까지 태워다 주셨다. 민망하고 어려워서 뒷자석에서 말없이 앉아 있었다. 박영자 선생님께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 주어서 대행이다. 나는 이 문학기행에 대개 참석할 수가 없었다. 대부분 토요일날로 정해져서 근무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다행히 휴무일이라 참석하게 되었다. 내가 참석하니 전원 참석하게 되었다고 청주 회원들이 좋아했다.

 

 경부고속도로 청주 나들목

  9시 20분에 정확하게 하나관광버스가 나들목으로 들어왔다. 우리를 태우기 위해 나들목 바로 앞에 정차했다. 회원들 모두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나는 일년에 한두번 정도 참석했을 뿐인데도 다들 알아보고 반가워했다. 만남은 드뭇하지만  홈페이지 (http://www.essay.or.kr/)에서  작품으로 만나기 때문에 이름만 대면 서로를 금방 기억하고 알아볼 수 있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밖에서 한 번 빙 돌아 다시 경부고속도로로 들어가 석곡을 거쳐 남이면 석실리를 지나 대전으로 달렸다. 

  대전 고속버스 정류장에서 대전 회원과 부산, 광주, 창원, 진주 등지에서 올라오는 회원을 태우니 차안이 가득했다. 서로 반가운 인사 나누기에 여념이 없다. 바로 유성을 거쳐 논산으로 달렸다.

 

  처음 도착지는 불명산 쌍계사이다. 쌍계사는 고려 때 이행재라는 사람의 발원으로 세워졌다고 한다. 절을 둘러싸고 양쪽 골짜기에서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사찰 입구에 스님들의 부도를 모셨고, 양쪽에 느티나무 숲이다. 초파일을 지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인지 연등이 아직도 걸려 있다.  창립 당시 이 절의 사세는 대단했던 것을 주변 여건으로 알 수 있었다. 우선 마을 이름이 논산시 가야곡면 중산리라고 한다. 중산리를 한자로 中山이라고 쓰겠지만 우리말 그대로 하면 중이 사는 마을이란 뜻이다. 그러니 골짜기 전체가 스님들이 사는 마을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선조 2년에 간행된  월인석보 판목을 이곳에서 판각하여 인출하였다고 하니 불교 문화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했을 것으로 짐작할 만하다.

   논산 쌍계사 입구를 올라가는 회원들 (마지막 하얀 모자 쓴 분이 문형동 수필가)

 

  쌍계사 봉황문

 

  느티나무 숲이 끝나자 바로 쌍계사 정문인 봉황문이 보였다. 봉황문 앞에서 바라보니 문루 아래로 대웅전의 모습이 깎임없이 보인다.  성곽처럼 쌓아 올린 담장 위에 누각을 세우고 법고를 걸었는데 범종도 목어도 없다. 더구나 사천왕상도 보이지 않는다. 사천왕이 보이지 않아 이상하게 생각되었으나, 그 대신 봉황루 창방에서 눈을 부릎뜬 귀면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무시무시한 귀신의 얼굴은 대웅전을 향하고 있었다. 이 귀면은 우리나라 기와의 수막새에 새기거나, 민가의 대문에 새겨 벽사를 기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절집에 이렇나 귀면이 새겨진 것은 아주 특이한 예이다. 절에서 귀신을 보는 기분이다. 연세가 지긋한 노보살 한 분이 해설에 나섰다. 그 분의 말로는 귀면을 새겨 놓은 것은 이 쌍계사 터가 도깨비들이 살던 터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다 믿을 건 못된다. 아마도 사천왕상 대신 벽사의 의미로 새겨 놓은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자세히 음미하면서 바라보니 그냥 무섭기만 한 것이 아니라,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은 모습이다. 칭얼대는 아이에게 "이놈"하고 거짓 화를 내면서, 아이가 이쁘고 귀여워서 터져 나오는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는 것 같은 아주 인간적인 모습이다. 이와 같이 한국의 불교 미술은 매우 인간적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봉황루 창방에 새겨진 귀면(도깨비)

 

 보물 408호인 대웅전은 여느 절집과 많이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대개의 절집은 기둥이 배흘림 기둥인데 쌍계사 대웅전은 자연의 나무를 그냥 잘라서 모양 그대로 세운 아주 자연스런 모습이다. 그리고 문창살의 아름다운 꽃무늬는 어느 절집에서도 보지 못한 모습이다. 꽃무늬는 무궁화, 모란, 황연, 매화, 작약, 국화 등 6 가지 창살이다. 거기에다가 공(空) 사상을 의미하는 원창살, 육간원창살로 그 아름다움을 더해 주고 있다. 단청도 아름다웠지만 처마의 공포는 더욱 아름다웠다. 가만히 서서 그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노라니 부처님의 세상인 극락정토가 이렇게 아름다울 것인가 하고 새삼 실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쌍계사 절집의 기둥나무,

안경 쓴 이는 청주여고 백합동인 출신의 김경실 수필가(사진 :박영자수필가) 

  대웅전 문을 열고 조용히 들어 갔다. 대웅전은 바로 극락정토인 것이다. 왼쪽으로부터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약사여래불을 모셨다. 그런데 부처님의 머리 위로는 각각 보궁형의 닫집이 있었다.  닫집의 처마 끝에는 '칠보궁', '적멸궁', '만월궁'이라 쓰인 편액이 걸려 있다.  적멸궁은 적멸 위락에 든 석가모니불의 궁전이며, 칠보궁은 아미타불이 계시는 서방극락정토를 의미하고, 만월궁은 약사여래가 주재하는 동방정유리국의 궁전을 가리킨다. 이들 편액은 닫집이 불국정토를 상징하는 장식물임을 알려준다. 닫집이라고 하는 것은 '따로집'을 의미한다.  따로 집을 더 두었다는 뜻일 것이다. 닫집의 네 귀에는 극락조가 날아다니는 환상적인 모습이었다. 대웅전에서 사진을 찍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사진은 찍지 않았다. 그 환상적인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하는 것이 한이다. 마치 극락조를 따라 훨훨 나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대개 대웅전은 서방정토를 의미하기 때문에 부처님이 동면을 하게 되어 있는데 이 절은 북면을 하고 있는 점도 특히하다.  쌍계사는 여러가지 면에서 여느 절집과 다른 새로운 문화를 접하게 되어 감명 깊었다. 일행이 있어 오래 머물지 못하였는데 다시 한 번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대웅전 앞에서 기념 촬영 준비(큰 가방 멘 분이 사진 작가이기도 한 김의배 수필가)

 청주 회원들(최원현 작가회 회장, 김종선, 전성희, 김정자, 박영자, 이효순수필가) 

 

 빗모란꽃살문

 빗무궁화 황연꽃살문

 솟은 매화꽃살문

 빗작약꽃살문

 빗국화꽃살문

 공사상을 의미하는 원 창살

 육간지옥을 상징하는 육간원 창살 

   명부전, 관음보살, 칠성각을 돌아 본 다음 봉황문에서 다시 한 번 귀면을 바라보았다. 요사채로 가는 길목에는 불두화가 한창이다. 그런 사이로 어울리지 않게 빨간 장미가 한 송이 피었다. 부처님은 속세의 꽃인 장미꽃도 좋아하시는 모양이다.

 

  서둘러 버스를 타고 개태사로 향했다. 천호산 개태사는 대한불교 법상종에 속한다. 개태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 신검의 군대를 물리치고 후삼국을 통일한 것을 기리기 위하여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이 황산벌이고 황산벌의 진산인 황산이란 이름을 천호산이라 고치고 이 절을 지어 백제의 기를 눌렀다고 하니, 황산벌의 주인들에게는 어쩌면 치욕의 절이라고 할 만도 하다. 이곳은 왕건이 신검의 군대와 일전을 벌인 전장이었다고 한다. 또 견훤이 왕건에 의탁하였다가 나중에 이곳에서 죽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고 하니, 그 이야기는 듣는 사람의 가슴을 쓰리게 한다. 천호산이라는 이름도 하늘의 보호를 받은 산이라는 의미이다. 하늘은 승리자의 손을 들어 주는 것인지, 승리자가 하늘의 보호을 스스로 칭하는 것인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런데 현재의 개태사는  본래 있던 개태사지에서 옮겨 새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개태사 천왕문. 안으로 일주문이 보인다

   쌍계사가 조계종 산하인데 비하여 법상종에 속한 사찰이라서 그런지 낯선 부분이 많았다. 큰 길에서  바로 천왕문이 있고, 그 너머 사주문이 있고, 다시 그 너머에  일주문이 있다. 몇 보 떨어져 있지 않았다. 주변에는 바로 논밭이 있고, 절의 진산이라고 하는 천호산은 별로 높지도 않을 뿐 아니라, 절집을 품어 안고 있는 모습도 아니었다. 일주문을 들어서자 바로 개태사지 5층 석탑이 있고, 탑 아래는 기도의 흔적이 있다. 기도의 흔적이 정갈하지 못하다.  어쩐지 초라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개태사지 오층 석탑

  석탑 바로 옆에 용화대보궁이 있는데 지은 지가 얼마 되지 않는지 아직 새 건물이었다. 용화대보궁에는 옛 개태사지에 모셔져 있던 삼존 석불 입상을 이곳으로 모셔왔다고 한다.  용화대보궁에서 한 단계를 올라가면  오른쪽으로 작은 전각들이 있다. 정원을 잘 가꾸어 놓았는데  싱싱한 정원수에 비하여 전각은 많이 낡았다. 왼쪽으로부터 차례로 정법궁, 삼일세상정천국, 철확이 있다. 정법궁을 들여다 보니 불상과 함께 단군왕검의 영정을 모셨다. 그리고 민족통일을 기원하는 문구가 씌여 있다. 아마도 민족통일의 염원을 부처님게 빌기 위하여 단군왕검과 백두산 천지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걸었는지도 모른다.

 부처님 외에 단군 왕검의 영정을 모시고 통일을 기원하는 정법궁

 태극기가 휘날리는 개태사 전경

  경내 한 가운데에는 태극기가 아주 높이 게양되었다. 이 절은 다른 절에 비하여 나라를 생각하는 호국불교의 성격이 더 강한 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절집은 많이 탈색되었지만 통일의 염원은 삼국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더욱 짙어가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고 보니 삼국시대부터 계속되는 민족 분단의 아픔을 몸으로 겪는 곳이 바로 논산이 아닌가 한다. 지금도 논산에는 젊은이들이 피와 땀을 흘리는 논산 훈련소가 있다. 그들의 소중한 담이 무엇을 위한 땀이고 누구를 위한 피인가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온다. 민족 모두가 포용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흘리지 않아도 되는 피와 땀이다.  저 벌판에서 계백장군의 호령이 들려 오는 듯하다. 이곳에서 신라와 백제 군사는 몇 합이나 싸웠을까? 또 견훤과 왕건은 몇 번이나 지고 또 이겼을까? 황산벌에서 그들의 함성이 들려 오는 듯하다. 그들의 싸움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태극기는 잔 바람에도 쉼없이 펄럭인다.

 800명의 된장국을 끓였다는 철확

  사람들은 철확에 더 관심이 많았다. 처음에는 밥을 지은 솥인 줄 알았는데 800명 분의 된장국을  끓였다고 한다. 어마어마하게 큰데 솥전이 많이 망가지고 깨져 있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가져 가려고 용을 쓰다가 그리 되었다고 한다. 일본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도심을 타고 났나 보다. 그런 야만적 행동을 저지르면서도 한국인을 그렇게 무시한 걸 보면 더 우습다. 솥 안에는 소원을 비는 사람들이 그리 하였는지 동전이 하얗게 깔려 있다. 철확을 보고 돌계단을 내려 서는데 자그마한 석불입상이 있다.   

삼일세상정천국(팔각정)

 

  삼일세상정천국이라는 팔각정은 흔히 우주정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 안의 부처님은 석불이었다. 그리고 탱화도 모셔져 있다. 밖에서만 바라보노라니 허물어져 가는 모습이 가슴 아프다. 지난 겨울 문살에 붙였던 비닐이 그냥 펄럭이고 있다. 현판은 왜 기울어졌는가? 관리가 아주 허술하다. 쌍계사에서도 그랬고 이곳 개태사에서도 그렇다. 모두들 정부에서 문화재 보수라는 명목으로 지원비를 받고자 하는 눈치이다. 쌍계사 안내하는 노보사의 흥분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정부나 일반 국민들이 볼 때 절집이나 탑은 국민의 재산인 문화재이다. 그러나 절에서 보면 전각 하나하나, 탑, 부도, 불상, 탱화 하나하나 모두가 신앙의 대상이다. 문창살에 낀 먼지 하나 제거하지 않고, 삐뚤어진 현판 하나 바로 잡지 못한대서야 어찌 부처님께 가까이 간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팔각정은 참으로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팔각의 구도라든지, 단청, 공포의 모습이 주변의 산야와 어울려 자연과 인공이 조화를 이루는 예술품이다. 그런데 단청은 퇴색하고, 기둥은 삐뚤어져 있다. 우선 먼지를 닦아내고 현판을 바르게 하는 신앙심부터 추슬러야 할 것만 같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불교 신앙을 가지지 않은 이들의 비판이 민망하다.

 

  정작 관촉사에 가고 싶었는데 올라갈 시간이 없단다. 관촉사 아래 식당이 있는 마당에서 올려다 보았다. 제비집 같이 산 중턱에 붙은 관촉사 소나무 숲에 그 유명한 은진미륵이 보였다.  먼데서 바라보니 도량이 아니라 선계 같은 느낌이다. 정말로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면 밥먹는 것을 포기하고라도 갔다 왔어야 한다. 그러지 못했으니 절실하게 필요한 건 아니었나 보다. 들머리에 배일호의 신토불이 노래비가 있고 느티나무 공원이 아름답다. 이 마당에서 관촉사를 올려다 보며 가족과 함께 다시 한 번 와서 천천히 하루를 보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 때는 관촉사, 개태사, 쌍계사로 거슬러 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돌체 식당에서 바라본 관촉사의 모습

 

  이곳은 땅이 기름지고 넓다. 그냥 바라보아도 배가 부르다. 흥건하게 물이 괸 논과 하얗게 들을 덮은 비닐 온상이 인상적이다. 산은 다른 곳보다 더 푸르고 싱싱하다. 이러한 풍족하고 기름진 자연 조건 때문에 예로부터 전장이 되었을 것이다. 삼국 시대에 백제와 신라의 전장이 되었고, 후백제와 고려의 치열한 전투가 이곳에서 벌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젊은 관창의 피도 이곳에 뿌려졌고, 불타는 계백의 한도 이곳에서 울고 있다. 지존의 자리 바로 앞에서 주저앉은 신검의 울분이나 자식을 다스리지 못한 견훤의 부끄러움도 언덕배기 노란 꽃으로 피어난다. 왕건은 개태사를 지으면서 무엇을 원했을가? 이제 싸움은 끝났으니 모두가 한마음으로 풍요를 이루기를 바랬을 것이다. 그러나 왕건이 세상을 원한 만큼 다른 사람도 왕건을 모두 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에게 살을 겨누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원한은 원한을 낳고, 어짊은 어짊을 낳게 되는 것이 아닌가? 왕건의 성공은 황산벌 사람들에게는 한이 되었을 것이다.

관촉사 입구에 걸린 논산 지역 안내도

  백제 군사박물관과 계백장군 묘소를 거쳐 탐정호숫가를 달렸다. 군사박물관에는 백제 시대의 군사 활동을 시대적으로 정리하였다.  삼국시대 뿐만 아니라 이 지방에서 출토한 각종 군사 무기들을 중심으로 한 문화재들을 전시하였다. 군사적 자료들이나 조선시대의 학자들의 유물이 잘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그 양이 적은데 아쉬움이 남는다. 백제 문화는 멸망한 후에 신라에 의해서 철저하게 유린된 것으로 보인다. 민족을 통일하였다면 당시의 문화도  민족문화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것인데 왜 그런 생각을 갖는 것인지 모른다. 그것은 현실 정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상대를 인정하지 못하는 정치문화는 포용보다는 단절과 편협을 낳게 되는 것이다. 

 

  군사 박물관 옆에 여러가지 체험장이 있어서 사람들을 유인하고 있다. 주변의 산을 자연 그대로 보존한 것이 아니라 참나무와 소나무를 베어내고 다른 나무를 다시 식재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산을 다시 만드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문화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잔디밭에서는 유치원 아기들이 아빠와 함께하는 체험활동이 선생님의 지시에 의해서 계속된다. 아기들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계백 장군의 묘소까지 들린다. 박물관 정원에는 젊은이들이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콘서트인지 음악회인지를 하고 있다. 하기야 이 골짜기에서 마냥 침울해 하고 있을 필요가 있겠는가?

  

  그 보다도 더 궁금한 것은 계백장군의 묘소였다. 그래서 군사 박물관에 가기 전에 사실은 계백장군의 묘소에 먼저 들렀다.그러나 사당은 최근에 건립한 건물이고 김유신 장군의 능침에 비해 매우 초라해 보였다. 패자는 말이 없지만 보는 이의 가슴을 쓰리게 한다. 왜 여기서 갑자기 김유신 생각이 났는지 모른다. 승자와 패자의 모습을 떠올린 것인가? 그래도 묘정에 잡초 하나 없다 깨끗하다. 돌아간 이의 마음도 이렇게 깨끗할 것이다. 다른 회원들이 체험 학습장으로 다시 계백장군 묘소로 올라가는데 정원에 앉아 멀리 보이는 탐정호수를 바라보며 쓸데없는 생각에 잠겼다.

 

  계백 장군은 의자왕 20년(660)에 나·당 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지인 탄현과 백강으로 진격해오자, 5천여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에서 신라 김유신의 5만 대군에 맞서 싸웠다. 전장에 나가기 전에는 가족들이 적의 노비가 되는 부끄러움을 면하기 위해 스스로 부인과 자식을 죽이고 떠났다고 한다. 죽음을 각오한 결사대의 용맹스러운 활약으로 4번의 싸움에서 이겼으나, 수적인 열세로 말미암아 마침내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이곳을 계백 장군의 무덤으로 간주하는 이유는 옛 문헌에서 계백의 목이 잘렸다고 전하는 ‘수락산’과 계백의 시신을 급히 거두어 가매장했다는 ‘가장곡’이 바로 이곳이라는 점과 계백 장군의 위패를 모신 충곡서원이 바로 뒷편에 있다는 점이다. 또한 무덤지역의 동남쪽이 백제와 신라의 마지막 격전지였던 황산벌이라는 점도 있다.

  원래 무덤 일원은 돌덧널(석곽)이 노출된 채 방치되어 있었는데, 1970년대 후반에 보수공사를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백제 말기의 명장 계백장군(階伯將軍)의 유허지(遺墟地)로 전해지는 곳이다. 계백(?∼660)장군은 성충(成忠), 흥수(興首)와 더불어 백제 3충신(三忠臣)으로 꼽힌다. 의자왕(義慈王) 20년(660년) 나당 연합군(羅唐 聯合軍)이 백제의 요충지인 탄현과 백강으로 진격해오자 장군은 5천여명의 결사대(決死隊)를 이끌고 황산(黃山)벌에서 김유신 장군의 5만대군과 싸웠다. 죽음을 각오한 결사대의 용맹스러운 활약으로 4번의 싸움에서 이겼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마침내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전쟁이 끝안후 신라 김유신 장군은 계백장군의 시체를 찾도록 하였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고 한다. 이는 그 부근의 백제민들이 몰래 시신을 걷어들여 급히 묘를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어 찾지 못하였다가 1966년 찾게 되었지만 발견 당시에는 봉분이 반이상이 붕괴되어 내광이 노출되었으며 광벽까지 일부 파손된 채 방치되어 있던 것을 부적면민(夫赤面民)들에 의해 계백장군묘을 복묘(復墓), 지석을 안치한 후 내광회벽을 완봉한 후 봉분둘레 47.6m, 직경 15.15m, 봉분높이 6.5m로 복묘하였고 1976년 5월 19일 성분(成墳)하였다. 

(http://blog.naver.com/nocleaf) 에서

 

 계백장군묘소

 무덤가에 어느 시인이 노래를 불렀다. 나도 덩달아 달을 보았다.

계백장군 묘정 아래 윤순정 시인의 계백의 달

 

                       계백의 달

                                                                                                윤순정

  

백중보름이라 했다
그런 날이면 어쩌다 붉은 달을 볼 수 있다 했다
나는 그 달을 가슴에 품었다
내 생애 처음으로 한 남자를 만나 품었던 뜨거운 가슴으로,
달이 울고 있었다.
붉게 멍든 가슴으로 울음 삼키고 있었다

아련한 등잔불 밑으로
다소곳이 아미 숙여 오는 밤이면
하, 조신하여 하얀 보름달 같았을 백제의 여인
깊고 아득한 눈빛으로 裸身 슬어 내리며
굵고 단단한 두 팔로 그녀의 부드러운 허리를 안을 때 마다
이 뜨거움은 무엇이란 말이냐
사랑이란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곰삭이며
젊은 계백은 되뇌었을 것이다.

칼을 받아라
나의 마지막 사랑이니라
여인은 울지 않았다, 허리를 곧게 펴고
계백의 깊은 눈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그 큰 사랑이 황홀하여 목을 길게 늘였다

늙의신 어머니와 아이들이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백사장에서 평화롭게 모시조개를 건져 올리던 아이들

백강 위로 짙은 안개 서서히 풀리며 햇살 드러나고 있었다

 

계백은 울지 않았다

백제불멸의 제단에 바쳐질 운명

운명에 앞서 이미 스스로 내일을 정각했던 계백

그는 아들을 베인 칼을 함부로 휘두르지 않았다

투구를 들어 올린 소년은 입술이 붉었다

끝내 되돌아온 화랑의 勇과 氣를 죽일 수는 없었다

아비의 가슴으로 관창의 머리를 돌려보냈다

죽이지 않는 것이 자극하지 않는 것임을 계백은 익히 알고 있었다 

                      

황산벌 불멸의 신화는 아직 끊나지 않았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세상의 그 어느 사랑이
목숨을 접수함으로 사랑을 완성한 계백의 사랑보다 더 고귀한 사랑 있으랴
하늘까지 뻗힌 장도의 날 끝에서 영원히 빛부실 휴머니즘이여,
21세기의 청명한 동편의 밤하늘에
피를 삼킨 붉은 달이 울고 있었다
계백의 달이었다  

 

 

  한맺힌 산줄기나 울분으로 치솟은 낙락장송을 차창으로 바라보면서 우리는 명재 윤증 고택으로 향했다. 윤증은 17세기 격동기에 실학자로서 평생 벼슬하지 않고 청렴결백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학문의 세계에서는 그의 삶을 '배반의 일생'이라고 일컫는다. 그의 일생에서 가장 큰 실수는 스승에 대한 배반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들에 따라서는 그것이 도약과 발전의 족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스승의 학문적 한계를 극복할 수는 있어도 스승을 밟고 일어서는 것은 성장이라고 할 수 없다. 그는 스승인 우암선생과 30세부터 의견이 달라져서 50대에는 완전히 결별하였다. 그래서 우암을 존경하는 학파에서는 윤증을 '배반의 인생'이라고 비난한다. 후에 유 아무개의 주선으로 화양동에 은거한 우암선생을 찾아 사죄했으나 우암 선생이 받아 주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제자도 받아줄 사람도 있고 받아주지 못할 사람도 있다. 아무튼 그는 청렴하게 살면서 제자를 기르고 학문에 전념하면서 생을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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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박물관과 윤증 고택의 이모저모

  우리는 명재 윤증 고택의 마당에 버스를 세우고 일단 사진 촬영부터 했다. 나는 무식하게도 윤증이란 인물을 자세히 몰라서 사전에 인터넷을 찾아 보았다. 윤증 고택은 안에서 바깥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읽을 수 있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진을 찍고 마루에 걸터 앉기도 했다. 우리는 잠시 명재 선생의 자손이 이 집에 아직도 살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냥 빈집에 들러 가는 것처럼 잠시 예를 지키지 못했다. 문형동 수필가께서 이 댁에 대한 설명을 하는동안 바로 조용해지기는 했지만, 사실은 문인으로서 반성해야 할 일 중의 하나이다. 후에 그 종손인 윤완식씨로부터 섭섭하다는 말을 들었다.

 

  이 집의 특징은 첫째 담장이 없다. 고택을 가보면 일단 행랑채와 담장이 집을 둘러 싸고 그 담장 안에 정원과 연못이 있고, 사랑채를 사이에 두고 중문을 들어 가면 비로소 마당이 보이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집은 담장이 없다. 그것은 명재 선생이 모든 사람에게 베푸는 삶을 갈았기 때문에 담장이 필요 없었다고 한다.

 

  두번째는 마당에 장독이 많다는 것이다. 아마도 간장과 된장을 담가서 어디에 쓰는가 의심스러웠다. 마당을 가득 채운 장독은 햇살에 반짝거린다. 사방으로 질서 정연하게 줄을 맞춘 모습이 아름답다. 우리의 생활예술품들은 그냥 마당에 놓아도 자연의 모습과 잘 어울린다. 아마도 그냥 주변의 흙을 퍼서 빚어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떠날 때 보니 회원들이 된장 가방을 하나씩 들고 나왔다. 한통에 일만원 정도씩 판다는 것이다. 윤씨댁 장맛을 보고 싶었으나 우리집 된장맛이 그만한데 아내에 대한 예가 아닐 것 같아 참았다.

 

  세째 이 집의 특징은 안채의 대청에서 사방을 다 확인할 수 있는 구조로 지었다는 것이다. 대문에 내외벽이 있지만 안에서 바깥을 다 내다볼 수 있도록 땅과 벽을 한자쯤 띄워서 지었다. 그리고 대청 마루의 바닥의 목재 무늬나, 뒷문의 나무 결이 대칭을 이루도록 배려한 모습들이 인상깊다.

 

  명재 선생은 매우 청렴했다고 한다. 집이 크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렇게 검소하다면서 어떻게 이런 집에 살 수 있었나 의문이 일었다. 그는 본래 작은 모옥에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제자들이 몇 년에 걸쳐서 설계하고 돈을 모아 정성을 다하여 이 집을 지어서 드렸다고 한다. 그러나 집이 너무 화려하다 하여 3년 쯤 살아본 다음에  다시 모옥으로 들어 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집을 명재 고택이라고 하면 윤증 선생에 대아여 옥되는 표현이라고 종손은 눈을 붉힌다. 그냥 윤증 종택이라고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윤증이 여기서 한 때 살았고 그의 소유였고 또한 제자들의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윤증 고택이라고 부르는게 나을 것 같았다.

 

  윤증의 13대 손이라는 윤완식씨가 집을 지키면서 관광객을 맞고 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오늘도 500여 명이 왔다 갔다고 하면서 이렇게 힘드는 것을 생각하면 조상이 족쇄라는 말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고택을 윤증의 종택이라고 불러달라고 욕심을 냈다. 윤증의 옛집이 아니라 종가집이라는 것이다. 조상이 족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찾아오는 손님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본다.

 

  보길도에 갔을 때 느낀 것인데 보길도에 있는 윤선도의 발자국들이 지금은 보길도에 소득을 더하고 있었다. 윤선도가 귀양와 있을 당시 많은 사람들을 괴롭힌 흔적이 남아 있다. 윤선도는 다산 선생처럼 초당을 짓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덕만 심어준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현대를 살아가는 보길도 사람들에게는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문학 기행은 아주 뜻 깊은 여행이었다. 충남 지방을 몇 번씩 돌면서도 부여나 공주만 찾아 들었지 논산을 돌아볼 줄 몰랐던 내가 부끄럽다. 황산벌을 찾아 천호산으로 바뀐 황산의 잃어버린 역사를 돌아보는 것도 뜻깊은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