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답사/忠淸의 山城

청원 문의 구룡산성 답사기

느림보 이방주 2009. 4. 28. 12:36


2009년 4월 29일  

 

  오늘도 오후에 시간이 있어서 청원군 문의면에 있는 구룡산성을 답사하기로 했다. 문의 구룡산은 여유 시간이 있을 때 운동삼아 수없이  올라가 본 산이지만 구룡산성에 대하여는 큰 관심이 없었다. 구룡산성에 올라가는 방법은 현암사를 거쳐 대청댐을 조망하거나, 오가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산성으로 올라 삿갓봉을 거쳐 진장골로 내려 오거나, 그 반대로 진장골로 올라 장승공원을 돌아 오가리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코스로 많이 다녔다.

 

 문의 구룡산 답사의 주제로는 대부분의 대청댐 조망이었는데, 최근에 조성된 구룡산 장승공원 관람이 또 하나의 주제가 되었다. 휴일에는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문의 소재지에서 아주 가까운 양성산에 모이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나는 구룡산의 한적한 오솔길을 즐겼다. 그러나 현암사 뒷산의 돌무더기를 별 생각없이 지나쳤다. 그러다가 연기군에 있는 운주산성을 다녀온 후에 구룡산 돌무더기도 산성이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은 꽤 오래 전의 일이다.  그래서 여기 저기 정보를 알아보니 청주 부근의 산성들에 대해서 많은 고증과 연구가 있었으나 구룡산성은 그냥 산성이라는 것만 확인하고 아직 연구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번에 구룡산성을 답사하는 것은 내가 산성에 대해서 문외한이지만 구룡산성의 존재를 우리 아이들에게 우선 알리고, 그 존재 의의를 생각해 보게하며, 더 나아가 학자들이 이 산성에 대해 연구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나의 소망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 답사기가 잘 정리되면 교지 편집부 아이들과 다시 한 번 답사한 다음 그들의 의견과 종합해서 교지 창간호에 싣고자 한다.

 

<사람들이 주로 택하고 있는 구룡산성 답사 코스>

 

(1) 오가리 장승 고원 주차장 기점 → 현암사 → 5층석탑 → 산성터 → 동탑봉 → 돌탑지대 → 삿갓봉(구룡산) → 장승공원→ 진장골 → 임도 → 연꽃우물 → 임도 →  오가리 장승공원 주차장(역순으로 하는 방법도 있음)

 

(2) 현암정 → 현암사 → 5층석탑 → 산성터 → 동탑봉 → 돌탑지대 → 삿갓봉(구룡산) →현암사 → 현암정

 

(3) 오가리 장승 고원 주차장 기점 → 현암사 → 5층석탑 → 산성터 → 동탑봉 → 돌탑지대 → 삿갓봉(구룡산) → 장승공원→ 진장골 → 임도 → 연꽃우물 → 임도 → 표지목 → 묘3기 → 묘1기 능성 삼거리 → 철탑 → 안부 사거리 → 묘1기 → 묘5기 → 묘2기 →  한국수자원 연구소(황토마당식당)

 

구내 식당에서 평소처럼 마음에 점을 찍고 이효정 선생님 차로 우회도로를 타고 가다가 아름다운 웨딩홀에서 우회전하여 연습비행장 옆길을 달려 가산리에서 문의로 가는 도로에 접속했다. 오가리 구룡산 장승공원 주차장에는 차가 없어 한적하였다. 대신 햇살만 봄햇살답지 않게 짠들짠들하였다. 우리는 장승 공원에서 동쪽으로 돌아 가파른 등정길에 올랐다. 가파른 나무 계단길을 10분쯤 오르면 바로 대청호수의 푸른 물이 마주 보인다. 다시 울창하게 우거진 숲의 가파른 능선길을 오르면 현암사 쪽으로 가는 길과 산 정상 쪽으로 올라가는 길이 갈라진다. 정상쪽으로 가면 산성의 남쪽 사면이 나온다. 왼쪽으로 산성으로 직접 올라가는 길은 가팔라서 피하고, 대부분 사람들은 목도 축일 겸 현암사로 접어들게 마련이다. 산성으로 올라갈 수도 있지만 오랜만에 현암사 부처님이 보고 싶어 우리도 깎아놓은 듯한 절벽에 가까스로 난 오솔길을 밟았다. 오른쪽으로 삐끗하여 미끄러지면 그냥 산 아래 대청호반도로에 내려설 것 같다.

 

10분쯤 걸어 모롱이를 돌아서면 바로 삼성각이 나오고 이어 대웅보전이 초가집 처마에 붙은 제비집 같이 다가선다 나온다. 그래서 이 절을 예로부터 벽에 매달린 듯하다 하여 '현사' 또는 '다람절'이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대웅전에서 요사채로 내려서는 계단 아래 유명한 샘물이 있다. 샘은 바위 아래 있는데 예전에는 이 바위틈에서 쌀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이 바위를 살바위라고 한다. 쌀은 한 번에 꼭 한 사람 요기할 만큼만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불법을 다 깨우치지 못한 동자승이 욕심을 내는 바람에 쌀은 끊어지고 대신 물이 나오게 되었단다. 전국 곳곳에 전해지는 쌀바위 전설의 대표적인 유형이다. 이것은 아마도 지나치게 서두르는 사람들에게 욕심을 버리고 차분하게 기다리라는 가르침의 의미로 만들어진 전설일 것이다.

 

쌀바위 아래 샘물에서 여신도들이 쑥을 씻고 있었다. 초파일이 임박해서 떡을 준비하는 모양이다. 쑥을 넣고 만든 절편이 참기름으로 화장을 하고 함지에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고소한 냄새가 환각 속에서 풍겨나온다.  침을 꼴깍 삼켰다. 시원하고 맑은 물이 소담하게 쏟아져 나온다. 목이 타서 물을 마시고 싶었지만 신도님들이 쑥을 씻는데 열중하고 계셔서 말을 꺼내지 못했다.

 

바로 발 아래 현암정에서 올라오는 철계단이 보인다. 이 길도 내가 많이 다닌 길이다. 철계단은 모두 108 계단이다. 이 가파른 계단을 오르려면 겨울에도 땀이 난다. 한 번쯤 쉬어야 올라올 수 있는 곳이다.  계단 옆으로는 지금도 물건을 실어나르기 위한 삭도가 있다. 이 삭도를 통하여 물건이 올라오는 것은 본일이 없지만 편리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편리하게 물건이 올라 오면 귀하게 여겨지지 않는 단점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대청댐이 건설되기 이전에는 바로 오가리 그 아래 도로가 있었다. 거기부터 현암사까지 올라오려면 꼭지가 돌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니 전국시대에 삼국의 세력 다툼이 심할 때는 이 능선을 지켜 문의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군사들이 거처해야하는 작은 성이 필요했을 것이다.

 

마당에서 바라보는 대청호수는 절경이다. 커다란 용이 용틀임을 하듯 구불구불 옥천쪽으로 이어진다. 아니면 베를 짜서 푸른 물을 들여 너른 들판에 널어 놓은 듯하다. 그 절경 한 가운데 청남대가 있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이곳에 별장을 짓고 민간인의 접근을 막았다. 속설에 의하면 이 천년 고찰인 현암사도 없어질 위기에 있었다고도 한다. 충성스러운 보좌관이 목숨을 걸고 간청하여 살아났을 것이다.  절경은 절경대로 또 수난의 역사가 존재한다. 마치 곧은 나무가 쉽게 베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권력에 의해 사찰이 훼손되면, 바로 그 권력이 파멸을 당하는 일은 역사상에도 수없이 많다.

 구룡산 장상공원 등산로 안내판(그림이 좋다)

 장승공원 입구

 

절집에서 또 동쪽으로 난 오솔길을 걸어 조금만 올라가면 현암사에서 세운 석탑을 만난다. 그냥 대충 서서 주변을 바라보아도 명당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구룡산 정상에서 도도록하게 솟아오른 둔덕 위에 평평한 대지가 오십 평쯤 되어 보인다. 이곳에 탑을 세우고 기도처를 마련하였다. 여기서 청남대가 정면으로 보인다.

 

산이 그리 높지 않으면서도 올라가려면 가파르기 때문에 쉽게 오를 수가 없다.  한 10분쯤 걷고 숨이 턱에 닿으면 숨을 고르다가 또 한 10분을 기어가듯 올라 가야 한다. 이런 곳에 성을 쌓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겠지만, 완공만 해 놓으면 천혜의 요새가 될 것은 너무나 뻔하다.

 

이곳에서 미안한 마음을 갖고 5분만 오르면 바로 돌탑이 보인다. 먼저 도착하는 곳은 약간 펑퍼짐한 쉼터 같은 곳에 쌓아놓은 돌탑이다. 그리고 주변에는  온통 크고 작은 성돌이 널부러졌다. 사람들이 성돌을 주워 모아 탑을 쌓은 것이다.

 

청원군지에는 구룡산 개요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1. 소재지 : 청원군 문의면 덕유리

2. 개요

대청댐 북쪽에 천험을 이루고 높이 솟은 해발 370.3m의 구룡산(九龍山) 정상에 축조된 테뫼형 석성이다. 이 산성은 문헌기록에 전혀 나타나지 않다가 일제때의 고적 조사자료에 처음 등장한다.

 

이에 의하면 성 이름은 미상이며 토축(土築)의 산성으로서 둘레는 약400간(間)인데 붕괴되었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이 산성은 토축이 아니라 석축이며, 현재 완전히 무너져서 문지조차 확인이 어려운 실정이다. 성의 평면은 남북으로 비슷한 고도(高度)로 뻗은 능선과 그 동쪽 사면을 연결하여 장타원형(長恕圖形)이 되도록 축성하였는데, 동사면(東斜面)의 I55m, 능선 위의 서벽(西壁) 129m, 지맥(支脈)의 남벽(南壁) 82m로서 전체 둘레가 366m인 비교적 작은 산성이다.

 

이 산성은 몇 가지 특성이 있는데,

첫째 대개의 산성처럼 능선과 계곡을 포위하여 축성하지 않고 능선과 사면을 이용하여 설축한 점,

둘째 능선에서 같은 높이의 능선 끝에 11m를 남겨둔 채 축성한 점이 그것이다. 문지는 양성산성 방향인 능선의 북단에서 확인되어 양성산성과의 연계를 짐작하게 하며, 이 부근의 문지 안쪽 2m, 능선의 서쪽에서 지름6m, 깊이 1.9m의 웅덩이가 있어 우물터 혹은 저수고(貯水庫)의 터가 아닌가 생각된다.

 

유물로는 성의 남동쪽 사면을 약간 삭평한 곳, 즉 폭 4~8.5m의 평지에서 신라계의 적색토기편과 백제계의 토기편과 기와편이 발견된다. 능선과 사면을 이용하여 축성하였으므로 건물이 들어설 평지가 없고, 우물 대신 저수시설(貯水施設) 밖에 없는 점으로 미루어 일종의 보루성(堡壘城)이었으며, 백제의 궁궐과 조서(曺暑)가 있었다는 속전(浴傳)에도 불구하고 병사(兵士)의 상주유진처(常住留陳處)가 아니었던가 추정된다.

 

즉 일시 신라의 최전방기지였던 아미산성(峨媚山城), 호점산성(虎岾山城)과 대결하기 위한 변방요새인 점, 산성의 규모가 둘레 366m에 불과한 소성(小城)인 점, 성내에 건물이 있었을 대지나 그 유적이 전혀 없는 점 등을 종합해 볼 때 전진(前進)과 사수(死守)만이 있을 뿐 후퇴를 허용하지 않던 수성(守城)의 결의로 이루어진 산성이었다고 보는 설이 있다. 현재 성안의 산능선과 남쪽 현암사(懸岩寺) 방면의 진입로 주변에는 성돌을 이용하여 근래에 쌓은 돌탑이 수 없이 서 있어 대첨댐이 건설된 이후 이곳이 민간신앙(民間信仰)의 장소가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청원군지:http://gunmin.net> 

성의 남쪽 사벽이었던 곳으로 보이는  돌더미

 

구룡산성이 테뫼형 산성이라고 하지만, 부모산성과는 많이 다르다.  부모산성은 정상을 가운데 두고 빙 둘러 싸서 마치 테를 두르듯이 성을 구축하였는데, 이 성은 정상 능선위에 성을 쌓고 가파른 동사면에 띠를 두르듯이 길게 축성을 했다. 그래서 마치 기다란 고구마 모양으로 동사면을 둘러싸고 있었다. 말하자면 정상에 기지를 두고 정상을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정상도 한 편의 성벽 구실을 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성벽은 정상이라고 할 수 있는 능선 부분보다 동사면이 더 길고 북쪽 사면의 일부는 성을 쌓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면 멀리 양성산과 마주치며 연락을 취하며 남쪽에서 오는 적을 방어하기 위한 진지였을 가능성이 높다. 

 

일제  시대 처음 이 성을 조사할 때 토성으로 알았다고 하니 성이 무너진 것은 그 이전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석성은 이미 무너져 돌무더기는 흙속에 묻혀버렸을 것이다. 적색 토기가 발견되었다고 하나 자세히 살펴도 기와편이나 그릇 조각을 찾을 수 없었다. 후에 다시 답사할 기히가 있으면 남쪽 사면의 돌무더기를 더 살펴서 토기편이나 기와편을 찾아내야겠다.

 

성에 필수적인 것이 우물인데, 부모산성에는 모유정이라는 샘이 있던 것으로 전해내려 오고 있으나, 이곳에는  우물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저수 시설이 있었다고 하나 찾을 수도 없고 안내판도 없다. 문헌상으로 전하는 저수시설 부근에 안내판을 군에서 세워 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기는 이곳이 구룡산성이었다는 사실조차도 알리는 안내판이 없으니 알아볼만하다.  저수시설의 규모가지 조사되었다면 어디인 줄은 알고 있을 것이다. 산을 샅샅이 뒤지면 저수시설 쯤 찾아낼 수 있었겠지만, 가파르고 숲이 우거지고 성돌이 나뒹굴고 있어 접근하기 어려웠다.

 

이렇게 저수시설이 있었다면 사람들이 상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필요할 때마다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생활하였다면 일종의 파견대 같은 군대가 비상시에 거주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문의를 지키기 위한 현대 군대 체제로 말하면 1개 분대나 소대가 근무했을 수도 있다. 그렇게해서 주변의 다른 산성들과 연계하여 문의 현을 방어했을 것이다. 아무튼 청주 부근에 소규모의 성이 산재한 것을 보면 삼국시대나 삼국 이전부터 청주가 영역다툼이 심했던 고장이라는 것을 짐작할 만하다.

 능선 아래에 있는 성의 동쪽 사면의 일부로 보이는 돌더미

 능선 아래의 동사면에 쌓았으나 무너진 동벽의 일부

 

구룡산성의 돌탑은 과연 누가 쌓았을까? 청원군 홈페이지에는 이 곳이 민간신앙의 장소가 되고 있다고 하지만 그렇게 볼 수 있는 근거도 확실한 것이 없었다. 돌탑이 있어 민간신앙이라고 한다면 그것도 지나친 일반화라고 볼 수 있다. 더구나 돌탑 어느 곳을 보아도 촛불을 켜 놓았던 흔적도 비손한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민간 신앙에서 비손할 때 주로 쓰는 돼지머리도 없고 밤, 대추, 어포의 흔적도 없이 깨끗하기만 하다. 만약에 그런 것들이 있었다면 주변이 상당히 불결해졌을 것이다.

 

그러면 이 탑은 예술적 아름다움을 구현하기 위한 것일까? 쌓은 솜씨로 봐서 그것도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올려 놓은 것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정교하다. 내가 이곳을 다니기 시작하고도 없던 탑이 하나씩 늘어난 것이다.  아무튼 사람들인 이 성위를 밟으며 이 산을 다니면서도 성에 대한 아무런 생각이 없는 듯하다. 탑을 지나면서 간절하게 무엇이든 비는 사람들도 본일이 없다.

 

언젠가 다시 오면 문루지와 저수지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문루가 있었다면 거기에 유물도 있었을 것이고 지표 조사를 하면 이 성의 역사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자료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청원군의 생각 있는 공무원이 있어서 이곳에 산성에 대한 개괄적인 안내판 정도라도 세워 주었으면 좋겠다. 장승에 대해서는 야단스럼게 난리를 피워 놓았으니 행정관청의 문화에 대한 부족한 인식이 안타갑기만 하다.

 남벽과 서벽이 만나는 지점에 쌓아 올린 돌탑

 능선위에 쌓은 서벽의 성 위로 짐작되는 돌길을 걷고 있는 이효정 선생님

 능선 위 서벽의 일부

 지금은 돌탑이 된 성돌(동쪽 사면에 저수지가 있었을 것이다)

 성의 북사면으로 보이는 성벽 (문지는 어디에 있나?)

 

성석의 북측 끝으로 생각되는 비탈길을 내려와 삿갓재로 행했다. 삿갓재로 가는 길은 평탄하고 녹음이 짙어 걷기에 부담이 없다. 삿갓재 정상에는 장승 한 쌍과 승천하려고 기어 올라온 용을 설치해 놓았다. 이곳에서 멀리 월리사의 진산인  양성산, 작두산, 샘봉산, 봉무산, 대전의 계족산이 다 바라보인다. 특히 대통령 별장이었던 청남대는 정면으로 보인다. 전망이 좋다.

 

부당한 권력이 판칠 때는 이곳에 청남대를 지키는 초소가 있었다고 한다. 진장골 사는 사람들은 품곡리를 통해서 산길로 마을을 오가든지, 하석에서 비탈길을 타고 기어 올라오든지해야 했을 것이다. 오가리에서 올라오려면 아직도 중간에 철책으로 길을 막은 흔적이 남아 있다. 대대로 이어 살아온 자기 고향을 드나들면서 자동차 트렁크까지 열어보여야 했던 주민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진장골로 내려가는 길에는 온갖 장승이 줄을 이었다. 성행위를 상징하는  해학적인 모습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을 것이다. 농촌에도 인구가 늘어났으면 좋겠다. 그러나 농촌의 젊은이들이 이곳에 올 시간이 있을까? 온다하더라도 그들이 장승이 소망하는 일은 그림의 떡이거나 이룰 수 없는 가슴아픈 소망으로 그칠 것이다.

 

장승에 관한 이야기는 몇 해전에 써서 이 블로그에 올린 <알라리 깔라리 쟤들좀 봐>에 적었기 때문에 생략한다.

 삿갓재에서 바라본 대청호수

 삿갓재 정상에서 진장골로 가는 길

 삿갓재의 이효정 선생님

  해학적인 장승의 모습

 알라리 깔라리 (그림의 떡)

 장승제를 지내는 제단 앞에선 느림보, 소나무가 멋지다. 

 

참고로 청원군지에 있는 청원군의 연혁을 빌여 왔다.

 

<청원군연혁>

구석기시대

ㆍ청원지방은 약 20만년전인 구석기시대로 부터 사람들이 거주한것으로 추정

ㆍ1976년 8월 문의면 노현리 두루봉동굴의 구석기 유물 및 유적발견


신석기 시대

ㆍ지금부터 6천여년전 빗살무늬토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

ㆍ문의면 가호리 아득이에서 신석기시대 유물인 빗살무늬 토기 조각 발견


철기/청동기시대

ㆍ사람들이 집단을 이루어 부락을 형성하고 움집을 짓고 살았음

ㆍ선돌, 고인돌이 가덕면 노동리 선돌을 비롯하여 각 면에 다수 분포


삼한시대 

 ㆍ마한에 속하였음

 

삼국시대

 ㆍ대략 4세기에 이르러 백제에 흡수되어 상당현(청주지방), 일모산군  (문의,현도,부용일대)이 되었음

 ㆍ고구려에서는 낭비성, 낭자곡, 낭성 등으로 일컬어졌음

 

통일신라시대

  ㆍ685년 신문왕 5년 청주지방에 서원소경을 두어 청원지방은 서원소경과 일모산군의 관할에 속하게 되었음

  ㆍ757년 경덕왕 16년에 서원경으로 승격 · 경덕왕은 일모산군은 연산군으로 개칭

 

고려시대

 ㆍ940년 태조 23년에 서원을 청주로 개명

 ㆍ983년 성종2년에 청주목을 두어 목사를 파견

 ㆍ1259년 고종 46년에 청주에 내속된 연산군은 문의현으로 승격

 

조선시대

  ㆍ1413년 태종 13년에 청주목을 둠

  ㆍ1449년 세종 31년 일시 관할사를 두었고 세조때 청주진을 둠

  ㆍ1895. 5. 26 칙령 제 98호로 청주군이라 칭함

 

참고 자료  청원군홈페이지  http://gunmin.net/home/img/dataimg/1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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