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 30일
우암산성 내성 답사
이 날은 오전 근무를 마치고 오후에 시간이 있어서 그동안 미루어 왔던 우암산성을 답사하기로 했다. 진산인 우암산과 중심가를 가로질러 흐르는 무심천은 청주의 상징이다. 사람들은 우암산과 무심천에 대한 글을 많이 쓰고 각 학교의 교가마다 우암산 무심천이 언급된다. 그런데도 시민의 휴식공간이 된 우암산 등산로의 일부가 와우산토성이라는 사실은 잊고 지낸다.
우암산 토성은 우리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청주지방의 학계에서는 이미 1980년대부터 연구가 시작되어 성의 존재에 대하여 개괄적 파악은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부모산성처럼 지표 검사를 통하여 성곽의 축성 시기나 용도 당시의 유물이 확실하게 밝혀내지는 못한 것 같다.
다만 다음과 같은 기록에 의해서 성의 존재를 확인하고,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성곽의 외양이나 성곽의 표면에서 무수히 발견되는 와편들을 토대로 추정하는 정도인 것 같다.
< 우암산 토성에 대한 기록>
新增東國輿地勝覽 券十五 淸州牧 山川條
"唐羡山 在州東一里 鎭山 有土城基 臥牛山 在州東二里"
新增東國輿地勝覽 券十五 淸州牧 古積條
"山城 在州東一里 土築 周五千二十兩尺 內有四井 今廢"
조선 보물 고적 조사자료 74쪽
"四州面 校西里 城名不詳 淸州邑의 東方約半里에 있음. 土築의 山城으로서 周圍 約 千五百間 高 平均五尺 基部幅二間 乃至 四間 稍完存함"
<우암산 토성의 개괄>
우암산의 명칭은 문헌에 당이산, 장암산, 대모산, 무암산 등으로 불리었고 여지도서, 조선시대 지리지 청주 연혁지 등에 와우산이라 불리기도 했다. 언제부터인가 우암산으로 불렸는데 '소가 누워있는 형상'을 의미한다고 한다.
우암산은 소백산에서 갈라져 나온 지맥으로 가까이 한남금북정맥의 한 봉우리인 상당산에서 남서쪽으로 갈려 나온 봉우리이다. 그런데 지금은 상당산과 우암산 사이 바람매기고개가 매우 낮아서 독립된 산으로 생각된다. 지금은 이고개를 넘어가는 청주 동부우회도로에 인조 터널을 만들어 상당산과 우암산의 맥을 형식적으로나마 잇고 있다.
우암산 토성은 우암산(와우산 339m)에 있으며 우암산 정상에서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내린 두개의 능선에 마치 기어가는 누에 모양처럼 남아 있다. 동쪽 능선은 현재 cjb의 송신탑이 있고, 서쪽 능선에는 한국통신 kbs, mbc의 송신탑이 있다 . 이 두 능선 사이에는 길게 계곡이 형성되어 있으며 토성은 이 계곡을 둘러싸는 포곡식으로 축조되었다.
토성은 지도에서 보듯이 수동의 성공회 성당으로부터 우암산 정상에서 용담동 쪽 능선을 지나 당산까지 이어진다. 당산에서는 동공원 정상을 싸고 도는 테메식으로 형성되어 전체 우암산 토성은 포곡식과 테메식을 겸했다고 볼 수 있다.
우암산 토성의 규모는 지역 산성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크다고 볼 수 있다. 위의 기록을 토대로 계산해 보면 둘레 2.4km, 2.7km 혹은 2,997m 라고 한다. 그런데 아래 용담동 쪽 하산로에 설치된 우암산 토성 안내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매우 유용한 시설로 슬기롭게 축성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우암산의 포곡식 산성이 능선 안부를 지나 당산으로 내려서면서 테메식 산성인 당산 토성과 연결된 것과 토성 동문 즈음에서 계곡으로 내려가는 성벽과 토성 동문 즈음에서 골짜기로 내려서는 성벽이 만나 수문을 이루는 부분의 성벽 구조를 보면 복잡한 구조이면서 상당히 유용하게 활용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성의 내부에는 4개의 우물터가 남아 있다고 한다. 또 문지로는 북문지, 서문지, 동문지가 지금도 확인할 수 있으며 계곡의 물이 흘러 내리는 수구 쪽으로 성의 정문이 있어서 주 출입문으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 문화유적 분포도>
<용담동 쪽 하산로에 설치된 우암산 토성 안내도>
성을 쌓는 방법은 산의 정상과 동서에서 남쪽 방향으로 낮아지는 능선 정상부의 바깥쪽 경사진 면에 흙으로 쌓은 성벽이 계곡을 포위하고 있는 듯한 포곡식 산성으로서, 내탁외축의 방법(바깥쪽에 석축을 쌓고 안쪽에 흙을 다지는 방법)으로 축조하였으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어서 등산로로 활용되고 있다. 그래서 내탁의 퇴적토가 유물포함층이고, 통일신라나 고려 초의 유물이라고 보이는 경질의 토기편과 어골문계 와편이 출토되고 있어서 고려 초쯤에 개수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충북대학교 호서문화연구소에서 발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성벽을 축조할 때 기단에 대석재를 이용하고 성벽 바깥쪽에 정연한 석축으로 1.35m 를 샇은 다음 안쪽으로 60cm정도 조잡한 석재를 채우고 다시 흙채우고 다지는 전형적인 내탁외축(內托外築) 방법으로 쌓은 것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답사기>
우리는 성공회 수동 성당에 들어가 너른 주차장에 주차했다. 사실은 문에 외부차량 주차 금지라는 표지가 보였지만 청주 우암산 토성 답사라는 중대한 일을 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한 낮에 텅비어 있는 주차장을 활용하는 것이므로 별 거리낌을 느끼지 않았다.
성공회 정문에서 마주보이는 골목으로 들어서자 조용하고 정원이 깨끗한 집들이 있고 그 집들이 작은 골목을 형성하고 있었다. 집들은 별장처럼 아름다운 집도 있고 달동네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것들도 있다. 다만 그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꽃을 좋아하는지 집집마다 마당에 맨드라미 분꽃 봉숭아 같은 향수를 느끼게 하는 꽃을 심어 가꾸고 있었다.
마을이 끝나는 지점의 밭 둑에 우암산 등산 안내 지도가 있으나 낡아서 알아보기 힘들었다. 이 등산로는 전에도 종종 이용한 적이 있지만 토성이라는 생각이 없이 다녔기 때문에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함께 가는 이효정 선생님은 이 골목길은 처음이라고 했다.
우리는 바로 성곽 위에 난 등산로로 올라 섰다. 마치 무슨 고적 발굴이라도 하는 듯이 기웃거리며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길을 걸으면서 좌우를 살펴 보니 토성이라는 것을 뚜렷하게 알 수 있었다. 수목이 우거져 있지만 좌우가 언덕처럼 경사가 급하고, 가운데 돌이 많이 눈에 띤다. 그리고 돌 사이에서 가끔 기와 조각도 보인다. 등산로의 너비는 약 2m~2.5m 정도 되지만 풀이 우거진 부분까지 하면 더 넓다고 할 수도 있다. 등산로는 평탄하다. 성곽로를 걸으며 살펴보는 양면은 사람의 힘으로 쌓은 흔적이 뚜렷하다.
성공회 청주 성당
성공회에서 토성으로 올라가는 수동 골목
수동에서 토성 성곽 위로 난 등산로
평탄한 등산로 (성벽 위의 길 : 화곡도)는 급경사를 만나게 되는데 급경사 길을 오르면 대한불교수도원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게 된다. 이곳에는 평평하고 넓은 터가 있는데 여기에는 기와 조각이 다른 곳보다 더 많이 보인다. 여기가 토성 서문지라고 한다. 기와 조각들이 고려시대의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여기에 있던 건물들이 고려시대 건물이라고 볼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신라 신문왕 9년 (689년)에 쌓은 서원경성이 이 성 일 가능성이 있고 또한 고려태조 2년(919년)에 고려 태조 왕건이 청주에 행차하여 성을 쌓았고 같은 왕 13년(930년)에 다시 행차하여 나성을 쌓았다고 한다. 이 두 기록을 종합하여 보면 신라 때 쌓은 성을 고려 태조가 재축한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발견되는 흔적들은 고려시대 축조되었다는 이야기가 맞는 이야기일 것이다.
건물지인 듯한 곳을 지나면 다시 경사로가 나온다. 경사로에는 기와편이 더 많이 발견된다. 기와편들은 대부분 무늬가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 민무늬 와편 속에 줄무늬 조각이 눈에 띠는데 이것은 기와 조각이 아니라 토기의 조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이 성곽 주변에 세워진 건물들은 대부분 같은 시대의 건축 되었을 테니 같은 민무늬이고 그와 다른 토기는 또 그 시대의 것이므로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효정 선생님은 기와 조각이 워낙 많이 발견되니까 아마도 토성 위에 토담을 쌓고 그 토담을 기와로 잇는 공법이 사용된 것일 수도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역시 정말 그럴 듯한 추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우리가 고고학자가 아니므로 확증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만약에 그 이야기가 맞는다면 이 성 안에 있던 건물이나 용도 거처하는 사람들의 신분까지도 짐작이 가능할 것이다.
운동 시설로 변한 건물지
건물지에서 다시 이어지는 성곽로
발견되는 기와 조각
무늬 없는 기와 조각
건물이 있던 자리인지 작은 기와 조각이 많다
생선 가시 같은 무늬가 보이는 기와 조각(기와 조각일까? 토기의 조각일까?)
성곽로를 따라서 송신소 쪽으로 계속 올라갈수록 와편은 더 많고 경사로는 왼쪽으로 성곽의 모습이 뚜렷하다. 송신탑에서 또 한번의 나무 계단 길을 걸어 올라 가면 너른 대지가 보이고 청주대 후문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게 된다. 여기가 북문지라고 한다. 북문지에서는 성 안으로 통하는 길이 나있고 송신탑으로 가는 차량들이 이곳을 통해서 송신탑으로 올라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도 여기가지 차량으로 이동해서 우암산 정상을 가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이곳이 바로 천흥사 터라고 하는데 여기 샘이 있으나 폐쇄되어 물이 나오지 않았다.
여기서는 한 굽이만 올라서면 우암산 성길은 문득 끊어지고 정상으로 착각할 정도로 높은 곳이다. 여기서 성은 갑자기 동쪽으로 틀어 용담동 쪽으로 내려가는 산줄기를 따라 당산토성으로 향한다. 정상 부근에 또 하나의 송신소가 있고 여기도 홍천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송신소
kbs 송신소
북문지에서 바라본 청주 시가지
정상 가까운 부분 여기서 성벽이 동으로 굽었다
정상에서
용담동쪽으로 방향을 돌려 조금만 걸으면 우암산 정상 표지석이 나온다. 해발 339m이다. 낮인데도 사람들이 운동을 하고 산 바람을 쐬고 있었다. 우리는 의자에 앉아 물을 마신 다음 다시 용담동 쪽 하산로를 걷기 시작했다.
용담동 쪽으로 내려가는 성곽 길은 청주시에서 관심을 가지고 관리를 하고 있는 흔적이 여기 저기 보였다. 목책을 세우고 줄을쳐서 통행을 막고 군데 군데 성곽 보호에 대한 문구가 보인다. 그런데 왜 수동 쪽에는 아무 말도 없는 지 알 수가 없다. 생각없이 지날 때는 몰랐으나 이곳이 성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걸으니 토성의 윤곽은 아주 뚜렷하다. 성 안쪽으로는 성벽이 완만하고 성 밖쪽으로 성벽이 더 높고 거의 수직에 가깝다. 거기에 나무와 풀이 무성하다.
성곽로 주변 보호 목책
보호 목책
뚜렷한 성곽로
청주시에서 설치한 보호 안내판
용담동 방향으로 내려가는 내리막길(올려 촬영하여 오르막길처럼 보임)
멀리서 보이는 청주 향교의 아름다운 모습
우거진 숲 길을 걸어내려가니 지금도 흔적이 뚜렷한 넓은 동문지가 나타났다. 여기서 토성의 한 줄기는 성내로 나뉘어 들어간 흔적이 보였다. 우리는 당산 방향으로 계속 걸어 내려왔다. 이 지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숲으로 둘러 싸인 향교가 지붕만 보였다. 가까이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아름답다.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성곽은 끝나지 않았는데 마을이 나타났다. 향교로 내려가는 골목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남쪽으로 길게 능선이 형성되어 있는데 민가와 채소밭이 있다. 그래서 용담동과 경계를 이루는데 이 능선에 성곽의 흔적은 완전히 없어졌다. 지도에는 여기서 계속 당산토성으로 이어진다고 되어 있지만 흔적을 발견할 길이 없다. 빗방울이 계속 떨어져 당산으로 가지 못하고 향교로 내려와 다시 성공회 수동 성당의 뒷길로 원점회귀했다.
이 토성이 어떤 용도에 대해서는 추측하는 이론이 많다. 대부분은 당시 청주 지방의 주요 관아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고, 사찰의 유적지가 많은 것으로 생각한다면 사찰이 모여 있는 사찰 촌으로 생각할 수 있다. 고려시대 사찰 지대로 운천동 흥덕사지라든지 산남동 원흥사 주변을 드는데 이곳도 그런 곳으로 추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지방 권력자의 주거지가 아닐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輿地圖書 淸州牧 山川條에 보면 청주 읍의 보좌처로서 시내에 있는 청주 읍성과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얘기하는 청주산성은 바로 우암산성을 의미할 것이다. 고려 후기 거란의 침입 때 옥천군민이 이곳에 피난하였다는 기록도 있는데 다용도로 쓰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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