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 28일
오늘은 오후에 시간이 있을 것 같아서 <청주의 성> 답사를 하기로 했다. <청주의 성> 중에서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부모산성, 와우산토성, 정북토성, 그리고 청원군 문의면에 있는 구룡산성을 계획하고 있다. 그밖의 청주 주변의 산성이나 토성을 차례로 답사하는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앞으로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계획을 잡아 보아야겠다. 이효정 선생님과 함께 가기로 했다.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옷을 갈아 입었다. 부모산성 답사는 교지 창간호의 특집으로 계획하고 있어서 출장을 내었다. 내 차를 타고 산남동을 빠져 나갔다. 우회도로를 거쳐서 죽림사거리를 지나 문화방송 옆길로 좌회전하여 강서 1동 용정리를 지나 반송에서 36번 국도와 접속햇다. 휴암리로 넘어가는 진약고개 마루에 있는 빈집 마당에 차를 세웠다. 이 집은 도로가 확장되기 전에는 소머리국밥 집이었는데 폐업을 한 모양이다. 사람들이 부모산 등산 들머리를 다른 곳으로 옮기니까 자연히 장사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도로가 확장되기 전에는 여기서 능선을 타고 부모산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있었는데, 산자락 일부를 절개하여 도로로 편입시키는 바람에 들머리를 찾을 수 없었다. 더구나 부모산은 가까이에 있는데도 고등학교 때 소풍을 와 본 이후로 한 번도 올라가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더 했다. 무조건 능선으로 올라서니 등산로가 보였다. 매캐한 냄새가 올라왔다. 인근 쓰레기 소각장에서 나는 냄새였다. 단백질 타는 냄새가 꼭 화장장에서 나는 냄새 같았다. 올라갈수록 시내 아파트촌이 보였다. 강서동 반송 마을도 이제는 아파트가 빼곡히 들어서서 작은 도읍을 이루었다. 가경지구, 진대마루(복대동)를 넘어서 시내까지 훤히 보인다.
부모산 녹음은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아침 기온이 섭씨 4도로 쌀쌀해서 겨울 셔츠를 준비해 왔는데 기온이 갑자기 올라 25도를 넘으니 마치 찜질방에 들어선 기분이다. 등산로 옆에는 연산홍 흰쩔쭉 등을 심어 아름답게 조경을 해 놓았다. 그러나 사람의 손길이 어떻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따를 수 있겠는가? 그래도 곳곳에 양지꽃, 오랑캐꽃이 피었고, 등나무가 연보랏빛 꽃으로 향기를 흘리고 있었다.
부모산 등산로와 부모산성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부모산 부근도
부모산성 부근의 지표도
우리는 계속 두리번거리며 성 비슷한 것을 찾았다. 중간에 돌탑이 있어서 주변을 살펴보니 꼭 석성의 흔적처럼 보였다. 길에도 돌이 깔려 있어서 틀림없이 성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상 부근에서 안내도와 무너진 성을 만나고 보니 우리가 올라온 길은 성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부모산성은 테뫼식 산성이기 때문에 산 정상 부분을 둥그랗게 테를 두르듯이 둘러싸고 있을 것이라는 짐작은 이미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성 위를 밟고 다녀서 성은 길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생긴 길에 올라서서 들머리에 세워놓은 약도를 보면 성은 테뫼식 산성의 본보기를 보는 듯 정상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정상에는 KT에서 통신시설을 해 놓아서 올라설 수 없을 것 같았다. 정상에 전설과 함께 전하는 모유정이 있는 것을 어렸을 적에 보았는데 오늘은 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림에서 보는 부모산성은 산의 지형을 이용해 성벽을 구축하여 전체적으로 역삼각형을 보는 듯했다. 성벽의 윗부분은 많이 무너져서 마치 수많은 돌무더기처럼 보였다. 나는 돌무더기를 디디며 무너진 성의 기저 부분으로 내려가서 올려다 보았다. 울퉁불퉁한 돌이 무질서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돌무더기 아래로 내려가서 올려다 보니 기저부는 그냥 그런 대로 옛 석공의 솜씨라든지 돌을 쌓은 방식을 짐작할 수 있었다. 대충 성의 원래의 모습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스러웠다.
테뫼식 산성의 본보기인 성돌 무너져 길이 되었다.
무너진 성돌
축성 당시의 모습이 남아 있는 성벽
성벽의 모습이 남아 있는 돌무더기
그림대로 성위에 난 돌길을 걸었다. 걸으면서 작은 기왓조각이나 강자갈을 찾으려고 세심하게 돌무더기를 살폈다. 그러다가 돌무더기에서 기왓조각을 몇 개 주웠다. 빗살무늬가 선명하게 보인다. 기와는 대개 회색빛을 띠고 있다. 기왓조각이 있는 것은 사람이 살았었다는 증거이고 민가보다는 관청이나 성문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부모산성 안내문에는 부모산성에는 4개의 성문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강자갈도 몇 개 보였다. 대개 산성 안에서 강자갈이 많이 발견되는데 이것은 격전지였음을 말해 주는 근거라고 한다.
무너진 성에서 흔하게 발견되는 기왓조각
서쪽 사면으로 돌아가자 석성이 끊어진 듯이 문득 멈추어 버린다. 성은 갑자기 북쪽으로 방향을 돌린 것이다. 덕분에 서쪽 산 아래가 탁 트인다. 가까이 지동리로부터 멀리 옥산, 오창 과학산업단지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 연기군의 운주산이 까마득하게 보인다. 이렇게 시계가 탁 트였으니까 여기를 청주 탈환의 요충지라고 하는가 보다.
이곳에는 사람들이 운동을 할 수 있도록 운동기구를 설치해 놓았다. 멀리 옥산까지 탁 트인 미호천변의 기름진 들판을 바라보면서, 중부고속도로를 넘어 오창 과학산업단지를 내려다보면서 운동 기구에 올라 앉아 심신을 단련하는 시민들이 참으로 한가로워 보였다. 이 사람들이 삼국 시대의 격전장이었던 이곳의 애환을 알기나 할 것인가? 또 몽고의 침입으로 이곳 주민들이 생사를 넘나들었던 정신적 고충을 상상이나 할 것인가? 반대로 이 작은 성에 모여 옥죄어 오는 외적으로 부터 어떻게 하든지 명줄을 부지해야만 했던 당시의 백성들은 오늘날의 풍요와 한가로움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무너진 석성은 시간의 축지법으로 역사의 벽을 넘어서서 과거의 고통과 오늘날의 풍요의 역사를 바라보면서 과연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궁금하기만 했다.
성벽이 끊어지는 곳에서 보이는 옥산, 오창읍의 기름진 들판
<부모산성 개요>
2002년 1월 11일 충청북도기념물 제121호로 지정되었다. 청주 서부의 부모산(父母山:231.7m)에 있는 석축 산성이다. 성벽의 윗부분은 많이 무너졌으나 기저부는 온전히 남아 있다.
산성은 평면이 남서쪽 주봉에서 동서남북으로 분지한 4개의 능선을 둘러싸 역삼각형을 이룬다. 성안의 지세는 정상을 중심으로 서부와 남부가 높고 북쪽과 북동쪽이 낮은 편이어서 이곳 성벽의 안쪽 부분은 경작지가 되어 있으며, 동쪽 계곡의 중간쯤에 전통사찰인 연화사(蓮華寺)가 있다. 문지(門址)는 동서남북 4문이 있었던 듯하나 서문지와 북문지만 남아 있다. 서문은 붕괴된 성벽의 기저에 너비 6m, 두께 5.2m 규모의 통로로 남아 있으며, 북문은 너비 9m, 두께 6m의 유지가 남아 있다. 우물로는 산정부에 자연석으로 지름 1m 정도 되게 쌓은 모유정(母乳井)이 있다. 주변의 출토유물은 삼국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편, 기와편 등이 발견되었다
두산 백과사전
이 성에서 남쪽으로 직선거리 5km 쯤에 팔봉산이 바라다 보인다. 또 그 두 배쯤 되는 곳에 남이면 척산과 문의면이 경계를 이루는 봉무산, 남이면과 부강이 경계를 이루는 복두산이 바라보인다. 단군 성전이 있으며 저산성으로 유명한 은적산은 바로 코 앞에 잡힐 듯하다. 팔봉산 너머에 우리 고향 마을의 울타리를 만들어 준 용덕산도 보인다. 복두산에는 복두산성이 있다고 전해진다. 문의의 구룡산성, 작두산성, 양성산성, 청주 시가지를 건너 동으로 와우산 토성과 그 뒤로 상당산성과도 연결된다. 청주시에서 팔결 다리를 건너기 전의 미호천 변의 평지에 있는 정북토성과 정북토성에서 들을 건너면 바로 오창 산업단지의 진산인 목령산이 있고, 목령산에는 목령산성이 있다고 한다. 거기서 조금 더 북쪽으로 나가면 구녀산성이 있다. 그리고 멀리 서쪽으로 우뚝 솟아 오른 연기의 운주산성과도 연결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부모산성은 주변의 크고 작은 산성의 한 가운데에 쌓아 올린 것이 아닌가 싶어 예사롭지 않게 생각되었다. 고증된 사실은 아니지만 혹시 이곳에 지휘부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주변의 기름지고 너른 들판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이 부모산성을 점령해야하니까 부모사성을 공격하기 위해서 주변에 그렇게 많은 산성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이곳에서 성은 갑자기 동으로 구부러지고 재단법인 중원문화연구원에서 발굴조사한 북문지가 보였다. 중원문화연구원의 발표에 의하면 이곳을 중심으로 송절동과 화계동 일대에 커다란 정치 세력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이곳에서 발견된 삼국시대 전기에서 볼 수 있는 토광목관묘, 토광목곽묘 유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출토된 유물 가운데는 백제의 유물이 대부분인 모양이다. 다시말하면 4세기 경에 백제가 이곳에 진출하여 이 부근을 확실하게 지배했을 가능성을 이 연구에서 추정하고 있다.
신봉동에 백제 유적, 청원 낭성에 고구려 유적, 보은 삼년산성과 문의 양성산 구룡산의 신라 유적의 흔적이 존재하는 것을 미루어보면 4 세기로부터 5세기경의 삼국항쟁기에 청주 지역에 크고 작은 성이 수없이 많아야 하는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즉 청주 일대의 기름진 땅을 자신들의의 영역으로 확보하기 위해서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던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앞서 말한 대로 이 부모산성이 주변을 관망하는 중심지일 가능성은 매우 높은 것이다. 또 이 시계가 탁 트인 북문지야말로 그런 적지가 아닌가 한다.
북문지는 동쪽과 서쪽이 작은 산줄기를 바람막이 삼아 움푹 정상쪽으로 들어간 구릉에 자리잡고 있었다. 마치 명당이 죄우의 산줄기를 좌청룡우백호로 거느린 모습이었다. 전략적으로도 동쪽과 서쪽의 작은 산줄기를 엄폐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중원문화연구원이 발표한 1, 2차 발굴조사 결과를 보면 다음과 같다. 다음은 현장 알림표지판에 적힌 내용과 중원문화연구원이 발표한 2차 조사 결과 보고서를 요약한 것이다.
1. 발굴 조사자 : 재단법인 중원문화연구원
2. 발굴조사 기간 : 2004년, 2005년 10월 20일-2006년 4월 말
3. 발굴 조사 결과
(1) 산성 출입 시설인 북문터와 물을 배수하기 위한 수구시설이 확인되었다.
(2) 성 내부에서 다양한 움과 구덩이, 둔덕시설, 건물터, 뻘층 등이 조사되었다.
(3) 유물로는 "前", "北" 등의 글자를 도장처럼 기와 등 쪽에 찍은 기와, 굽다리접시 , 완, 뚜껑, 목짧은 항아리, 그릇 받침, 벼루 드의 토기류 등 흙을 구워 만든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4) 성벽은 안팎 모두 석재를 이용하여 쌓아 올린 내외 겹축의 석축 성벽으로 높이가 바깥에서 10m, 안쪽에서 8m이다.
(5) 계곡 중심부 바깥면에는 연약한 지반을 강화하여 성벽 기단부를 마련한 기초석축 서설이 있으며, 성벽 바깥면에는 성벽 하부를 보강하기 위한 보강석축성벽이 덧붙여 축조되었다.
(6) 유적의 중심 연대는 삼국시대 6~7세기 경으로 백제 및 신라 문화요소가 혼재하여 확인되었다.
(7) 부모 산성은 당시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대였던 청주 지역을 두고 두 나라가 치열하게 치열하게 전쟁을 벌이던 시기에 군사와 행정의 중심지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8) 성벽 중단부 지점에 통행로를 조성하고 사다리 등을 이용해서 성문으로 오르내리게 출입하는 현문(懸門) 구조이며, 길이 770cm, 너비 450cm, 측벽 높이 130~180cm이다. 문짝 기둥 아래의 회전축에 사용된 확쇠 1점이 출토되었다.
(9) 수구 시설은 계곡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성벽 중단부를 관통하여 개설된 수구부와 이와 연결되는 성 안쪽 수로 시설이 확인되었다.
(10) 수구부는 정삼각형 내지 사다리꼴 형태로 전체 길이 700cm, 내부 크기는 밑변 50cm, 높이 50cm이다.
(11) 여러 모양의 움과 구덩은 계곡부 위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풍화 암반층을 파내어 부뚜막과 구들, 굴뚝 시설을 갖추고 있는 직사각형 모양의 살림집과 저장 구덩이로 보이는 깊은 움이 발견되었다.
(12) 건물 주춧돌도 남아 있다.
(13) 둔덕 유구는 수로시설 위쪽에 확인되었는데, 안쪽에 흙을 쌓고 안팎으로 흙을 다져 넣은 흙벽을 쌓아 둔덕을 만들었다.
2007년 성의 원형 보존을 위해 기존의 성돌을 사용하여 발굴 부분을 정비하였으나 성돌이 강도가 약해서 윗부분을 경사지게 정비하였다.
보수한 북문터 수구
보수한 성돌
완전히 보수된 북문 수구
북문 수구부 발굴 보수 현황 알리판
잡목이 우거진 성벽(연화사를 지나) 남쪽으로 돌아온 곳
<청주부모산성> 안내판 내용
부모산은 본래 아양산(我養山)이라 부르던 산으로 산봉우리와 동쪽 계곡을 감싸고 동로 쌓은 산성이 있다. 고려 말기 몽고 침입 때 고을 사람들이 이곳에 피난하였는데 성안에서 샘물이 솟아 모두가 살아 났으므로 그 은혜가 부모와 같다하여 ‘부모산(父母山)’이라 하고 샘은 어머니의 젖과 같다하여 모유정(母乳井) 이라 하게 되었다.
부모산성의 역사에 대한 문헌기록은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조선 시대 지리지에 둘레가 2,427척(尺)이며 성안에 큰 못(大池)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산성은 미호천변의 넓은 평야지역을 내려다보는 위치에서 청주지역을 통치하는 한편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하여 축조한 백제 시대 성이다. 발굴조사 결과 산성이 축조되기 이전의 삼국시대 초기부터 사람이 살았으며, 백제 시대에는 토성(土城)으로 축조되었다가 통일신라시대에 석성(石城)으로 개축되었고, 고려시대 이후에는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며, 산성이 있는 산줄기를 따라 몇 개의 작은 보루(堡壘)가 부설되었다. 산성의 둘레는 1,135m, 높이는 6m 내외, 너비는 6.4m이다.
또한 청주시에서 운영하고 있는 홈페이지의 문화 유적에 관한 안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부모산성의 역사에 대한 문헌기록은 없으나 조선시대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및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주(州)의 서쪽 15리(里)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돌로 쌓았고, 둘레가 2,427척이며, 안에 큰 못[대지(大池)]이 있다. 지금은 폐성되었다”라고 기록되었다. 조선 후기의 『충정도읍지(忠淸道邑誌)』, 1933년의 『조선환여승람(朝鮮환輿勝覽)』에 “주의 서쪽 15리에 있고, 석축이며 성안에 못이 있어 가뭄에는 비를 빈다. 둘레가 2,427척인데 지금은 폐하였다”라고 하여 가뭄에 비를 비는 기우제(祈雨祭)와 같은 행사가 있었던 모습을 전하고 있다.
현존하는 옛 성벽들이 대부분 훼손되었으나 부모산성은 바깥 성벽의 하단부가 상당 부분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또한 체성(體城)의 축조에 사용된 석재는 기단 보축(補築)에 쓰인 돌에 비해 좀더 다듬어진 돌들로 축조되었다. 성벽의 윗부분이 내외 겹축된 양상으로 축조되었으며, 성벽의 둘레는 기록에 보이는 2,427척이 포백척(布帛尺)이며, 환산치인 1,134.1371m는 현재의 잔존 성벽 내측의 길이를 실측한 1,135m와 거의 일치한다. 성벽의 너비는 최소 6.4m이상이었다고 추정되며, 성벽의 높이도 대략 너비와 같은 규모로 축조되었다고 여겨진다. 다만 곳에 따라 성벽의 높이가 외면 하단의 보축까지 합하여 7m를 넘는 곳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동서남북에 통행로가 있으며, 이들이 문으로 되어 있었다면 모두가 현문식(懸門式)의 성문을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북문터 동측에서 성벽이 확인된 것을 보면 성벽 외측에 보축을 가진 형식의 성벽 구축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축조 방식은 서기 470년에 축조된 삼년산성(사적 제235호)에서 나타난 기단 보축과 다르며, 보축된 외면이 계단식을 이루고 있어 서울 광진구 아차산성(사적 제234호)의 서쪽 성벽과 의정부시 서쪽의 양주 대모산성의 보축과 같은 양식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계단식 성벽은 중부 이남 지역에서는 처음 조사된 것으로서 앞으로 이 산성의 축조연대를 규정하는데 하나의 기준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보축된 성벽은 신라계의 성벽에서 나타나는 특별한 형식으로서 현존하는 부모산성의 석축 성벽은 신라계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커졌다고 보인다.
산성이 있는 산줄기를 따라 몇 개의 작은 규모의 보루 성이 존재하고 있다. 이들 보루 성은 부모산성이 축조되기 이전의 유적일 가능성도 있으며, 부모산성과 같은 시기에 보조적인 용도 기능 가능성도 있어 앞으로 이에 대한 지속적이 조사와 연구가 필요하다.
성벽의 기저부가 원상태로 남아 있으며, 중부 이남 지역에서는 처음 조사된 계단식 보축 성벽 등 역사적으로 고찰할 자료가 많이 남아 있어 청주지역의 역사를 밝힐 수 있는 중요유적으로 사료된다.
북문에서 남쪽으로 돌아나오는 구릉에 위치한 연화사
북문지를 지나 동편으로 돌아 나오는 길 옆에 사람들의 휴식터가 있다. 여기는 마치 전망대 같아서 청주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였다. 이곳에서 다시 남쪽으로 돌아드니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구릉이 있고 거기에 연화사가 있었다. 연화사는 고려시대 지어진 연월사가 임진왜란 중에 폐쇠되었다가 1928년 경에 훗날 금강사 유점사 주지를 지낸 김청암 스님이 재창건했다고 한다. 김청암 스님이 재창건 불사를 앞두고 절터에 연꽃이 만발하는 꿈을 꾸어 연화사라 이름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절집은 그리 오래된 건물 같지 않았다. 안내판에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2004년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현재는 대한불교태고종 종단에 속한 절이다.
연화사를 지나 시멘트 포장 도로를 걸으면서 산성의 안쪽인 정상부분이 궁금했다. 다시 남쪽으로 가면 정상에 남아 있는 유적지인 모유정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가까이 가서 보니 산성 내부는 KT 에서 통신시설를 해 놓고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우리는 아쉬움을 남긴 채 돌아서야만 했다. 시멘트 도로는 차들이 수시로 드나들어 정상까지 차량이 올라 갈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돌아내려오는 길이 약간 씁쓸했다. 답사 이전에는 그냥 작은 산성으로 생각했는데 실제 답사하고 보니 성에 관한 문외한의 눈으로도 부모산성의 중요성을 짐작할 만하였다. 그런데도 그 보존 대책은 매우 미흡해 보였다. 청주시에서 문화재라는 알림판 몇 개 세워놓았고 일부 기업에서 자연환경 보존을 위한 봉사지구라는 알림판을 세워 놓았을 뿐이다. 있는그대로 보존하겠다는 의지를 찾기 힘들었다.
참고정보
참고/관련자료 청주시(1997), 문화유적분포지도(청주시), 146쪽.
부모산성 http://jungwon.re.kr/(중원문화재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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