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생활과 일상/것대산이나(病床일기)

것대산이나 바라보며 -병상에서 15일 째

느림보 이방주 2009. 4. 7. 22:50

2월 27일(금)

 

오늘은 신학년도 전 직원이 출근하는 날이다.  오늘 모두 만나 상견례를 하고 2009학년도 업무와  학급 담임, 교과를 나누어 갖는 날이다. 자리를 배정받고 짐을 옮기는 날이다. 부산하고 할 일이 많아 복잡하지만 그래도 새로운 업무와 새로운 교과, 새로 만날 아이들을 그려 보며 기대에 부푸는 날이다. 새로 만나는 사람들과 새롭게 구성된 부서 별로 모여서 술을 마시고 밥을 먹으면서 새로 다가오는 역사를 어떻게 꾸릴 것인가 생각하는 날이다. 그러나 나는 그냥 병원에 있다.

 

오늘 퇴원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무너졌다. 오후에라도 나가서 내일을 준비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폐에는 아직도 염증이 만만찮게 남아 있단다. 나는 담당 의사가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의사는 나를 미련하다고 생각했으리라. 그는 당연한 일을 하면서 공연히 민망하고 미안해 했다. 나는 또 받아들여야 할 일을 공연히 그에게 짜증이 났다. 또 3일날 보잔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 때 가면 염증이 얼마나 가실 것인가?  담당 의사는 정 그러면 외출이라도 했다가 돌아오라고 한다. 하지만 외출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외출이라고 해가지고 업무를 인수인계를 하고, 이삿짐을 나르고 하겠지만, 그것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또  아이들도 만나지 못하고 그냥 돌아온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는 그냥 참기로 했다.

 

학교가 걱정이다. 그러나 내가 없어도 학교는 다 돌아 간다. 걱정한다는 사실이 독선이고 오지랖 넓은 생각이다. 아니 오만이다. 없어도 다 굴러간다. 아니 더 잘 굴러갈 수도 있다. 실제로 더 잘 굴러 간다고 한다. 학교에 전화를 걸어 며칠 더 걸린다는 사실을 알렸다. 3일까지 병가를 연장하였다. 이틀이니까 교체 수업을 하겠다고 했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이제는 여운이 있게 들린다. 나의 자격지심에서 나오는 오해이겠지.  학교에 여러 차례 전화를 해서 가까운 선생님들에게 여러 가지 부탁을 했다. 짐을 옮기는 일, 내 자리를 비워주는 일, 직접하지 못하는 일들을 그렇게 부탁했다.  

 

딸아이가 와서 종일 함께 있었다. 피곤해 보였다. 저녁에 처남이 또 왔다. 딸아이를 딸려 보냈다. 충북수필문학회 신임회장님이 전화를 하셨다. 고맙다. 그러나 정작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빼놓으시는 눈치이다. 치과 진료 의뢰, 주사, 아직도 알레르기는 여전하다.

 

정말 병원을 나가고 싶은 날 오후는 그렇게 지나갔다. 아주 쓸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