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6일 (목)
5시 기상
여명의 하늘이 맑고 따사로워 보인다. 날씨가 참 좋다. 봄기운이다. 내 몸에는 언제 봄이 올 것인가? 것대산 능선이 더 선명하다. 하늘 색이 고와서 그럴 것이다. 하늘과 경계를 이루는 검은 선이 우리가 밟고 지나간 마루금이다. 바지 자락에 잡초 더미를 휘감으며 거침없이 걷던 지난 날이 그립다. 그러나 이 병원에서 나가면 올해에도 바로 그렇게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날씨는 좋아졌지만 어제의 우울이 오늘 아침까지 남았다. 베개 머리에도 신발에도 우울이 묻어 있다. 포도당 비닐 주머니에서도 우울의 물방울이 똑똑 떨어진다. 우울이 전신에 스며든다.
새벽에 링거를 다시 놓으려고 혈관을 찾아서 뚫었으나 약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아프기만 하다. 다시 찾아 뚫었다. 한 번 뚫으면 사흘은 간다고 하던데 어제 뚫은 곳을 버리고 오늘 또 새로 뚫는다. 어떻게 된 노릇인지 하루가 지나면 주사 바늘이 휘어져서 약이 스며들지 않는다. 내가 움직여서 그렇다고 한다. 그래서 병원에서는 식물 인간이 더 편한 모양이다. 주사 바늘을 붙인 테이프도 연신 떨어진다. 떨어져서 너덜너덜한다. 아무렇게나 간호사 선생님들이 하는 대로 그냥 버려 두었다. 새로 뚫은 곳은 왼팔이다. 잘 쓰지 않는 쪽이니 편하기는 하지만, 너무 위에다가 바늘을 찔러 놓으니까 손등에 뚫었을 때보다 불편하다. 그러고 보니 온 손등과 팔이 온통 바늘 구멍 천지다. 14일 째인데 3일씩 간다면 그렇게 구멍 천지를 만들어 놓지는 않을 것이다. 아프고 가렵다. 그러잖아도 가려운 곳이 많은데 바늘 구멍까지 가렵고 부어 오른다.
오늘 붉은 반점이 더 심하다. 별로 특별한 것을 먹은 것도 없는데 종일 들락날락한다. 팔에도 한 군데, 다리에도 몇 군데 반점이 생겼다. 속상해하고 짜증 내면 더 심한 것 같다. 맘을 편히 가지자. 어차피 당분간은 이곳에서 지내야 하는 것 아닌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자. 모든일에 순종하자. 나를 버리면 세상이 편해지는 것이 아닌가? 나를 버리자. 까짓것 집어 내던지자. 아무도 원망하지 말자. 그들의 일을 내가 한다 하더라도 더 잘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 간호사들은 한결같이 친절하다. 수시로 와서 불편한데 없느냐고 묻는다. 주사를 아프게 놓는 것 이외에는 불편한 것이 없다. 그건 그냥 되는 일이 아닐 것이다. 그들에게 봉사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런 친절이 어떻게 가능할까?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이런 것이다. 내 마음도 편해 진다.
낮에 사촌 처남 내외분이 오셨다. 오후에 친구 이 선생이 왔다. 얘기를 한참 나누었다. 그를 만나면 참 편하다. 나를 다 보여줘도 부끄러울 것 같지 않다. 우리는 동갑이다. 우리는 동성동본이다. 우리는 두 번이나 같이 근무했다. 그래서 그런 것만도 아니다. 그도 내게 쉽게 얘기할 수 없는 것들을 아주 쉽게 얘기하기 때문에 나도 그에게 쉽게 얘기할 수 없는 것들을 쉽게 말한다.그는 내가 들으면 좋아하지 않을 말도 내게 득이 되는 일이면 아주 쉽게 말해 준다. 그냥 그런 사이다. 취약점인 치아에 대해서도 많은 조언을 들었다. 치료를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내일 아침 피검사, 방사선 사진 촬영, 그 후에 퇴원 여부를 정한단다. 그러나 희망을 버렸다. 이런 몸으로 어떻게 출근을 할 수 있을까? 정말 나가고 싶다. 사람들은 완치될 때까지 있어야 한다고 한다. 저녁에 혈관을 다른데 또 뚫었다. 아프다. 좋게 생각하려 했는데 하루에 두 번을 뚫는다. 그냥 포기했다. 알레르기 치료제가 또 들어왔다. 약이 도대체 몇 가지이냐?
먼 산을 바라본다. 것대산밖에 보이지 않는다. 거기나 바라보자. 거침없이 걷던 그날을. 길가 풀섶을 다리에 휘감으며 거침없이 걷던 그날을 말이다. 그날에 주고 받던 우리들의 생명력 넘치는 대화를 말이다. 이렇게 지난날에만 의미를 부여하고 자부심을 갖는 것으로 끝나지는 않겟지. 올여름에도 그런 날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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