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생활과 일상/에세이의 뜨락

<에세이 뜨락> 달과 별(임형묵)

느림보 이방주 2009. 3. 22. 19:35

달과 별

 

 

 

잔잔한 이야기 코너인 '에세이 뜨락'은 지역 수필가들이 1주일에 한 번씩 방문, 삶의 여정에서 건져올린 생각을 수필, 꽁트 등의 형식으로 들려주는 작은 사랑방입니다.

모처럼만에 공원에 나왔다. 초저녁인데도 여느 때와 달리 왁자하지 않다. 바람도 없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 어떤 그리움에 하늘을 올려다본다. 반달은 채워지지 않은 욕망이 남아 있는지 수줍어하며 별 하나를 붙들고 있다.

달 아래서 몸을 드러내는 별. 사랑이 엷어지는 중년이 되면 남자가 수그러지듯 '개밥바라기별'도 그러는가? 달 위에서 빛나고 있었는데 며칠 못 본 사이에 달 아래로 내려앉았다. 몸을 자꾸 낮추다 보면 나중에는 어떻게 하려고. 자신의 존재는 무엇인가. 자전 방향이 지구나 다른 행성과 달리 반대라 해도 마음은 변치 말아야 한다. 수시로 마음 바꾸면 외로움만 남고, 한 곳에 집중하지 못하는 사랑이라면 방황만 있을 뿐이다.

   
가만히 달을 올려다본다. 지나간 추억이지만, 지워낼 수 없는 흔적이지만 지워 버려야 한다. 회오리바람 불고 눈보라 이는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개밥바라기별'을 만난 게 행운이다. 행운아다. 계절이 변해도 별은 모양을 바꾸지 않는다. 달 모양에 상관 않고 어디서든 빛을 낸다. 수만 ㎞ 밖에서 빛날지라도 달의 존재를 잊지 않는다.
공원을 거니는 연인들의 모습에서도 쓸쓸함이 묻어났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손 내밀면 되는데 하늘에 떠있는 달과 별처럼 거리를 좁히지 못한다. 다가가지 못한다. 어떤 사랑을 간직한 사이였기에. 달려온 세월의 흔적이 진해서일까. 허물지 못한 마음의 벽이 있을지 모른다. 말없이 눈물을 흘리며 그려내는 사랑은 슬프다. 다가갈 수 없는 사랑이라면 나뭇잎에 매달린 이슬방울처럼 불안하다.

반달을 볼 때마다 마음 설렌다. 가만히 손 내밀고 소곤소곤 사랑을 속삭이고 싶다. 가슴속으로 노랗게 번지는 반달. 반달은 비록 몸이 반쪽이지만 또 다른 반쪽이 있어 서럽지 않다. 잃어버린 톱니바퀴를 찾아갈 때처럼 마음이 부푼다. 꿈꿀 수 있는 희망을 준다. 그믐달처럼 한이 서려 있지 않아 가슴으로 안고 돌 수 있는 반달. 반달은 서늘해졌던 가슴을 사르르 녹여준다. 그리움에서 벗어나게 한다. 시인 정호승은 '아무도 반달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반달이 보름달이 될 수 있겠는가'라고 노래하였다. '보름달이 반달이 되지 않는다면 사랑은 그 얼마나 오만할 것인가'하고.

공원 한 바퀴를 더 돌았다. 주변 풍경은 조금 전 그대로다. 수은등만이 바람을 껴안고 졸음을 쫓아낼 뿐 변한 게 없다. 달빛이 호수 위로 내려앉는다. 건물에서 비치는 색색의 네온사인이 그 위로 겹친다. 물결이 일렁이고 빛과 빛이 만나며 교합 된다. 노랑과 빨강이 유난히 잘 어울렸다. 사랑에 빠지면 연인들의 얼굴도 저런 빛깔이다. 샐비어 꽃처럼 선홍색으로 물든다. 달빛이 가슴속으로 파고들며 고요를 깨운다. 두툼한 점퍼를 걸쳤지만 괜히 손을 잡고 싶어진다.

반달은 아른아른 했던 추억을 건드린다. 사진첩을 들여다보게 하고 저 깊은 곳에서 잠자고 있던 상념을 들춰낸다. 중학교를 들어가서 얼마 되지 않을 때였다. 동네 산 너머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겁도 없이 한밤중에 능선을 타고 넘어오는 중이었다. 어찌어찌 하다 동갑내기 여자애 손을 잡았는데 그날따라 달빛이 그리도 그윽하던지. 몸이 떨려오던지…….



달이 뜨고 지기를 여러 번. 그러던 어느 날 기적소리와 함께 큐피트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공교롭게도 반달이 뜨는 시각인 정오에 맞춰 공중전화 부스로 달려가곤 했다. 100원짜리 동전이 전화통으로 달그락거리며 떨어지면 가슴 저편에서는 소낙비 소리가 올라왔다. 달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전화기를 들었다. 될 수 있으면 젖은 목소리를 냈다. 달빛에 물든 소리를. 그런 목소리가 좋은지, 아니면, 반달 때문인지 자리를 뜨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매번 같은 말을 되풀이해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렇게 마음이 어우러져 갔고 움직이는 시간 속에서 떨어져 있던 그림 조각들은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해 12월, 속삭임은 겨울 햇살처럼 빛났다.

달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한다. 태양광선을 받아야 빛을 낸다. 태양·지구의 위치에 따라 그 모습을 바꾸어가는 외로운 존재다. 그런데도 모험, 질주, 낯섦, 항해, 그런 단어들에만 눈이 가 있었다. 그 빛마저 희미해 쇠잔해지는 그믐달이 되도록 내버려두기도 했다. 달빛을 닮고 싶어 하는 그녀. 달빛으로 물들기를 원하는데도 얼굴 뒤에 숨겨진 그림자를 읽어내기는커녕 또 다른 수수께끼를 만들곤 했다. 삶이 뭐 대단한 건 아니지만 지나간 세월의 흔적이 너무 아프다. 달 속에 감춰진 그늘을 보는 것처럼 서럽다.

호수 공원 건너편 빌딩 사이로 사람들이 흘러들어 가고 되밀려 나온다.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그들만의 언어로 수를 놓으며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시간이 꽤 흐른 것 같다. 밤바람도 제법 싸늘하게 느껴진다. 아파트 창마다 불빛이 더해지고 거리의 자동차들도 경적소리를 내며 귀가를 서두른다.

가만히 달을 올려다본다. 지나간 추억이지만, 지워낼 수 없는 흔적이지만 지워 버려야 한다. 회오리바람 불고 눈보라 이는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개밥바라기별'을 만난 게 행운이다. 행운아다. 계절이 변해도 별은 모양을 바꾸지 않는다. 달 모양에 상관 않고 어디서든 빛을 낸다. 수만 ㎞ 밖에서 빛날지라도 달의 존재를 잊지 않는다.

반달이 살며시 떠오르는 날에는 어찌나 몸이 떨려오는지 괜히 섬뜩섬뜩해진다. 오늘따라 달빛이 짙다. 달빛이 그날처럼 교교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