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어머니와 탁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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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이야기 코너인 '에세이 뜨락'은 지역 수필가들이 1주일에 한 번씩 방문, 삶의 여정에서 건져올린 생각을 수필, 꽁트 등의 형식으로 들려주는 작은 사랑방입니다. 누군가 논틀길로 더벅더벅 걸어온다. 외따로 떨어진 우리 집을 향하고 있나 보다. 그런데 왜 하필 평평한 길을 놔두고 바람막이 하나 없는 좁다란 길로 가로질러 오는가? 그의 손에 들린 검은 봉지가 바람에 심하게 흔들린다. 이윽고 옷깃을 여미던 팔을 풀고 날 알아본 양 반가운 손짓을 보낸다. 어머니가 논틀길로 나타나리라곤 상상도 못하였다. 어머니는 딸과 외손주을 만나고자 매서운 바람과 울퉁불퉁한 길도 마다하지 않고 걸어올 분이었다. 빈손으로 사돈댁을 찾을 분이 아니니 사돈이 좋아하는 탁주를 떠올려, 마을 초입에서 가게를 찾았으리라. 우리 집과는 상당히 떨어진 부녀회에서 운영하는 '새마을가게'가 있을 뿐이었다. 탁주를 손에 들고 터벅터벅 걸어오던 나의 어머니. 당신의 생전에 모습이 이리 생생한데, 이 느낌이 18년 지난 기억이라니…….
친정어머니와 나 그리고 시어머니와 탁주 사이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누구에게나 노력해도 넘지 못하는 산은 있게 마련이다. 나에겐 그 산이 바로 술이다. 도수가 낮은 술이라 해도, 한 잔만 마셔도 온몸은 금세 붉게 타올라 티를 내고야 만다. 분수에 맞지 아니하게 술을 즐기다간 한뎃잠을 자는 신세가 되든지, 지인의 등에 업혀가기 일쑤다. 체질상 술을 못 하니 나의 주량은 유전 요인이 큰 것 같다. 그나마 설탕을 넣은 탁주는 단맛에 목으로 술술 넘기니 말이다. 내가 아는 한, 어머니가 생전에 드신 술은 설탕 넣은 탁주뿐이었다. '술 탄 설탕물인지, 설탕물 탄 술인지' 모를 정도로 당분을 풀어야 목으로 넘길 수 있었다. 집안에 술을 즐기는 이가 없어, 탁주를 마시는 어머니 모습은 생소했다. 내가 어머니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던 그 시절이었다. 할머니가 요에 실수한 날이었다.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배설물을 치우고, 장시간에 걸쳐 이불을 주무르는 어머니를 보았다. 그런 날은 영락없이 어깨가 축 처지고 얼굴빛 또한 파리했다. 할머니의 실수는 시간이 갈수록 되풀이되었다. 가납사니 아니한 어머니는 그 행위를 원망도 없이 묵묵히 받아들였다. 시도 때도 없이 배고픔을 호소하는 할머니 수발에 지칠 대로 지쳐 갔을 때인가 보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허연 물에 설탕을 타서 오만상을 찌푸리며 단숨에 들이켰다. 그때 마침 나와 눈이 마주친 어머니는 '한 모금 먹어 보라.'며 사발을 내밀었다. 탁주였다. 어느 날인가 시어머니는 나에게 양해를 구하듯 심경을 털어놓으셨다. "논일 마치고 만취해 돌아오는 남편의 술타령이 징그러웠지. 근디 내가 어찌해 술을 배우게 됐는지 몰러. 한 모금, 두 모금 목을 축인 게……." 남편을 보낸 것도 적막강산인데 가장의 역할까지 감당하며, 변변치 않은 형편에 홀로 삼 남매를 키우느라 동네 품앗이를 마다하지 않으셨으니. 어디에도 하소연 할 수 없는 당신의 고달픈 삶을 탁주 한 잔에 풀었던 것일까. 생각해보면 뿌옇고 떫고 시큼한 탁주엔 어떤 마력이 있는 것 같다. 두 어머니가 어디에도 말 못할 삶의 신산스러운 고비마다 넋두리를 받아 준 걸 보면 말이다. 인간만큼 간사한 동물도 없는 것 같다. 차가 없던 시절에도 시어머니에게 탁주를 받아다 드리는 것이, 나의 일과 중 하나였다. 그런데 요즘 게으름을 부리는 나를 본다. 식구들의 귀가만을 기다리며 먼산바라기 하는 시어머니의 얼굴을 그리면서, 편의점 앞을 지날 때면 정차할 공간이 만만치 않다고 스치고 만다. 먼 길을 돌아오던 친정어머니에 비하면 코앞인데 말이다. 대보름달이 휘영청 밝다. 그리운 어머니가 내 창가에 걸어주었나 보다. 달빛 아래 탁주 한 사발 주거니 받거니 하고픈 날이다. 이젠 그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지. 탁주에 설탕을 넣어 휘젓는다. 누군가 내 귓가에 소곤거리는 성싶다. '어미의 신산한 삶의 궤적을 알지 못하며, 어찌 탁주의 감칠맛을 알겠느냐!' 순간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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