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답사/등산과 여행

북바위산 소나무

느림보 이방주 2008. 6. 14. 20:18

6월 14일

 

  우리는 북바위산을 가기로 했다. 그냥 갑자기 ---.  친구는 내가 아직 북바위산을 가보지 못했다는 말을 기억해주었다.

 

  오늘 산행의 주제는 북바위산의 북처럼 생긴 바위가 아니라, 바위능선이나 바위벽을 타고 뿌리내린 소나무이다. 처음에 그냥 가 보지 않은 산이기에 가려고 했는데, 들머리 물레방아 휴게소 뒷편의 소나무 숲부터 심상치 않다. 밑동에서부터 가지까지 온통 붉은 적송이다. 그 붉은 몸뚱아리를 아래로 하고 하늘을 향하여 한없이 퍼진 진록의 줄기가 두려울 정도이다.

 북바위산 우리가 걸어간 길

 송계 계곡의 물레방아 휴게소 뒤편의 소나무 숲이 심상치 않다.

 

 우리는 물레방아 휴게소에 주차하고 산행의 들머리를 찾았다. 휴게소는 통나무로 지은 건물이다. 아마도 시멘트로 짓고 거죽에 나무를 대었을 지도 모른다. 마당에 차가 몇 대 세워져 있었다. 적단풍이 뒷산의 소나무와 대조를 이룬다. 그 인위적인 적단풍 덕으로 자연의 소나무는 더 고고해 보인다. 물레방아가 돈다.  좀 인위적이기는 하지만 그 자재라든지 지붕 모양이 산과 조화를 생각한 흔적을 보여준다.  떨어지는 물로 그냥 돈다. 물은 맑다. 천년을 두고 그렇게 돌 것이다. 물도 천년을 두고 그렇게 맑게 흐를 것이다.

 

  능선까지 오르는 길은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어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땀이 모자에 배었다. 짜면 물이 떨어질 것 같다. 첫 날망에 올랐다. 평평한 바위다. 바위 위에 소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섰다. 아랫도리는 좀 굵게 보였지만 키는 그렇게 크지 않다. 그러나 얼마나 오래 견딘 소나무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소나무는 그리 멀지 않은 계곡을 내려다 보고 있다. 아랫 세상에 수없이 지나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지도 모른다.

 

  친구는 우리가 바위를 이렇게 밟고 서 있을 때도 소나무는 괴로울 것이라고 했다. 맞아. 괴로울거야. 포근한 이불을 덮고 누웠을 때 누군가 이불을 밟았을 때처럼 그렇게 괴로울거야. 소나무는 말이 없다. 그래서 나무(木) 중에 상공(公)이 아닌가? 아직 가지는 늘어뜨리지 못했다. 사람들이 밟을 때마다 괴로운 뿌리를 견디느라 그렇겠지. 친구의 산을 사랑하는 깨우침에 감사한다. 

 소나무를 보고 탄성을 지르는 친구들

 

  또 시작되는 바위 능선을 밟으며 오르고 또 올랐다. 땀이 또 밴다. 우리는 땀으로 대가를 지불한다.  마지막 바위를 밟고 올라서는 순간, 이 산이 '북바위산'이란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눈앞에 우뚝 북바위가 보인다. 영락없는 북이다. 손바닥으로 두드리면 '둥둥둥 두둥두둥 둥둥둥'하는 북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사시리고개에서 내려닥치는 골바람이 계곡에서 한 번 휘돌아 휘돌아 휘익 불어온다. 바람소리에도 북바위는 '두두두두 둥둥' 울릴 것만 같다. 북 가죽 테두리는 온통 소나무로 장식했다. 낙락장송이다. 북이 울릴 적마다 부르르 떨리는 솔잎이 또한 볼만할 것이다. 사물에서 쇠나 징이 땅의 소리라면 장구나 북은 하늘의 소리라고 한다. 땅의 소리는 정서적 위안이라면 하늘의 소리는 이성의 깨우침이다. 북바위는 내게 무엇을 깨우치려나? 북바위 앞에서 능선을 돌아 오르는 동안 계속 북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바로 우리가 서 있는 그 너럭 바위 아래 바람에 갈라진 처참한 몰골의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한 가지는 찢어져 나갔는지 자리에 없다. 갈라진 몸뚱이를 가리려고 안으로 오르라드는 보굿이 애처롭다. 아픔에 꼬이고 뒤틀리며 뻗어 올라간 붉은 줄기가 힘겹다. 잔인한 하늘의 벽을 온몸으로 부딪치며 비틀고 꼬며 꿰뚫어 가지를 뻗었다. 찢어진 몸뚱아리로도 수많은 가지를 벋고 그 가지 위에 햇살을 받아 푸르고 청초한 젊은 솔잎을 피워 내었다. 자랑스럽고  멋지다. 찢어진 몸뚱이쯤이야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이다. 사람도 그렇게 힘겹게 사는 모습이 아름다울 때가 있다. 그렇게 살면서 피워낸 잎이 더 아름다울 때가 있다.

 풍파에 몸이 찢어진 채 서 있는 소나무

 몸부림치며 하늘을 향하는 가지

 상한 몸뚱이로도 저렇게 맑고 청초한 솔잎을 내었다.

북바위를 뒤로 한 친구(신남호선생, 연철흠선생)  

                                             "아직은 이쯤이야" 하는 느림보

  안쓰러운 소나무를 뒤로 하고 북바위에 올라섰다. 문득 중국의 태산이 생각난다. 옛 중국인들은 이런 바위를 보면 붉은 글씨로 시를 새겼을 것이다. 태산 정상 부근의 바위벽에 새겨진 수많은 싯구들이 생각난다. 그런데 우리 자연은 깨끗하다. 그대로 보존하여 물려줘야 한다. 산에 왔다 가려면 발자국을 남기는 것조차 산에게 미안하다는 친구의 말에 공감이 간다. 최근 산은 산이 아니라 마당이다. 우리가 디딘 발자국이 산을 마당으로 만들어 버렸다.

 

 북바위로 오른 비탈진 바위 위에서 박쥐봉을 바라보았다. 온통 녹음이 온산을 뒤덮었다. 우리는 또 걷는다. 그런데 거기 이런 소나무가 있다. 죽음 뒤에 서 있는 삶이다. 뾰족한 가지 끝까지 하얗게 미이라로 변한 서너 그루의 소나무 뒤에 시퍼렇게 살아 있는 또 몇 그루의 소나무가 서 있다.  죽음 뒤에는 저렇게 삶이 시퍼렇게 서 있다. 삶의 앞에는 이렇게 죽음이 하얗게 촉루를 드러내고 있다. 순환이다. 죽음과 삶은 순환이다. 그러나 되돌아 오는 것은 나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아니 알 필요도 없다. 결국 순환이니까. 아는 것과 모르는 것도 순환이다. 그런  것과 아닌 것도 순환이다. 아니 있는 것과 없는 것도 결국은 하나의 틀 안에 있다.

 

  아침에 TV에서 본 등신불이 된 스님들의 신비스런 미이라가 생각난다.  결국 그 스님들처럼 미이라가 되어서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처럼 죽은 소나무도 하얗게 가지를 생시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미이라가 된 소나무는 이 꼭대기 온갖 풍설을 맞으면서 등신불이 된 것이 아닌가?  그러니 죽은 것이 산 것인지 산 것이 죽은 것인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수도승과 등신불이다. 

 

                                                     수도승과 등신불

  살아야 한다. 우리는 어쨌든 살아야 한다. 살 길을 찾아야 한다. 우리의 일상이란 결국 삶의 물줄기를 찾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젖줄을 입에 물고 눈물 묻은 맑은 눈에 웃음을 담는 아기 때로부터 몸에 온갖 약줄을 달고 병상에 눕는 그 날까지 우리는 생명의 물줄기를 찾아 뿌리를 뻗어가야 한다. 이 소나무들은 거칠고 험한 바윗돌을 깨치며 부드러운 흙살과 물줄기를 찾고 있다. 어찌 보면 삶의 행렬이 두렵기까지 하다. 경외감을 갖게 한다. 소나무를 이렇게 표현해도 될지 모르지만, 한갖 자연도 이런데 두 다리로 안가는데 못가는데 없이 찾아갈 수 있는 우리네야 걱정할 일이 무엇인가? 최근의 우리네 삶이 고되다 해도 이렇게 찾으면 도리 일이 아닌가?   자연에게 도리혀 두려움을 느끼고 자연이 오히려 존경스럽다. 

 바윗돌을 깨며 흙을 찾아 뻗어가는 소나무 뿌리

 바위를 깨고 굵직한 뿌리를 박고 누운 소나무

   뿌리인지 줄기인지 흙을 찾아 간다. 저 멀리 믿어지지않는 가늘고 젊은 가지가 보인다 

                          

 코브라처럼 또아리를 틀고 일어서는 소나무

  오늘 북바위 산은 온통 소나무다. 소나무가 나의 도반이다. 소나무와 이야기를 나누고 소나무를 내 안에 끌어 들인다. 온 산이 다 사색의 동굴이다. 그러나 그 멋을 다 담기에는 내가 가진  그릇이 너무 작다. 하기야 어떤 그릇에 이 아름다운 자연을 다 담을 수 있겠는가? 내려오는 길에도 소나무는 여전하다. 내려올수록 가지는 더 소담하고 남쪽으로 뻗었다. 몇 백년 된 아름드리 소나무도 있다. 소나무를 바라보고 소나무와 함게 걷는 동안 최근의 고민이 어느 정도 정리되는 느낌이다. 가는 데까지 가보는 거다. 우왕좌왕할 일도 아니다. 새로운 세계로 물줄기를 찾아 나설 것이 아니다. 서 있는 자리에서 더 뿌리를 깊이 내리고 더 멀리 뻗어보는 거다.

 

  미이라가 되어버린 등신불에게 아쉬움을 보내는 수도승이 있기는 하다. 등신불이 되어서 미이라가 되어가는  자신을  아쉬워해주는 수도승에게 감사하고, 그것으로 위로 받으며 만족스럽게 육신을 말려버기는 아직 이르다. 수도승들의 아쉬움은 잠시 후면 그냥 잊어버리기 마련이다. 그보다는 주변의 수도승에게 걱정을 끼치지 말아야 한다. 아니, 노익장을 과시하면서 물줄기를 찾아 나서야 한다. 바위틈에서 흙살을 찾고, 한 줌 흙살을 쥐고 물줄기를 찾아 뿌리를 뻗어가야 한다. 하늘을 향한 가지는 햇살을 한 줌이라도 더 받기 위해 더 많은 가지를 뻗어야 한다. 그리고 여리고 젊은 이파리를 만들어 내야 한다. 햇살이 비칠 때마다 연록색으로 말갛게 하늘빛을 담아내는 어린 이파리를 말이다. 절대로 스스로 말라들어갈 일이 아니다. 그냥 미이라가 될 일이 아니다. 마른 다음에는 아무도 적셔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혹 적셔 준다하더라도 그것은 생명의 물이 아니라 나를 썩히는 물이 되어버린다. 그것이 바위 위에서 수천년 생명을 이어온 소나무의 생애이다.

   

  뫼악동 마을로 향하는 내리막길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몇 그루 더 있었다. 어른스럽게 일제 시대의 상처를 새살로 덮어가고 있었다. 그 의연하고 의젓한 보굿이 미덥다. 안부로 내려와서 뫼악동으로 내려가면 시간이 절약되지만, 물레방아 휴게소에 차가 있기 때문에 리기다소나무와 낙엽송의 채종원이 있는 계곡을 걸어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에 우리가 걸은 북바위산 능선에 말 잔등의 갈기처럼 자라난 소나무들을 다시 올려다 볼 수 있는 재미도 있었다.

 줄기 많은 소나무

 빛을 찾아서 부드러운 하늘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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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바위산 이모저모

 

 멀리서 바라본 북바위산

 

  나는 오늘 물줄기를 찾았다. 내가 찾아 나서야 할 물줄기를 찾았다. 그것은 새로운 물줄기가 아니다. 그냥 서있는 자리에서 더 깊이 뿌리를 내리고 더 멀리 뻗어보는 것이다. 있는 힘을 다하여 더 많은 가지를 뻗어 보는 것이다. 그래서 더 많은 햇살을 받아보는 것이다. 더 새로운 생명력을 위하여 젊은 이파리를 피워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맘에 흐르는 강물임을 찾아낸 것이다. 

 

 

내 맘의 강물

                                                         이수인 작사 작곡

수많은 날은 떠나갔어도
내 맘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
그날 그땐 지금 없어도
내 맘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

새파란 하늘 저 멀리
구름은 두둥실 떠나고
비바람 모진 된서리
지나간 자욱마다 맘 아파도
알알이 맺힌 고운 진주알
아롱아롱 더욱 빛나네
그날 그땐 지금 없어도
내맘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
                                                             노래 : 솔뫼

 

 

내맘의 강물 (이수인 작사 작곡, 정태준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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