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답사/등산과 여행

한남금북정맥의 마루금을 밟으며

느림보 이방주 2008. 3. 23. 06:06

큰산에서 바라본 우리가 걸어온 한남금북정맥의 용틀임

 

3월 22일

 

아침부터 맘이 부산하다.

밖을 보니 날씨는 참 좋다.

한남금북정맥 모래재부터 삼실이 고개까지 걷기로 한 날이다.

모래재는 사리에서 괴산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모래재 날망에서 왼쪽으로 보면 산이 보이는데 이 산이 보광산이다.

삼실이 고개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고향인 음성군 원남면 상당리의  진산인 큰산을 넘어가면

원남면 하당리에서 덕생 초등학교 가는 고갯마루이다. 

약 여섯시간은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 반노가리회 회원 셋과

백만사에서 만난 이효정 선생님과 넷이서 처음으로 시작하는

마루금타기라 더 디대가 된다.

나는 두 모임에 다 들어 있어서 내가 주선했다.

 

아침에 오늘 운전을 맡은 신선생에게 전화를 해서 내가 모충교로 나가겠다고 얘기를 했더니 굳이 날 태우러 아파트까지 오겠다고 한다.

아파트 앞 파리 바게트 앞에서 신선생을 만나 수곡동으로 연선생을 태우러 갔다.

법원을 지나 사거리에서 노란 티셔츠를 입은 연선생을 만났다.

그 나이에도 바지와 티셔츠와 태극 마크를 단 빨간 배낭이

마라토너의 몸매를 유지해서 멋지다.

 너무 일찍 나왔다고 계속 핀잔을 하는 연선생 얘기를 즐겁게 들으며

신흥고 앞에서 이선생을 만났다.

 

가는 길이 즐겁다.

증평역에 도착하니 커피 한 잔을 마실 시간도 없이

8시 20분에 출발하는 시내 버스가 있다.

커피향은 즐기지도 못하고 그냥 대충 물 마시듯 마시고 버스를 탔다.

승객은 우리 넷이다.

모래재까지 넷이서 4200원이다.

도안 사거리를 지나 연선생 고향인 사리 불당골을 지나

모래재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8시 45분에 보광산 들머리에 붙었다.

오르막길이다.

길이 좋다.

남향으로 난 언덕배기가 참으로 따뜻하다.

뒤를 돌아 보니 지난 해토머리에 찬바람을  맞으며

질척거리는 진흙에 미끄러지며

내려온 질마재에서 모재재 구간의

한남 금북정맥의 마루금이

거대한 용의 등줄기가 되어 꿈틀거린다.

 

보광사까지 올라가는 길이 가파르다.

그러나 가볍게 올라갔다.

항상 힘들어 하던 신선생의 발걸음이 오늘은 가볍다.

보광사에서 사진을 찍고

봉학사 절터에 올랐다.

 

봉학사는 고려 때 세워진 고찰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시대 김참판이란 사람이

그 절터가 길지인 금계포란형이란 것을 알고 절을 불태우고 자신의 묘자리로 잡았다.

그러나 훗날 지리를 아는 스님이 이를 보고

절터를 불태운 김참판을 미워해서

용머리 뒤에 둔덕을 쌓아 물길을 막아 광중에 물을 괴게 하여

금계가 품은 알이 곯아 새끼를 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나는 '썩을 부'자를 써서 금계 부란형이라고 이름하고 싶었다.

그래서 자손이 무하고 길지를 흉지로 만들었다고 하니

인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잘 말해 주는 이야기다.

 

김참판이라는 이도 역사를 공부한 선비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남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자신의 역사는 내다볼 줄 모르는

물탄 선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봉학사터의 오층 석탑만 그대로 샘물 옆에 세워져 있다.

이 탑에서 봉학사지 석조여래좌상이 나왔다.

그 부처님은 지금 바로 아래 보광사에 모셨다.

 

옆 길을 돌아서 김참판의 묘 뒤쪽 둔덕을 올라 마루금으로 올라섰다.

세상이 온통 시원하다.

예전에 연선생 내외와 우리 내와가 백마사에서 시작해서

계속 눈쌓인 오르막길을 걸어 이곳까지 왔던 일이 생각난다.

그 때 아내가 다리에 쥐가 나서 고생했던 것을 생각하면 끔찍하다.

내 잘못이었다.

 

보광산 정상에서

 

양지쪽 진달래 봉오리가 터질 듯 말듯하다.

마루금은 휘초리들이 얼굴을 휘갈긴다.

왼쪽은 사리이고 오른쪽은 소수이다.

사리로 떨어지는 물은 보광천을 거쳐 미호천으로 흘러들어 금강으로 간다.

소수쪽으로 떨어지는 물은 괴강을 거쳐 남한강으로 흘러들어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만날 것이다.

한 방울 빗줄기도 한강과 금강으로 갈라선다.

우리는 마루금을 떠나 잠시 보광산 정상 바로 아래 헬기장으로 갔다.

도안 증평을 넘어 청주까지 다 보인다.

지난 겨울 세 차례에 걸쳐 우리가 걸어온

선도산 우암산 상당산에서부터 이티재, 질마재, 좌구산, 칠보산. 모래재까지 한남금북정맥의 꿈틀거리는 산줄기가 아련하게 보인다.

 

우리는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

지난 겨울에는 눈길에 미끄러지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면서 천천히 걸었는데

길이 좋아 속도를 더 낼 수 있었다.

 

길은 온통 낙엽이다.

낙엽은 오랜 세월을 두고 썩고 또 쌓여서

발밑에 솜을 재운 것처럼 포근하다.

게다가 낙엽송 낙엽이 진 길은

양탄자 길을 걸어가는 것처럼 부드럽다.

연선생이 앞에서 걸음을 조절하였다.

 

길은

인간이 자연과 만나는 구체적인 흔적이다.

그 발자국들이 모여서 길이 된다.

그 수많은 만남의 자국들을 확인하면서 우리는 살아간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지나간 발자국을 확인할 줄 모르는 사람은

길을 잃게 된다.

자신이 첫 발자국을 내는 의미도 있지만

다른 사람들로부터 길이 아니라는 지적을 받게 된다.

때로는 인간이 가서는 안될 길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인간이 자연과 만나는 발자국들이 모여 길을 이루고

그 길이 모여 역사가 이루어진다.

우리는 그런 길과 역사를 살피면서 나의 길을 선택한다.

때로 휘초리에 맞아 고난도 당하고

때로 눈길에 넘어지기도 하지만

그것이 도리에 어긋나지 않게 살려고 노력한다.

길은 이런 구체적인 길에서 추상적인 삶의 길이라는 뜻으로 의미의 확산을 이룩한다.

 

길은 오늘처럼 순탄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눈길이나 비탈길처럼 험난할 때도 있다.

길에 따라 선택의 방법이 다르다.

엉금엉금 길 때도 있고

나무 등걸에 의지하기도 한다.

내게 주어진 발이 모자라

지팡이를 짚기도 한다.

선택의 순간은 늘 불안하다.

발을 디디는 것도

나무를 잡는 것도

걸음의 속도를 정하는 것도

쉴 자리를 정하는 것도 아닌 것 같지만 늘 불안하고 긴장된다.

 

오늘은 순탄한 길을 만난 덕으로

우리는 떠들며 이야기하며 농담하며

아무런 긴장도 불안도 없이 마루금 밟기를 계속했다.

 

소매리 저수지를 한 눈에 내려다 보며

고리티 고개에 도착했다.

소매리와 소수면 소암리 사람들이 왕래하던 고갯길이리라.

지금은 인적이 끊어져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고갯길에 성황당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소매리 윤씨 댁 따님이 소암리로 시집가서 친정 나들이를 하면서

여기도 돌을 던지며 소망을 빌었을 것이다.

아들을 낳게 해달라기도 하고

친정 부모님 건강을 빌기도 했을 것이고

남편의 시앗을 증오하는 소망을 빌기도 했을 것이다.

그 수많은 소망들이 모여 당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 어린 며느리들의 소박한 소망도 지금은 풀 숲에 묻혀버렸다.

소매리에서 오르는 길이 더 가파르고 멀어서

시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더 무거운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잡초에 묻힌 돌무더기를 바라보니

예전 우리 젊은 아낙네들의 시집살이가 눈에 보이는 듯하다.

 

고리티 고개를 지나

백마산을 왼쪽으로 바라보면서

행티를 향하여 발걸음을 계속했다.

백마산은 소매리의 진산이다.

소매리는 파평윤씨들의 세거지이다.

거기에 백마사라는 절이 있고 백마 초등학교가 바로 거기 있었다.

백마산은 백마가 나왔다는 전설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1649년(인조 27년)에 큰 백마가 나타나서 이 산기슭 일대를 돌아 다니며 살다 죽어 백마산이라 했다 하며, 이 백마의 무덤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농사철에 가뭄이 심할 때면 이 말 무덤위에 맑은 물을 붓고 말무덤을 약간 파헤치면서 농악을 울리면 단비가 쏟아진다는 전설이 있어 백마묘의 봉분은 움푹하게 파헤쳐져 있다. 정상부분에 상독암, 관창암, 장사바위, 맹몽바위, 고깔바위, 상좌바위, 소두방바위, 범바위, 매바위, 쌍동바위 등이 있으며 산의 북쪽에는 백마굴이 있다.

 

십오륙 년전 쯤에 한 밤중에 백마산에 오른 적이 있다.

하늘은 온통 별밭이고

하늘 아래 사람들의 세상은 불밭이었다.

거기 바위에 앉아 소주를 마시며

새벽까지 놀았던 일이 생각난다.

당시에는 참으로 자랑할 만한 낭만적인 일이 었지만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백마사의 진산에서 고기 냄새를 피운 것은 철부지 행위였다.

잘못 걸어 잘못낸 나의 발자국이다.

 

 우리는 쉴 줄을 모른다.

두 시간이 되어서 한 정상에 올라 쉬기로 했다.

우리는 가져온 간식을 내 놓았다.

나는 소곡주, 육포, 두유를 내놓았다.

신선생이 종이를 펴고 가져온 바나나. 이선생이 가져온 포도와 토마토를 내놓으니

한상 젯상이 되었다.

내가 술을 따르고

"오늘 편안한 마루금 밟기를 이루게 해 주십시오."

하고 장난처럼 말했다.

그러나 진심이었다.

음복하듯이 소곡주를 한 잔씩 마시고 바나나를 먹었다.

두 시간의 행군에 뻣뻣했던 다리가 부드러워진다.

 

잠시 우리는 다음 봉우리를 향하여 공격을 계속했다.

임도를 건너고 몇개의 봉우리를 오르고 내리면서

생강나무꽃의 노란 향에 취하기도 하고

고추밭, 인삼밭 두렁을 지나

아주 가까이 마을을 지나기도 하면서

멀리 원남면 보천 마을이 그림처럼 내려다 보이는 한 봉우리에서 점심을 먹었다.

연선생이 준비한 김밥을 내놓고

남은 소곡주를 반주 삼아 먹는 김밥은 꿀맛이었다.

다음 길을 생각해서 양을 줄였다.

거의 다 먹었을 때

이선생이 김치를 내놓았다.

이선생 사모님의 김치 담그는 솜씨는 알아 줄만 하다.

거의 아내 수준이라는 생각을 평소에 하고 있었다.

역시 맛있다.

열무김치와 김장 김치를 두 통이나 싸 왔다.

그러나 김밥을 다 먹은 뒤라 많이 먹을 수 없었다.

 

행티로 내려가서

석공장을 뒤로 하고

음성가는 36번 국도 아래 지하 통로를 통해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생가터를 방문했다.

생가터 주변에는 광주반씨들의 종중에서 세운 많은 기념비들이 있다.

정말 자랑할 만할 것이다.

외교관 중에 최고의 자리에 오른 그 분이 부러웠다.

다 자신이 선택하여 걸어온 길의 결과일 것이다.

나도 내가 걸어온 길의 결과에 만족하면서 살면 된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생가 마을인 상당리 진산인 큰산 공격에 나섰다.

기슭에는 반씨들의 묘지인지 잘 가꾼 묘지들이 있다.

반기문 사무총장은 연선생 어머니와 9촌간이라고 해서 다시 한 번 놀랐다.

반 사무총장과 연선생도 피가 적어도 100CC 쯤은 같은 색깔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세상은 참으로 가깝고도 좁다.

 

큰산은 오늘 걸어온 어느 봉우리보다 가파르다.

높이는 구룡산 두개 쯤 되어 보였다.

시작부터 힘히 부친다는 생각을 했다.

쓸데없는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왠지 내게 아직 남은 힘이 있을까 하고 의심하기까지 했다.

삼분의 이쯤 올라갔는데 갑자기 허벅지가 딱딱해진다.

주무르고 쓰다듬었다.

그냥 걸을 만했다.

또 한참을 올라갔는데

핸드폰 신호음이 울린다.

부산에 가 있는 아내에게서 문자가 오는 소릴 것이라고 짐작하면서도

그거 꺼내 보기가 귀찮았다.

힘이 다한 것인가?

언제나 우리의 걱정을 샀던 신선생은 꿈쩍도 않고 잘 올라간다.

나는 최근 야근을 몇 번 한 탓이 아닌가 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3월 들어 많이 게을러졌다.

새벽 운동도 저녁 산책도 거른 적이 더 많다.

아니 운동을 한 것이 몇 번인가?

게다가 월초에 감기까지 앓았다.

운동은 정말 하루도 쉬지 말아야 한다.

정상 가까이 갈수록 다리에 힘이 빠져 한 발을 내디디기도 어렵다.

그러나 발을 하나씩 옮겨 놓으며 "조금만, 조금만" 하고 속으로 외었다.

드디어 정상이다.

오후 세시,

정상에는 잡목을 베고, 시계 청소를 깨끗이 해서

사계가 훤하다.

남으로 원남면 일대와 북으로 음성읍이 다 내려다 보인다.

멀리 진천까지 내려다 보인다.

보천에는 멀리 제천행 기차가 지나간다.

36번 도로에 자동차들이 귀엽다.

여기서 남은 술을 다 비웠다.

이선생이 가져온 오가피주 한 병도 마저 비웠다.

술맛이 좋다.

그러면서도 나는 계속 힘든 이유를 생각했다.

잠시 우울했다.

 

이제 내리막길이다.

내리막길도 수월하지는 않았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온 것만큼 내리막길도 가파르다.

게다가 길 가의 작은 나무를 다 베어서 손으로 잡을 곳이 없다.

나무를 베어낸 작은 그루터기들이

가딱하면 우리를 공격하는 창 같이 날카롭게 노려본다.

조심 또 조심 하면서 안전지대까지 내려온다.

 

지나온 길은 모두 아름답다.

울창한 소나무, 전망 좋은 봉우리

봉오리 맺은 진달래

노랗게 만발하여 마치 노란 안개가 피어난 것처럼 아름다운 생강나무

그 알싸한 향기.

생강나무는 모두 동백꽃으로 안다.

그러나 그건 김유정이 '동백꽃'이란 소설에서 강원도 사투리로 그렇게 썼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동백꽃이란 그의 작품 제목을 "생강나무꽃"이라고 했다면

무슨 멋이 나겠는가?

동백꽃 노랗게 퍼드러진 산 구렁에서 낙엽 소리 버석이며

점순이와 주인공이 벌인 사랑의 행위를 생각하면 읽는 사람까지 가슴이 뛴다. 

봄은 모든게 일어서는 계절이 아닌가 한다.

 

나에게도 그렇게 일어서는 봄이 되었으면 좋겠다.

힘차게 잘 걸었으면서도

마지막 순간에 잠시 힘들었던 오늘 같은 날이 또 올까 걱정이다.

 

목적지에 거의 다 내려왔을 때 핸드폰 문자가 생각나서 펼쳐 보았다.

역시 아내로부터 온 것이다.

"계속 걷고 있어요?" 였다.

나는

"응"

하고 짧은 답변을 보냈다.

부부 사이에 긴 이야기가 무슨 필요하겠는가?

음성 원남면 하당리 삼실이 고개에 도착하니

4시가 넘었다.

나는 우선 아내의 문자가 생각나서

"끝, 음성 하당리"

하고 보냈다.

바로

"추카추카 여기는 자갈치 시장"

하고 답글이 왔다.

나는 산에서

아내는 바다에서 놀고 있다.

이 정도면 그 집안도 잘 되어가는 집안이 아닌가?

마루금 밟기를 마치고 하당초등학교 멋진 소나무 앞에서 이효정 선생님과

 

하당 저수지를 지나

하당초등학교에서 소나무를 구경하고

36번 국도와 소수에서 오는 37번 도로가 만나는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데

이선생이

"버스다" 하고 소리 지른다.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서 뛰었다.

잡고 보니 증평역으로 가는 버스이다.

버스비는 이선생이 냈다.

1900원씩이라는 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4시 40분쯤 되었다.

삼실이고개에서 하당까지 뒷걸음으로 걸어온 길도 오리가 넘는 것 같다.

정말 오늘은 기막히게 버스 시간이 잘 맞는다.

만보기를 펴보니

34,586보이다.

많이 걸었다.

쉬거나 점심 식사 시간을 빼면 여섯 시간을 넘겨 계속 걸은 것 같다.

 

청주에 도착해서

금천고에서 가르친 쌍동이 자매 아롱이 다롱이 엄마가 운영하는

신흥고 앞의 뽕잎손칼국수 집에 들러

파전과 소주 한 병, 칼국수를 먹으며

다롱이 엄마의 그동안 살아온 얘기를 들으며

가슴이 찡하도록 그 분의 삶에 감동하였다.

그녀석은 나보고 큰아빠라고 불렀다.

그 애 아빠도 딸내미가 큰아빠라니 자기는 형님이라고 부르는게 당연하다면서

나를 형님이라고 불렀다.

 

저녁값을 내니 받지 않는단다.

아이들 큰아빠한테 어떻게 밥값을 받느냐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배부르게 먹은 음식 값을 어떻게 내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러면 다시는 오지말란 말이냐니까

할 수 없이 받는다.

맞아, 안 받으면 이제 거길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한다.

사실 서로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네 인정이 아닌가?

 

시내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오늘 산행은 자연과 만남이라는 의미보다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이라는 의미가 더 깊다.

 

가슴이 후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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