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답사/등산과 여행

희양산과 은티마을

느림보 이방주 2008. 4. 13. 15:23

2008. 4. 12.

 

  토요일이다.

  4월 둘째 주를 고대했다. 이 좋은 계절에 휴일이 3일이나 되기 때문이다. 지난 9일은 18대 국회의원 선거일이었다. 아침 일찍 투표를 마치고 충남 보령의 아미산에 갔었다. 비를 맞으면서도 지천으로 핀 진달래를 보면서 흥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꽃이 좋은 것은 마냥 좋아할 일만도 아니다. 꽃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내가 시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조락하는 나이를 맞으니 꽃이 아름답고, 자연이 한없이 좋고, 아이들이 예뻐 보이는 것이다. 그날도 함께 했던 백만사 대장님의 글에 의하면 꽃에 취하고, 술에 취한 날이다. 나는 솔직히 고백하면 사람에게 더 취했다.

  희양산 주변 등산 안내도

 

  오늘은 단촐하게 아내와 둘이서 희양산에 가기로 했다. 일요일에는 비가 온다기에 아예 토요일에 다녀오고 일요일에 쉬는 것이 현명할 것 같았다. 희양산은 오래 전에 한 두 번쯤 올랐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최근에 가 보지 못해 그 기억이 아물아물하다. 몇해 전 봉암사에서 올려다 본 희양산이나, 바로 옆의 구왕봉(898m)에서 바라본 희양산이 얼마나 환상적이었는지 모른다. 그 때 구왕봉에서 지름티재로 내려와 바로 희양산에 오르려고 했었다. 그런데 은티에서 봉암사로 넘어가는 지름티재는 마치 비무장지대처럼 목책으로 가로막고 스님이 지키고 있었다. 포기하고 내려왔었다. 이듬해 봄에 친구 내외와 함께 다시 올라가려고 했으나, 그날은 구왕봉으로 올라가는 길목부터 스님이 나와 가로 막고 있었다. 그래서 포기한 후로 가지 못했다. 연풍에 2년간 근무하는 동안도 한 번도 오르지 못했다. 떠나와서 두달 가까이  되자 연풍이 그립기도 하고 희양산을 가보고 싶기도 하여 출발을 서두르게 되었다.

 

  은티 마을은 연풍면 주진리에 속한다. 연풍 소재지에서 천주교 성지를 지나 연풍초등학교 앞을 지면 분지로 가는 길과 은티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에서 오른쪽으로 핸들을 돌리면 사과밭을 왼쪽에 두고 고속도로 아래 지하통로를 통하여 중리를 거쳐 은티에 이르게 된다.

  입구에서 본 은티마을

 오늘은 아예 은티 마을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마을 입구에서부터 원칙대로 지키면서 산에 오르기로 했다. 집에서 8시 50분경 출발하였다. 시외로 나가는 차들이 많아 속도를 낼 수가 없다. 은티 주차장에 도착하니 10시 20분이었다. 주차비를 2000원을 받는다. 마을에서 받는 것인지, 군에서 받는 것인지 따지고 싶지 않았다. 은티 마을은 작년까지 자주 오던 곳이라 낯설지 않다. 그래도 입구의 소나무숲이나 남근석이 새롭다. 백두대간 쉼터라고 써붙인 주막인 성수네 집은 오늘도 대간꾼들의 집결지인 모양이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다.

  

   

  백두대간 쉼터인 주막집 : 능이와 돼지고기를 넣은 두부찌개 맛이 일품이다.

 

  은티마을은 예전 이름은 의인촌(義仁村)이었다고 한다. 이 의인촌이라는 이름을 왜놈들이 아주 싫어했다고 한다. 그래서 은티라고 바뀌어 지금까지 내려온다니 그렇게 기분 좋은 이름은 아니다. 하긴 한말에 의병들이 희양산을 근거지로 삼았었다고 하니 의인촌이라는 이름이 왜놈들 마음에 들 리 없을 것이다. 의인촌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입구에는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어 그 운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게다가 가을이면 마을에서 사과향이 풍겨나니 정말 살만한 동네인 것이다. 그러나 어디고 헛점은 있는 것이다. 백두대간인 악희봉, 마분봉, 구왕봉, 희양산, 시루봉, 이만봉이 빚어낸 이 마을은 그 형상이 꼭 여근의 모습과 같다고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마을 앞에서 바라보면 꼭 그 모양이다. 그래서 여궁혈(女宮穴)이라고 한다. 남성이 여궁에 들면 죽어야 나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그래서 여궁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서 마을 입구의 숲에 남근석을 모시고 1년에 한 번씩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남근석의 모습이나  그 이야기가 얼마나 얼마나 낭만적인지 모른다.

  마을 남성들의 수호신 남근석 : 과연 女氣를 누를 만하다

 

  마을 앞 다리를 건너 수렛길을 따라 올라갔다. 예전에는 비포장 도로였으나 지름티재로부터 수해를 입은 몇해 전에 보수를 하고 시멘트 포장을 해서 지금은 승용차도 다닐 정도이다. 지금은 길가에 팬션이나 부자들의 별장이 몇 채 들어섰다. 길가 사과밭에는 벌써 가을의 수확을 위한 준비가 한창이다. 은티의 사과맛은 전국에서도 알아준다.  소나무 숲으로 수렛길은 계속된다. 소나무 숲에 진달래가 불을 붙인다. 잘 타는 아궁이 속 같다.

잘 다듬은 등산로

 

  지름티재로 오르는 길과 성터로 오르는 길의 갈림길에 이르러 성터 쪽을 택했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가씨 두 명이 지름티재 쪽으로 오른다. 아마도 못 올라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님들이 지키고 있을 것이 뻔하다. 등산로는 공사를 새로 했는지 말끔하게 정비되었다. 몇해 전에 물에 씻겨 무너져 내려서 바라볼 수 없었던 험한 길은 간 곳이 없다. 갈림길에서 성터 쪽으로 가는 오솔길도 포근하기 짝이 없다. 사람들은 이미 산으로 다 올라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아주 천천히 걸었다. 그러나 쉬지 않았다. 아내가 많이 피로해 했다. 산죽과 진달래와 계곡의 물이 선경을 이룬다.

 갈림길에서

 갈림길에는 이정표가 있고 정자각까지 세워 놓았다. 울긋불긋한 표지기가 수없이 매달려 있어 희양산의 명성을 대신 말해 주는 듯하다. 누군가 나무에다가 수리봉 가는 길이라고 종이에 써서붙여 놓았다. 이곳에서 성터로 오르면 성터에서 수리봉과 희양산으로 갈라진다. 거기가 곧 백두대간의 마루금인 것이다.

 

  오솔길을 걸어 내려가 작은 도랑을 하는 건너니 산죽이 파랗게 깔려 있다. 산죽은 조릿대라고도 하는데 그 이유는 이것으로 조리를 만들기 때문이다. 산죽이 무엇으로 쓰이는지 내게는 상관이 없다. 그 파릇한 생명력만이 눈에 보배다. 산죽 사이로 키 큰 진달래들이 산을 덮었다. 군데군데 시들어가는 생강나무꽃도 아직 남았다. 산은 골짜기마다 온통 빛깔의 교향곡이 울려 퍼지는 듯하다. 희양산 진달래는 다른 산보다 더 붉다. 진달래로 하여 산은 흡사 질그릇을 굽는 가마 속 같다. 봄의 향연을 향하여 아내는 계속해서 핸드폰 카메라를 터트린다. 담아가면 무엇하리. 작년보다 더 꽃을 좋아하는 아내가 안쓰럽다. 

  성터로 오르는 길에 진달래꽃

  잡목 사이로 소나무가 멋있다. 봄을 맞은 소나무들은 더 가까이 보인다. 솔잎이 빛깔을 더하기 때문이다. 주변에는 온통 지난 가을 벗어버린 낙엽의 천지인데 소나무의 푸른 색은 고고하기만 하다. 이곳의 소나무들은 그 줄기가 유난히 붉다. 모두가 적송인가 보다. 붉은 빛이나 푸른 빛이나 온통 생명의 빛이다. 가지가 축 쳐진 소나무는 그 고고함이 더하다. 그래서 낙락(落落)이라 했는지도 모른다. 하늘을 향하여 치솟는 다른 나무들의 가지에 비해 겸손해서 좋다.

 

  희양 폭포는 그 명성만큼 훌륭하지 못하다. 그저 포개진 두 조각의 돌에서 물이 졸졸 흐를 뿐이다. 이에 비하면 신선암봉의 마당바위 폭포는 대단한 장관이다. 그래도 성터로 오르는 계곡의 운치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우선 오솔길이 포근하다. 포근한 오솔길 가에는 기암기석이 웅장하게 볼거리를 제공한다. 숲이 깊다. 알맞게 땀이 난다.

희양 폭포

 

  마지막 오름길이 가파르다. 아내는 힘겨워한다. 산을 잘 따라다니고 오히려 나보다 앞서던 아내가 지난번 아미산 등산 때부터 유난히 힘겨워 한다. 체중이 늘어난 것도 아니고, 평소에 운동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지 모른다. 겨우겨우 기다리면서 오르막길을 오르니 아주 가까이에 성의 모습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 위에 사람들이 보인다. 모두 희양산 쪽에서 시루봉으로 바쁘게 걸어간다. 이제 예전에 오를 때 숨가쁘던 기억이 떠오른다. 성터에 오르자 바람이 휘몰아친다. 멀리 봉암사 쪽에서 희뿌연 구름이 몰려온다. 바람이 너무 세차서 바로 방풍 자켓을 꺼내 입었다.

 

  희양산성을 오르면 바로 발 아래 봉암사가 내려다 보인다. 이 산 성은 누구의 산성인가? 아마도 견훤의 군대와 신라의 군대가 마주쳤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견훤의 탄생지이 가은이니 가은을 탈환하려고 무진 애를 썼을 것이다. 그러나 봉암사에 은거한 신라의 군대는 여기서 견훤을 대파하였을 것이다. 산세가 그렇다. 연풍 쪽은 깎아지른 절벽이고, 가은 쪽은 완만한 산죽이다. 신라의 군대처럼 바람은 더욱 세차게 분다. 바람에 산죽이 쏜살같이 달려든다. 우수수 연풍 쪽으로 돌이 구른다. 내 상상이 틀려도 좋다. 이제 그 역사를 알아 무엇하겠는가?

 

희양산성

 

  아내는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다고 걱정을 한다. 나는 비가 오면 얼마나 오겠느냐고 아내를 재촉했다. 능선길이 가파르고, 찬바람이 휘몰아치고, 해토머리에 풀린 땅이 질척거린다. 질풍처럼 내려닥치는 대간꾼들의 검은  바지는 온통 흙투성이다. 지름티재로 올라간 두 아가씨가 벌써 내려온다. 지름티재를 무사히 통과했는 모양이다.

  칼날 같은 바위 능선을 걸어 암벽에 뿌리를 내리고 오랜 세월 비바람을 겪은 소나무들의 열병식을 받으니 질척거리는 땅도 보이지 않는다. 연풍을 바라보나 봉암사 쪽을 바라보나 어지럽기는 마찬가지이다. 깎아 지른 절벽이다. 하얗게 바래진 암봉들이 무섭게 서 있다. 멀리 보이는 시루봉도, 그리고 봉암사의 모습도 아련하기만 하다. 날씨가 좋지 않아 희뿌옇다. 그러나 세상을 어찌 밝게만 볼수 있을까? 모두가 오리무중이 아닌가? 하긴 보인다고 다 보이는 것은 아니니까.

희양산에서 내려다 본 가은 봉암사 계곡

 정상은 구왕봉에서 바라볼 때나 봉암사에서 바라보는 것만 못하다. 그렇다. 훌륭한 것은 멀리서 바라볼 때 아름답다. 멀리서 볼 때 위대하다. 가까이 올라서 정상을 디디고 바라본 희양산은 그 진면목을 찾을 길이 없다.  더구나 정상에는 정상석도 없다. 이 산이 선승들의 수도 사찰인 봉암사의 진산이라 봉암사에서는 사람들이 오가는 것을 꺼리는 산이라 그런가 보다.  그러나 백두대간의 마루금이니 사람들이 그칠 리가 없다. 정상에 꼭 정상석이 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정상석이 없다고 해서 정상이 아닌 것도 아니지 않는가? 등산객이 만들어 놓았는지 돌에 희미하게 희양산이라 써 놓은 작은 돌탑이  있었다. 그러나 998m이라는 자랑스러운 숫자는 보이지 않는다. 그 앞에서  아내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정상에서  : 정상석이 초라하다

  봉암사 계곡이 내려다 보이는 평평한 바위 위에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내려오는 길은 아가씨들이 왔을 것 같은 지름티재로 오고 싶었지만, 아내가 많이 피곤해 해서 성터로 돌아 온길을 되짚어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에 어떤 젊은 사람이 갑자기 진흙에서 뒹굴었다. 아내가 아마도 다리에 쥐가 났을 것이니 빨리 가서 맛사지를 해주라고 한다. 쫓아가 보았다. 허벅지부터 장딴지까지 고사목처럼 딱딱하다. 주무르고 비비기를 한참 한 후에 겨우 풀렸다. 성에서 바로 내려서자 바람 불던 세상은 온화하다. 따뜻하다. 스틱의 길이를 늘이고 조심스럽게 비탈길을 내려섰다. 내려오는 길은 골짜기 온화한 기운을 느끼며  바위에 쉬기도 하고 사진도 찍으면서 여유있게 걸었다.  시간이 많이 남았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2시 20분이다. 신발을 바꿔 신고 바로 출발했다.

 

  연풍은 장날이다. 평온한 옛날 그대로다. 학교를 한 바퀴돌았다. 내가 살던 사택도 그대로다. 내가 드나들던 현관 뒷문도 그대로다. 점심먹으로 드나들던 급식소 현관문도 그대로다. 모두가 그대로다. 희양산(998m)을 바라보니 그대로다.  집에 돌아오니 포근하기 그지없다. 연풍 양돈조합에서  삼겹살이라도 먹고 싶었는데, 너무 이르다. 그냥 김치찌개거리를 사왔다. 오랜만에 솜씨를 발휘했다. 맛은 옛맛 그대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