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 11일
80년대 초, 나는 지금은 물에 잠긴 구단양읍에 있는 단양여고에 근무했다. 아이들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인데, 퇴근 무렵이면 멀리 금수산의 환상적인 낙조를 바라볼 수 있었다. 언덕 위의 하얀집으로 불리던 단양 여고에서 집으로 향하는 언덕길을 내려오노라면, 붉게 타오르는 하늘 아래 풍만한 여인이 누워 있었다. 그것은 바로 멀리 바라보이는 금수산의 모습이었다. 약간 불거져 나온 이마 아래로 비스듬이 미끄러져 내려오다가 오똑하게 솟은 코, 그리고 뚝 떨어지는 턱, 도도록한 어깨선을 타고 내려가다보면 풍만한 젖가슴에 다다른다. 영락없는 젖가슴이다. 그리고는 미끄러지듯 달려 멀리 북쪽 하늘 아래 어여쁜 엄지발가락이 솟아 올랐다. 푹 퍼진 엉덩이와 엉덩이 사이의 삼각지까지 미녀가 평안히 잠든 모습 그대로다. 노을은 점점 활활 타오르고, 산 빛이 시나브로 어둑해지면 미녀의 S라인은 점점 더 뚜렷해진다.
멀리서 바라보면 미녀의 모습인 금수산 바로 아래에서
그 산을 금수산이라 했다. 그런데 그 환상의 산 아랫마을에서 유학온 학생이 있었다. 군청 소재지가 수몰되고 학교가 신단양으로 이전한 후, 그 학생 삼촌의 안내로 비내리는 8월 15일 동료 두명과 함께 금수산에 올랐다. 정상에 오르는 순간 모든 환상은 깨어졌다. 미녀의 오똑한 코에는 바윗돌과 잡목이 우거지고, 툭 불거진 이마위에는 국방부의 삼각점이 박혀 있었다. -1016m - 환상이 무너져 버릴 것을 알면서도 미녀의 젖가슴을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풍만한 젖가슴도 바위 위에 소나무가 몇 그루 서 있는 것 뿐이었다. 우리는 비를 흠뻑 맞은 채 진흙에 미끄러지며 산 아래로 내려왔다. 그러나 멀리서 바라보면 볼수록 금수산은 여인의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2003년 5월 18일에 또 금수산에 올랐다. 그 때는 이미 수산에서 상천리를 거쳐 능강마을을 지나 청풍으로 통하는 도로가 개통되어 상천리의 절경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그 사이에도 몇 번 오른 일이 있었지만 그날의 금수산 등산이 뜻깊은 것은 만개한 철쭉을 만났기 때문이다. 정상 부근에는 이미 사람들이 엄청나게 모여들었고, 바로 아래 언덕에는 키큰 철쭉이 활짝 피어 녹음 속에 조화를 이루었다. 유명하다는 소백산 철쭉과는 다르게 키가 크고, 짙은 꽃이 피었다. 가끔씩 하얀 철쭉이 섞여 있어서 더욱 아름다웠다. 그 때 그 아름다움을 잊을 수 없었다. 그 철쭉의 영상이 머릿속에 그리움으로 남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사랑하는 백만사 산행지로 금수산을 선택하였다. 2003년보다 계절이 더 빠르다 생각되어 일주일을 앞당겨 11일로 정하였다. 여자분들이 산행을 쉽게 하기 위해서 적성면 상리에서 출발하여 수산면 상천리로 하산하기로 했다. 하산길에는 망덕봉을 지나면 좀 길이 좀 험하기는 하지만, 거기서 독수리 바위나 쪽두리 바위를 볼 수 있고, 그림같이 펼쳐지는 청풍호를 바라볼 수도 있다. 상천리를 다 내려오면 용담폭포가 있으며, 가은산의 아름다운 녹음을 조망할 수 있다.
상리까지 가는 길은 예전과 다르다. 시내 버스가 먼지를 날리던 길은 이미 옛날 이야기이다. 춘천을 기점으로 원주를 거쳐 대구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와 만나는 중앙고속도로가 개통된 이래 단양 제천의 산들은 거의 쑥밭이 되고 있다. 아름다운 금수산이나, 사람 발길이 닿지 않던 제비봉, 둥지봉, 가은산, 말목산에 마당이 생겼다. 이 중앙고속도로의 나들목이 바로 적성면의 입구인 매포의 대가리에 있다. 그래서 금수산은 서울이나 경상도나 전라도에서 하루에 얼마든지 다녀갈 수 있는 거리가 되어 버렸다. 단양군에서 관광지를 조성해 놓고 손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각종 시설을 갖추었지만, 즐비한 토종 음식점들에 들러 밥을 먹고 가는 손님은 아무도 없다. 주차장만 무료로 제공하는 것이다.
금수산 들머리의 소나무와 성황당
이효정 대장의 차를 상천리에 두고 되짚어 고개를 넘고 구비를 돌아돌아 또 고개를 넘어 몇 번이나 무쏘의 엉덩이가 흔들흔들 춤을 춘 다음에 상리 주차장에 도착하니 12시가 다 되었다. 급하게 뒷간을 찾아 잔뜩 간장한 아랫배의 물꼬를 트고 배설의 쾌감을 만끽했다. 일행은 이미 멋진 소나무 아래 걸음을 재촉한다. 오랜만에 와 보는 입구는 많이 정비되어 있었다. 도로도 포장 되고 주변의 집도 깨끗하다. 옛날에는 자연 수목만 우거졌는데 적단풍나무, 연산홍, 흰철쭉 등 인위적 조경이 눈길을 끈다. 자연 그대로 두면 안되는가 하고 조금 원망하는 마음도 일었다. 그러나 또 그냥 자연 그대로 두면, 이 따위로 해 놓고 관광객을 부르나 하고 투덜댈 것이다.
백만사 회원들 등산 대장님이 빠졌네요.
금수산 입구의 커다란 돌탑이 있고 금수산 유래를 적어 놓았다. 비문이 이미 흐릿하게 마모되기 시작해서 읽기가 쉽지 않았다. 눈을 씩고 읽고 또 읽으니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금수산 유래
금수산(錦繡山)은 원래 백악산(白岳山)으로 불리었으나 퇴계 이황 선생이 단양군수로 재임시 가을 단풍의 경치가 마치 비단에 수를 놓은 것 같다 하여 비단 금(錦)자에 수놓을 수(繡)자를 써 금수산(錦繡山)이라 이름을 바꾸었다고 전해진다. 해발 1016m주봉에 오르면 남서(南西)로 남한강의 충주호가 그림처럼 휘감아 돌고, 동(東)으로 소백산(小白山)이, 남(南)으로는 월악산(月岳山)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의 끝자락에는 말(馬)의 목을 닮았다 하여 말목산은 깎아지를 듯한 암벽과 충주호의 비경이 어우러져 천하의 절경을 이루며, 특히 이곳의 단풍은 금강산을 방불케 한다. 금수산은 산의 형상이 마치 미녀가 누워있는 것처럼 이마, 코, 턱, 가슴, 발등의 모습이 뚜렷하여 보는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하며 성리학의 대가인 역동(易東) 우탁 선생 등 많은 인재를 배출한 12품달촌(品達村)이 내려다 보이는 이곳에서 신혼부부가 초야(初夜)를 치르면 귀인(貴人)을 출산(出産)한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1999년 10월 17일 탐험가 최종열과 함께하는
제 1회 금수산 강골 단풍축제를 기념하여 이 비를 세우다.
미녀의 모습을 한 금수산에 더 많은 전설이 있을 법한데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없다. 대개 여신이 지배하는 산은 그 산세가 더 아름답고, 남성에 대한 원한이 담긴 흥미진진한 이야기까지 품고 있게 마련이다. 또 금수산에서 마주 보이는 봉우리가 망덕봉이라 하니, 그 이름의 의미가 심장하여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든다. 그 너머 상천리로 흐르는 용담 폭포와 어울리면 이야기 한 편은 금방 이루어질 것만 같다.
남근석 공원의 초입을 지키는 옥문 모양의 조형물
남근석 공원의 남근석과 장승
거기서 조금 더 올라가니 남근석 공원이 있다고 한다. 일행이 지름길로 가겠다는 것을 우겨서 공원을 들르기로 했다. 왜냐하면 미녀산과 남근석이 또 한 편의 이야기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남근석공원의 입구에는 입구를 표하는 것인지 외로운 남근석을 달래기 위한 것인지 커다란 여성의 엉덩이 모양의 조각이 있다. 그 생김새로 보아 그냥 엉덩이라기보다는 옥문(玉門)이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 맞은 편에는 거대한 남근석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그 작품이 돌을 깎은 것인지 시멘트를 부어서 만든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예술성도 사실성도 없다. 크게 실망했다. 다만 주변에 새로 깎아 세운 듯한 귀두(龜頭)모양의 머리를 한 장승 만이 공원의 체면을 유지하고 있다. 앞에 남근석의 유래 비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남근석 유래
금수산은 여인이 누워 있는 자태 속에 계절별로 절경을 자아내는 곳이나 여자의 지근이 강하여 남자는 단명한다는 유래에 따라 오래전 남근이 설치된 이곳 품달촌에서 신혼부부가 초야를 이루면 귀남을 낳고 득남하지 못한 여인은 남근석에서 마음을 가다듬으면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으나 이조 말엽에 파손되어 다시 복원하게 되었다.
2001년 8월 15일
적성면 주민 일동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안타까웠다. 여자의 지근이 강하여 남근석을 세웠다면 남근석 앞에 왜 그렇게 엄청난 옥문을 만들어 놓았는가 하는 것이다. 아무리 현대화해서 장난스럽게 만들었다 해도 옛 것을 복원하는 것이니 만큼 이치에는 맞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기(女氣)가 강해서 여기(女氣)를 누르기 위해 거대한 남근석(男根石)을 세웠다면, 그 다음에 단명했던 남자들이 더 오래 살았다든지 하는 결과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엉뚱하게 신혼부부가 초야를 이루면 귀남을 얻고, 득남하지 못한 여인이 득남할 수 있다는 것은 빗나간 결과라고 생각되었다. 또한 이조라는 말도 마음에 걸렸다. 돌에 새기는 글은 그 글을 쓴 사람이 자신의 수명보다도 더 오래할 글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상 부근에서 바라본 청풍호와 상천리 가은산 멀리 월악영봉이 보인다.
더덕은 그 싹을 건드리면 특유의 향기 난다. 누가 건드렸는지 더덕 냄새가 진동한다. 짙은 더덕냄새를 맡으며, 너덜을 지나고 돌길을 건너 뛰며 정상을 향하는 안부에 올랐다. 이 안부는 미녀의 머리 부분과 가슴 부분을 나누는 목에 해당된다. 미녀의 목덜미를 가까이서 더듬어보니 부드럽지도 향기롭지도 않았다. 걱정했던 철쭉꽃만 바위 틈에서 피어나 널부러졌다. 멀리 청풍호 한 폭의 비단처럼 펼쳐진다. 청풍호를 건너 가물가물 월악영봉이 손에 잡힐 듯하다. 상천리의 안산인 가은산 줄기는 몇 번이나 오르락 거렸는가?
정상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한다. 정상을 이루는 바위는 미녀의 콧등이다. 그 오똑한 콧날에 정상석을 박았다. �지 않도록 약품처리한 널판지로 얼굴을 덮어 마루를 놓았다. 마루에는 비딜틈도 없이 사람들이 가득하다. 나도 별수 없이 거기 기다려 섰다가 사진을 찍었다. 우리가 돌아갈 망덕봉의 녹음이 푸르른 비단이다.
하산로인 망덕봉의 녹음
그 때 그 철쭉을 바라보는 여인
하산길에 만난 하얀 철쭉
정상의 사람들을 피하여 점심 먹을 자리를 찾았다. 상리에서 올라오는 길의 안부인 여인의 목덜미를 지나 "탐방로 아님"표지를 넘어서 바위를 밟고 줄을 당기며 미녀의 젖가슴으로 올라 갔다. 제법 피어난 철쭉이 아름답다. 여기에 하얀색 철쭉도 있다. 키가 크다. 초록이 짙은 키 큰 나무에 소복한 하얀 꽃이 대조적이다. 그래서 더 아름답다. 이효정 대장님이 어느새 점심 먹을 자리를 찾아내었다. 빙 둘러 철쭉이 우거진 아지트다. 사실 거기는 미녀봉의 젖가슴 어디인가이다. 밥 맛이 좋아 과식을 했다.
미녀봉에서도 기죽지 않은 백만사 네 사나이
하산길에서 내려다 본 독수리 바위, 쪽두리 바위, 청풍호
상천리 마을 유래비
내리막길은 항상 조심스럽다. 무릎을 조심해야 한다. 바위가 아니면 마사이다. 바위 위로 난 길은 잃어버리기 쉽다. 바윗틈과 절벽을 지나 나무 등걸을 잡고 기어내리기도 하면서 용담폭포로 하산했다. 바윗돌 위를 거니는가 하면 소나무를 잡고 건너 뛰고 숲을 지나 용담 폭포에서 쉬어 상천리로 내려왔다. 다른 사람들이 천천히 걸어 내려 오는 동안 대장님과 나는 서둘러 상리에 가서 거기 세워둔 내 차를 끌어 왔다.
대개 우리나라 마을은 깊숙한 골짜기에 조용하고 포근하게 형성되어 있다. 산골짜기를 벗어나 들로 내려선 마을은 흔치 않다. 그런데 산골짜기가 품고 있는 마을의 터는 대개 여궁의 모습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런 모습이 또 안락하고 포근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산골짜기가 형성하는 마을이 남근의 모습을 할 수 는 없는 일이 아닌가? 풍수에서 말하는 명당도 대부분이 여궁의 형상이다. 그런 모양의 산야에 우리는 평안함을 느낀다. 사실 인간의 영원한 고향이 아닌가? 살아 있을 때나 죽어서나 변할 수 없는 그리움의 대상이다. 버릴 수 없는 우리의 안식처이다. 결국 돌아가는 곳도 그곳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 민족은 참으로 자연을 보는 눈이 남다르다는 것을 발견한다. 자연에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려고 하는 점이다. 그렇게 본다면 금수산은 어느 산에서도 찾을 수 없는 여인의 모습 그대로이다. 상리에서 보는 산의 형상과 상천리에서 보는 산의 형상이 다르기는 하지만 말이다.
동양 사람들만 자연에서 인간의 모습을 찾으려고 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괴테는 진정한 인간은 가장 자연적인 인간이라고 했다. 그의 이야기는 자연을 닮은 인간이 인간다운 인간이라는 말이다. 자연의 법칙을 따르고 자연에 순응하는 인간이 진정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과연 자연을 얼마나 닮고 있나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겨울에 수박, 오이를 먹고, 상추쌈을 즐겨 먹는 것도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행위이다. 베르베르는 개미와의 대화할 수 있는 자연적인 진정한 인간은 지구상에 없다고 했다.
중국의 장자나 노자만이 자연으로 돌아가기를 권한 것은 아니다. 루소도 자연을 원했고, 우리 조상들도 자연을 원했다. 금수산은 퇴계 선생이 지은 이름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면 이 근처의 상천, 수산, 한수, 금성, 적성, 송학, 장회 등의 이름들이 모두 자연의 모습이다. 오늘 우리가 돌아본 자연은 아름다웠다. 그 가운데 거의 자연의 모습을 보여준 여인들의 모습이 근래 보기 드믈게 아름다웠다. 오늘 산행은 철쭉과 녹음도 좋았지만 함께 간 아내들의 행복해하는 모습이 더 아름다웠다. 운전이 만만찮은 거리이고 험한 길이었지만 아름다운 아내들의 모습에 힘드는 줄 몰랐다. 연풍에서 저녁을 먹고 밤길을 달렸다. 길은 이렇게 환하게 뚫려 있다.
산은 인간을 아름답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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