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은 이타적 소신공양의 과정을 그린 명작이다. 이 작품에서 생모의 탐욕에 절망한 ‘조기’라는 어린아이가 출가하여 ‘만적’이라는 수행자가 되고, 착하기만 했던 헤어진 이복동생이 한센 병에 걸려 고통 받는 것을 보고 인간의 근원적 고통에 대하여 번뇌한다. 그래서 소신공양을 통하여 인간의 근원적 고통을 용서받고자 한다. 결국 만적은 자신의 몸을 불태우는 상상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부처로 거듭난다. 만적의 수행과정을 이야기로 들으며 세속적 욕망의 질곡에서 방황하는 현대의 또 다른 주인공이 깨달음을 얻는다.
민족혼의 중심에 육백여년이나 꿋꿋이 서있던 숭례문도 ‘등신불’처럼 그렇게 장엄한 의식을 치루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대들보도 서까래도 검은 잔해가 되어 뒷말이 없다. 기왓장도 떨어져 나뒹굴었다.
숭례문은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해 세운 것이다. 세로로 세운 현판, 용마루에 동서로 얹은 치미(鴟尾)가 그렇다. 치미는 용의 머리 모양인데 도면을 보면 용의 눈썹 부분을 또 용의 모습으로 그렸다. 용은 물을 상징하므로 화마로부터 서울을 방지하려는 조상들의 간절한 염원을 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라든지 아름다운 단청은 어려운 백성에 대한 자비의 정치를 소망하는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조상들이 건축물에 담은 정신적 깊이에 탄성을 지를 만하다. 홍예문은 그대로고 현판도 건졌지만, 치미는 용마루와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다.
우리는 숭례문의 소신공양으로 문화재의 소중함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일부 생각 없는 이들이 담을 치고, 굴삭기로 파헤치고, 서로 책임을 전가하는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은 참혹한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꽃을 바치고, 삼배를 올렸다. 숭례문이 스스로를 불태워 국민을 깨우친 것이다.
방화용의자는 억울함을 호소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관리에 소홀한 것은 모든 국민이고, 그는 숭례문이 소신공양으로 천지신명에게 속죄하고자 하는 뜻을 짐작하고 불만 붙여준 것인데, 자신만이 처벌받는 게 억울하기도 할 것이다. 후안무치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말도 거꾸로 생각해 보면 우리의 반성을 촉구하는 말이다.
이제 새 대통령이 취임했다. 실용주의를 표방하는 새 대통령의 취임으로 자칫 풍요로운 생활만 추구하는 정책으로, 숭례문의 공덕이 헛되이 되지 않을까 염려된다. 옛말에도 ‘잘 먹고 잘 산다.’란 말이 있다. 잘 먹는 것은 물질적 풍요를 말하겠지만, 잘 산다는 것은 품격 높은 문화의 고양을 의미할 것이다. 새 대통령은 예로부터 문화를 소중히 하고 정신적 가치를 추구한 민족이 풍요를 누린 역사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반성해야 한다. 언론은 환란을 미리 말하지 못한 것을, 공무원은 미리 관리하지 못한 것을, 소방관은 미리 대비하지 못한 것을 반성해야 한다. 선생은 미리 가르치지 못한 것을, 지나가던 사람은 그냥 지나친 것을 반성해야 한다. 서로를 욕하고 헐뜯고 미워하고 짓씹어댄 지난해를 반성하고, 청정해안에 기름을 쏟아 부어 삶의 터전을 멍들게 한 우매함을 반성하고, 백두대간을 허물겠다는 막말을 반성하고, 영어몰입교육으로 어린 아이들의 얼을 서구식 사고로 도배하겠다던 어리석음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밥과 풍요를 위하여 제살을 베어내고 뼈를 깎고 영혼을 도금하겠다는 발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제 서울의 화기를 억누르고 어려운 백성에게 자비를 베풀었던 숭례문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불타는 숭례문의 하늘에 원광이 비치듯 그 깨우침은 우리 가슴에 오롯한 영혼으로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2008. 2. 23.)
충청투데이 오피니언 칼럼 게재(2008.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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