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과 서재/완보 칼럼

도편수의 예지

느림보 이방주 2007. 12. 13. 07:54
 

어느 스님이 도편수를 구하여 절집 건축을 맡겼다. 그런데 도편수는 두어 번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곰곰이 생각하더니 톱을 들고 목재를 자르기 시작했다. 도편수는 목재를 긴 것, 짧은 것 등 길이대로 잘라서 쌓아 놓았다. 며칠이 지나도 그 일만 계속했다. 의아하게 생각한 스님은 도편수를 시험해 보기 위하여 짤막한 나무토막 하나를 숨겼다. 이튿날 도편수는 연장을 주섬주섬 싸기 시작했다. 하산 준비를 한 것이다. 스님이 그 까닭을 물었다. 그랬더니 절을 지어봤자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기는 꼴이 될 테니 절을 지어 무엇 하겠냐며 막무가내였다. 도편수는 머릿속에 이미 설계도를 그려 놓고 절집에 필요한 목재를 크기에 따라 마름질했던 것이다.

 

스님은 자신의 장난 섞인 실수를 뒤늦게 뉘우치면서 며칠을 두고 달래고 빌어서 겨우 붙잡아 놓았다. 도편수는 묵묵히 대웅전을 완공했다.

 

도편수는 산을 내려가면서 쇠락할 절의 미래를 예언했다. 절을 지키러 오는 스님들은 창건한 스님의 도심(盜心)을 닮아서 사찰의 재산을 조금씩 빼내가기 때문에 쇠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 스님의 장난기 어린 사건이겠지만 도량을 창건하는 성스러운 사업을 희롱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실수를 넘어선 크나큰 과오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그 절은 지금도 추레하다고 인근 주민들이 말한다.

 

청주 근교의 한 사찰에 전해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실제 있었던 사건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대개 이런 이야기는 절 아랫마을 사람들이 고자세였던 절 사람들을 시기해서 꾸며 전해오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무리 꾸민 이야기라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준다.

 

우리는 며칠 후면 가게를 맡길 파수꾼을 뽑아야 한다. 그런데 파수꾼이 되겠다는 사람들이 모두 고양이로 보여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선거철이 되면 후보자들이 나와서 화려한 비전의 말을 많이 한다. 그들은 유권자들이 자신을 생선을 물어갈 고양이로 생각하는지 어쩌는지 생각조차 없는 것 같다. 아니 정말로 자신을 가장 훌륭한 파수꾼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기는 착각 속에서 하는 거짓말이 가장 완벽한 거짓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유권자들은 후보자들을 고양이로 의심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투표에 참여한다. 다만 뽑아 주면 파수꾼 흉내라도 내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투표에 참여할 따름이다. 그리고 5년을 겪어보면 역시 생선을 상자 채 물어가는 고양이였기 때문에 절망하게 된다.

 

‘생선가게의 고양이’란 말은 좀도둑인 쥐는 지키지만, 자신이 더 큰 도둑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최근의 고양이들은 자신이 생선을 물어가기에 바빠서 쥐새끼들이 물어 나르는 것도 지키지 못하는 것 같다. 어느 후보의 말에 의하면 수조 원의 나랏돈이 엉뚱한 곳으로 흘러간다고 한다. 또 다른 후보의 말에 의하면 이 돈을 제대로 관리하면 1%의 경제성장을 이루는 효과와 같을 것이라고도 한다. 그 말이 참말인지는 진정 알지 못하지만 입을 다물 수가 없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근로소득세와 함께 이런 저런 이유로 1년에 내는 세금을 다 계산해 보면 1천만 원도 넘는 것 같다. 연간 소득의 약 6분의 1 정도가 세금으로 나간다면 그것도 적은 돈이 아니다. 그래도 새어나가지만 않는다면 국가를 위해서 그런대로 보람을 갖고 버티며 살 수 있겠다. 그런데 그 뼈아픈 돈이 나보다 형편이 나은 사람들 주머니로 흘러들어가서 그들의 낯을 더욱 기름지게 만든다면 정말로 원통한 일이다. 기름진 사람들의 탈세와 불법 상속 등의 뉴스를 보고 그들의 뻔뻔스런 웃음을 대하면서 분통을 터트리는 일은 이제 그만 했으면 좋겠다. 또 자신이 맡은 가게에서 생선도막을 물어 나르며 흘낏흘낏 눈치나 보는 쥐새끼들도 보이지 말았으면 좋겠다.

 

정말로 이번에는 고양이가 아닌 똑똑한 파수꾼을 뽑아야겠다. 그러나 자신이 진짜 파수꾼이라 소리 지르는 사람들이 우리 눈에는 모두 고양이 모습으로 보여 오늘도 밤잠을 이룰 수가 없다. 고양이와 파수꾼을 미리 알 수 있었던 도편수의 예지가 부럽다.

                                                              (2007. 12. 13.)

                                                                                     충청투데이 칼럼 12월 14일자 게재

                                                http://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54548

 

'비평과 서재 > 완보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신공양(燒身供養)하는 숭례문  (0) 2008.02.23
줄탁동기의 교육정책  (0) 2008.01.16
미친개나리  (0) 2007.11.20
오빠와 누이  (0) 2007.10.13
비린내를 없애는 '된장녀'  (0) 2007.0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