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나리’는 조선 시대에 서민들이 지체가 높거나 권세가 있는 사람을 높여 부르는 말이었다. 또 진사(進士)를 이두로 ‘나리’라고 읽었다고도 한다. 왕세자가 아닌 왕자를 부르는 말로 쓰기도 했다. 그런데 일제시대에는 개나리꽃이 일본 순사를 뜻하는 은어로 쓰였다고 한다. 일본 관헌을 부를 때 뒤에서는 ‘개(犬)’라고 불렀고 앞에서는 높여서 ‘나리’라고 불렀다는데 그것을 합치면 개나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월남 이상재 선생이 일본 형사들을 보고 ‘개나리’라고 했던 모양이다.
기막힌 언어유희다. 우리말에는 이렇게 기막힌 언어유희로 깨끗하지 못한 상층 계급을 조롱했다. 조선시대 판소리나 가면극을 보면 이러한 언어유희로써 양반에 대한 풍자나 조롱으로 서민들에게 웃음을 주기도 하면서 그들의 감정을 통쾌하게 정화시켰을 것이다.
입동이 지난지도 오래다. 그러나 백두대간 산줄기에는 아직도 단풍이 곱다. 긴 가을에 단풍만 고운 것이 아니다. 최근에는 계절을 모르는 꽃들이 더 많아진 것 같다. 겨울의 문턱에서 진달래도 피고 철쭉도 핀다. 양지에서는 산수유도 노란 꽃을 터트린다. 계절을 모르는 봄꽃들이 다 미쳐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 중에 가장 예민한 것이 개나리다. 가을 날씨가 조금만 따뜻한가 싶으면 양지쪽의 개나리가 한두 송이 피어난다. 날씨가 더 따뜻해지면 무더기로 피어나 흐드러지게 피어난다.
가을에 피는 개나리를 사람들은 ‘미친개나리’라고 부른다. 계절이 바뀌는 줄도 모르고, 제가 나올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나온 개나리를 미친개나리라고 부르는 해학이 재미있다. 체감하는 기온만 맞으면 피어나는 미친개나리는 분명 섭리를 모르는 것이다. 이렇게 섭리를 모르는 미친개나리는 곧바로 이어지는 추위 때문에 된서리를 맞는다. 노란 꽃송이들이 아물기도 전에 얼어버리기도 한다.
사람들은 가을에 핀 개나리꽃만을 미쳐버린 것이라고 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개나리는 그냥 개나리일 뿐이다. 섭리를 모르는 세상만사를 미친개나리라는 단어에 담아 조롱하고 싶은 것이다. 나아가고 물러설 줄 아는 것, 나아갈 자리와 물러나야할 자리를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섭리를 따르는 것이 아닐까? 자신이 나서야 할 때를 가리는 것이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것이다. 이렇게 진퇴의 구분을 분명히 하지 못할 때 된서리를 맞는 것도 섭리인 것이다.
올 가을에는 미친개나리가 유난히 많이 피었다. 도로가에 피어난 개나리를 보면 겨울도 없이 바로 봄이 온 게 아닌가 하고 착각할 정도이다. 자연은 인간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 자연을 닮아가는 것인가? 그러나 지구온난화에 따라 미친개나리가 많아진다고 생각하면, 미친개나리도 때를 거역하는 인간의 소산이다.
인간은 이제 자연의 법칙만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규범을 거역하기에 이르렀다. 올 가을에는 많은 미친개나리들이 세상으로 뛰어나와 춤을 춘다. 때를 아는지 모르는지, 자기가 설 자리인지 아닌지도 가늠해 보지 않은 사람들이 시도 때도 없이 뛰쳐나와 가지가지 모양으로 춤을 추고 있다. 할 말인지, 해도 되는 말인지, 해서는 안 되는 말인지 구분도 없이 말도 많고, 외침도 가지가지이다. 양지쪽 언덕에서 오늘에 체감되는 온기에 취해 미친개나리가 흐드러지고 있다. 내일 아침에 내릴 무서리가 얼마나 두려운가 알지 못한다.
갑자기 날씨가 영하로 내려가고, 첫눈이 내려 대지가 얼어붙어 조용하다. 어젯밤 내린 눈보라에 이화령 미친개나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휴일도 없이 헛소리에 장단 맞추어 춤추고 다니는 나리들이 갑자기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7. 11. 20.)
2007 11월 26일자 충청투데이 게재
'비평과 서재 > 완보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줄탁동기의 교육정책 (0) | 2008.01.16 |
---|---|
도편수의 예지 (0) | 2007.12.13 |
오빠와 누이 (0) | 2007.10.13 |
비린내를 없애는 '된장녀' (0) | 2007.09.12 |
보신탕과 개장 (0) | 2007.08.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