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련된 문장과 표현 기교를 통해 형상화된 심오한 정신 세계
최 운 식(수필가,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이방주 선생은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학구적인 교사이다. 그는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고전과 현대 문학 작품을 가르치면서 틈나는 대로 수필 창작에 힘을 기울여 오던 중 1998년 10월에 <한국 수필>을 통해 문단에 등단하였다. 그는 등단 직후부터 인터넷에 글방 ‘느림보의 세상사는 이야기’를 운영하면서 거기에 10일에 1편 정도의 작품을 올려 300여 회원들의 열띤 격려와 냉정한 비판을 받으며 창작 수업을 하였다. 이를 통하여 그는 자기의 수필 창작 능력을 향상시켰고, 교양인들에게 수필 문학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높였다.
그는 등단 이전부터 지금까지 여러 지면에 수필 작품을 발표하여 호평을 받았는데, 작품이 흩어져 있어 그의 문학 세계를 한눈으로 보기 어려워 아쉬움이 많았다. 이번에 등단 이전과 이후에 쓴 작품 54편을 골라 첫 수필집 축을 읽는 아이를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필자에게 큰 감동을 준 작품들이 실린 이 책의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그의 수필 세계를 한 자리에서 음미할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한다.
이 책의 내용은 여섯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1. 물들이기’에서는 그 자신과 관련된 문제를 주로 다뤘고, ‘2. 아내의 꽃다발’에서는 가족 간의 사랑과 교훈을 주로 이야기하였다. ‘3. 사람 만드는 사람’에서는 교직에 첫 발을 내딛던 초임 교사 시절부터 최근까지 있었던 교사로서의 애환(哀歡)과 보람을, ‘4. 해우소에서’에서는 인간의 탐욕 추구와 그것의 허망함을 깊이 있게 다뤘다. ‘5. 껍질 벗기’에서는 정신적 성장과 세상일에 대한 깨달음을 이야기하였고, ‘6. 목련꽃 지는 법’에서는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이르면서 느끼는 삶과 죽음에 대한 소회(所懷)를 형상화하였다. 이처럼 그는 다양한 소재를 통하여 폭넓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것은 그의 체험과 문학적 관심이 매우 깊고 넓음을 말해 준다.
필자는 이 책에 실린 글을 찬찬히 읽으면서 혼자 빙그레 웃기도 하고, 소리내어 크게 웃기도 하였으며, 저려오는 아픔과 서러움에 눈시울을 적시기도 하였고, 작은 깨달음을 주거나 공감하는 부분에서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였다. 이것은 그의 작품이 필자에게 준 문학적 감동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세련된 문장과 표현 기교를 통해 형상화된 정서(情緖)와 메시지(message)가 필자의 가슴에 전달되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그의 작품에 나타난 언어와 표현을 보면, 첫째 정선된 어휘와 잘 다듬어진 문장이 안정감을 준다. 어떤 상황이나 감정을 표현할 때에는 그에 딱 들어맞는 낱말을 찾아 써야지 그렇지 못하면 그 상황이나 감정을 절실하게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적합한 어휘를 찾아 바르게 표현하는 일은 글쓰기의 기초라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학구적인 국어 교사답게 적합한 우리말을 찾아내어 바르고 고운 문장으로 표현하였다. 이것은 그의 수필이 좋은 작품이라는 평판을 얻을 수 있는 초석(礎石)이라 하겠다.
둘째, 그의 작품에는 세심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한 사실적 표현이 주는 형상미가 돋보인다. 이런 예는 작품 곳곳에 나타나는데, 두 곳만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가루받이를 끝낸 암꽃은 시들어 떨어지지만 열매는 날마다 눈에 띄게 커간다. 녹색 풍선에 입바람을 불어넣은 것처럼 어린 씨방은 빵빵한 탄력으로 터질 듯 통통해지면서 녹색의 줄무늬와 엷은 옥색바탕으로 퍼드러진다. 잔털이 보송보송했던 어린 열매가 뽀얗게 색이 엷어지면, 젖살 오른 어린 아이 볼처럼 오동통하다. 그러다가 새신랑 마고자 단추처럼 가슴 떨리게 투명한 색이 되었을 때 안쓰러운 마음으로 애호박을 수확한다. <호박 같은 아내>
단풍은 가을 단풍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봄에 새순이 날 때에도 그 어린아이 손바닥 같은 여리고 가냘픔으로 하늘빛을 통할 것같이 투명한 연록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바람이 잔잔하게 불면, 여린 잎을 하늘거리며 하늘에 한 해의 소망을 비는 것 같은 순수를 볼 수 있어서 우리를 감동하게 한다. 여름 교목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짱짱한 햇볕을 은혜처럼 받으며 그 여리고 어린 손바닥은 짙푸른 녹음으로 변해 간다. 그게 이 가을에 그렇게 고운 빛으로 물들이기를 하는 것이다. <물들이기>
앞의 것은 가루받이를 끝낸 호박이 자라는 모습을 적은 것이고, 뒤의 것은 계절에 따라 단풍잎이 변하는 모습을 적은 것인데, 호박과 단풍잎의 자람을 눈에 보이듯이 표현하였다. 이것은 세심한 관찰력과 표현력을 갖추지 않고는 표현할 수 없는 대목이다.
셋째, 수사법이 뛰어나다.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수사법은 비유가 많은데, 비유를 통한 표현의 묘미가 돋보인다.
아무튼 이 절이 퇴락한 데는 재미있는 얘기들이 있는데, 그 중에도 스님들이 하산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참으로 처음 들어보는 재미가 솔솔 표주박에 샘물 넘치듯 하지요.……꼭대기 바위산에 올라 사방을 조망하니 멀리 문장대가 보이고, 그렇게 거대하던 안테나도 고추장 접시 만하게 보이고요. 우리가 달려온 도로에는 흰개미들이 달리는 것 같이 보이고요. <구병산 정력 샘물>
서슬이 퍼런 잎사귀에 비해서 그 품에서 피어난 꽃들은 여리고 가냘픈 모습이 나비처럼 청초하다. 나리꽃 모양의 가느다란 하얀 꽃잎이 금방이라도 포동포동 날아갈 듯하다. 노란 꽃술에서 은은한 향기가 여름날 산그늘에 어둠이 내리듯 조용하고 숨막히게 퍼져 나간다. 서슬이 퍼렇게 게으름을 꾸짖는 잎사귀보다 부처님의 미소처럼 잔잔한 향기의 은근한 시사가 자욱한 안개처럼 내 가슴에 더욱 아프게 잦아든다. <문주란이 꽃 피울 때>
앞의 글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는 재미를 ‘표주박에 샘물 넘치듯’ 한다고 하였고, 꼭대기 바위산에서 내려다보니 거대하던 안테나가 ‘고추장 접시 만하게’ 보이고, 도로에 달리는 자동차가 흰개미들이 달리는 것 같다고 하였다. 이러한 표현의 묘미는 뒤의 글에 더 잘 나타난다. 그는 문주란의 여리고 가냘픈 모습을 ‘나비처럼 청초’하고, 하얀 꽃잎이 나비가 되어 금방이라도 ‘포동포동 날아갈 듯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노란 꽃술에서 은은한 향기가 여름날 산그늘에 어둠이 내리듯 조용하고 숨막히게 퍼져 나간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그의 표현 기교의 극치를 느끼게 한다.
넷째, 감정에 몰입하지 않는 객관적 표현이 돋보인다. 그는 <눈길에서>에서 눈 쌓인 길을 간을 졸이기도 하고,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위험을 느끼며 차를 몰고 출근한 뒤에 삶과 문학에 대한 고뇌로 북받치는 감정을 털어놓으면서도 “바람도 없는 뒷산의 참나무에서 한 무더기 눈이 쏟아진다.”고 하여 거리감을 유지하여 객관성을 잃지 않으려고 하였다. 다음 인용문에는 이러한 태도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지관이 운구(運柩)를 명령했다. 우리 친구들 여덟이 한 번도 안아 주지 못했던 친구를 안고 마지막 길에 올랐다. 친구야, 우리 이제 만나면 소주만 퍼마시지 말고 가끔씩 안아 주기도 하자. 황토는 돌 하나 나무뿌리 하나 섞이지 않고 깨끗하다. 하늘은 아직도 매섭게 파랗고, 눈발은 계속 축복의 꽃가루를 뿌리고. 나는 마지막까지 관 줄을 잡고 하관을 도왔다.
대여섯 자 깊이지만 이제 우리가 이렇게 서 있는 세상과는 너무나 머나먼 세상으로 친구는 내려갔다. 이때 왜 그 친구의 빙그레 웃던 모습이 떠오르나. ‘잘 가게 이 사람아. 축하하네. 하늘이 저렇게 꽃가루를 뿌리고 있지 않은가. 하나 부탁이 있네. 우리 이담에 만나면 터놓고 이놈 저놈하며 이야기 좀 하세.’ 일하는 사람이 부인의 흙삽을 받아 ‘취토여’ 소리 지르며 관 위에 흙을 뿌리며 영결했다. 우리는 이제 다른 세계로 갈라섰다. 세워 놓았던 삽 한 자루가 넘어졌다. ‘휙-’ 회오리바람이 우리를 휘감고 지난다. 모여들었던 사람이 모두 흩어진다. 유족들은 너무나 큰 절망 탓인지 담담하다. 콧물 한 방울이 뚝 떨어진다. 하늘을 쳐다보았다. 사람들 함께 온 친구들이 모두 하늘을 쳐다본다. 반짝반짝 은빛 꽃가루들이 빛에 반사되어 하늘에 가득하다. <두모실 언덕에는 눈발이 날리고>
이 글은 가깝게 지내던 친구의 시신을 운구(運柩)하여 땅에 묻을 때의 일을 표현한 것이다. 친구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는 슬픔이 극에 달하여 격정이 끓어오를 상황인데, 회오리바람이 불어 삽이 넘어지는 장면, 눈발이 날리는 모습의 서술을 통하여 격정을 자제하는 냉정함을 보인다. 그는 이러한 절제된 표현과 거리 유지를 통하여 감정에 몰입하지 않고 문학성을 높이는 뛰어난 기법을 구사하였다.
다섯째, 의인화를 통한 사회 비판의 기법이 나타난다. 수필의 표현 형식은 자유롭기에 허구화나 의인화(擬人化)를 통하여 주제를 드러낼 수도 있다. 주제를 효율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면, 이야기하는 형식이나 대화 형식, 일기 형식 등 어느 것으로 표현해도 무방하다. 그의 작품에는 이러한 다양한 형식이 나타나는데, 의인화를 통한 사회 비판이 돋보인다.
사슴은 꿈이 있었어요. 그 기-인 모가지만큼이나 원대한 꿈이 말이어요. 그 원대한 꿈은 어떤 사람이 중학교 때 품었던 것처럼 ‘대통령’이 되는 것도 아니고, 또 다른 어떤 이처럼 ‘노벨 평화상’을 타는 것도 아니었대요. 또 어떤 이처럼 교육계의 수장이 되는 교직(敎職)의 최종 목표를 가진 것도 아니었대요.
대통령이 아니라도 제가 살고 있는 숲에 저절로 녹음이 짙고, 제가 이끌지 않아도, 새끼 사슴들이 입안에서 살살 녹는 새순을 찾을 줄 아는 세계를 만들고 싶었대요. 골짜기에 흐르는 맑은 물은 그야말로 물 흐르는 대로 흘러서, 목마른 자는 상류로 뛰어가서 마음놓고 맑은 물을 마실 수 있고, 죄 많은 자는 하류에 가서 죄 묻은 발을 씻을 줄 아는 그런 숲을 만들고 싶었대요.
노벨 평화상을 타지 못해도 아니 노벨 평화상이 목적이 아니라도, 숲에는 아무도 일부러 만들려 하지 않는 평화가 평화스럽게 찾아오는 그런 세계를 만들고 싶었대요. 모가지가 짧은 어린 새끼들일수록 꼭대기에 난 새순을 좋아하거든요. 그 때 이빨이 튼튼한 긴 목을 가진 사슴들이 그 기-인 목을 늘여 새순을 잡아주는 평화 말이예요. 바위, 돌, 나무 등걸 때문에 갈 수 없는 상류까지 함께 가서 죄가 하나도 묻지 않은 맑은 물을 마시고 싶은 때 마시고 싶은 대로 마실 수 있는 그런 세계를 만들고 싶었대요.
새끼 사슴들이 ‘산을 산으로 보고 물은 물로 보는’ 법을 가르쳐 주고 싶었던 거지요. 새끼들조차 ‘산을 부동산으로 보고, 물을 수자원으로 보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사슴은 그게 걱정이 되어서 동동 걸음을 걸었어요. <박제(剝製)와 벌레>
윗글에서 그는 사슴을 화자(話者)로 하여 사슴의 소박한 꿈을 표현하였다. 그것은 곧 그의 꿈이요, 우리 모두의 꿈이다. 그런데 사슴의 꿈은 ‘목은 염소 모가지처럼 짧고, 눈은 비둘기 눈깔처럼 댕글댕글하고, 귀는 종이장처럼 얇으며, 대가리는 참새 대가리 만한 희한하게 생긴 사슴’ 한 마리가 나타나 억지를 쓰면서 깨지기 시작한다. 그의 친구 사슴 중 일부는 그 염소 같은 사슴을 따르게 되고, 그렇지 않은 사슴들은 새순을 포기하고 질기고 억센 등걸이나 나무껍질을 갉아먹다가 이가 부러지고, 아름다운 관이 허물어져 버린다. 그래서 산의 질서가 무너지고, 숲의 평화가 깨지고 만다. 마침내 불쌍한 사슴은 박제(剝製)가 되어 ‘다만 합리(合理)와 순리(順理)’가 살아 싱그럽기만 하던 ‘전설같이 잃어버린 예전의 숲’을 그리워하면서 먼 산만 바라보는 ‘슬픈 모가지’가 되었다. 이처럼 그는 사슴을 의인화하여 사회 현실을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그의 작품 내용을 보면, 어린 시절, 성장 과정, 가족 간의 따뜻한 사랑과 신뢰, 가치관, 교육관, 문학관, 사회 비판적 안목, 인생관 등이 잘 나타난다.
그는 어린 시절에 몹시 가난하여 작은 배를 제대로 채울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보릿고개가 먼 한 겨울인데도 보리밥이라도 먹을 수 있는 아침을 기다렸고, 보릿고개의 주림이 힘겨워 십 리나 되는 논두렁길을 긴 팔 늘어뜨리고 걸어 하교하였다고 한다. 그는 가난이 자기를 ‘패기의 가난뱅이’, ‘정열의 가난뱅이’, ‘사고(思考)의 가난뱅이’, ‘낭만의 가난뱅이’, ‘이상의 가난뱅이’로 만들었다고 하면서 보리밥을 ‘가난의 발자국’, ‘가난의 씨앗’이라고 하였다. <보리밥이 싫은 이유>에서 그는 이러한 가난을 되돌아보기 싫어서 보리밥을 먹지 않는다고 하였다. 어린 시절의 부끄러운 기억을 담담히 이야기하는 이 작품은 수필이 자기를 드러내는 문학 장르임을 실감하게 한다.
팔 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그래서 작품 곳곳에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과 그의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잘 드러난다. <모롱이를 도는 노래 소리>에는 교육대학을 마치고 벽지(僻地)인 의풍초등학교 교사가 된 뒤에 연휴를 맞이하여 집에 다니러 갈 때의 일이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컴컴한 새벽에 출발했건만 세 시간을 걸어 버스와 기차를 번갈아 타고, 밤 10시가 넘어야 외딴집 호롱불이 가늘게 보이는 모롱이를 돌 수가 있었다. 나는 고3 때처럼 소리를 질러 노래를 불렀다. 마지막 모롱이를 돌 때 더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문이 열리고 기침 소리가 나고는,
“누구여, 막내냐? 노래가 막내 소린디.”
“엄마, 나여 나란 말유.”
숨이 턱에 닿도록 뛰었다. 절 받을 새도 없이 어머니는 상을 차려 오시더니 옛날처럼 아랫목에서 밥주발을 꺼내셨다. 구들의 온기가 그대로 전해진 따뜻한 밥, 그건 구들의 온기가 아니라 어머니의 사랑의 온기였다.
그 후에도 언제나 갑자기 집에 가게 되고, 갈 때마다 밤이었다. 그 때마다 어머니는 아랫목에서 따뜻한 밥을 꺼내 주셨다. 처음에는 별 생각 없었지만, 그런 일이 계속되자 나는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믿어지지 않아서 여쭈어 보았다.
“그래야 객지에서도 굶덜 않지.” <모롱이를 도는 노래 소리>
윗글에는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아들의 밥그릇에 매일 밥을 담아 아랫목에 묻어두는 어머니의 사랑과 정성이 잘 나타나 있다. 이것은 아들이 돌아와 그 밥을 먹게 될지도 모르므로 준비해 둔다는 마음과 그래야 객지에 나가 있는 아들이 굶지 않는다고 하는 주술성(呪術性)을 띤 정성이 서린 것인데, 한국 어머니의 사랑 표현 방법이기도 하다. 이러한 어머니의 사랑과 정성은 그의 마음속에 각인(刻印)되어 지극한 효심을 갖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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