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과 서재/문학과 수필평론

하나의 잎새에 머문 우주 - 나의 수필 쓰기-

느림보 이방주 2002. 10. 20. 20:50

1. 수필 바로 보기

수필은 무엇인가? 누구는 수필을 서정이라 하고, 누구는 수필을 교술이라 한다. 또 누구는 수필의 서정성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수필은 반드시 서사적이어야 한다고 고집을 피우기도 한다. 흔히 수필은 형식이 없으므로 자유스럽게 쓰면 된다고 한다. 붓이 가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고 수필을 우습게 보는 이도 있다. 이것은 수필의 문학적 독자성을 깨닫지 못하고 다른 문학의 범주에 예속시키려는 치졸한 발상이다.

시가 세계를 바라보면서 세계에서 자아를 발견하는 서정의 세계라면 수필은 그렇게 두터워진 내적 자아를 세계화하는 한 차원 높은 문학이라 생각한다. 소설이 작품의 외적 자아의 개입으로 이루어진 자아와 세계의 대립을 통하여 인생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양식이라면, 수필은 내적 자아와 세계의 대립을 보편화하는 고차원의 예술이다.

시를 읽으면서 작품의 형식이나, 시상의 흐름이나 시인의 감각 있는 인식에 감동하고,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는 세계와 대립되는 자아의 대응 방법에 감동한다. 그러나 수필을 대하면 수필가의 삶 자체에 대해 감동하게 된다. 이렇게 수필은 내적 자아가 세계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삶에 스며있는 개성 있는 진실이 독자를 감동하게 하는 점이 소설이나 시로서 불가능한 문학적 기여라고 생각한다.

나는 하나의 작은 잎새에서도 아무나 볼 수 없는 우주의 질서를 발견하고, 내면화된 자아를 보편화하여 모든이의 공감을 얻어내는 과정이 바로 수필 쓰기라고 생각한다.

2. 세계 바로 보기
여기 한 그루의 느티나무가 있다면, 조각가는 아름다운 목공예를 생각할 테고, 정원사는 자신이 꾸밀 정원을 그려볼 것이다. 또 누구는 노랗게 물드는 가을을 그리며 시상을 떠올릴 것이다. 이렇게 사람마다 세계를 인식하는 관점은 다르게 마련이다.

문학이 일상어와 다른 점은 그 내용이 독특한 인식이라는 점이다. 실재하는 대상을 만나 무엇인가 색다른 것을 아는 것이 문학이다. 아는 것은 '개성 있는 앎'이어야 한다. 누구나 다 발견할 수 있는, 너무나 당연한 인식은 문학이 될 수 없다. '나만의 앎'이어야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문학은 '나만의 앎'을 긴장된 질서로 형상화하는 언어로 쓴 아름다운 집이어야 한다. 우리의 보편적인 삶의 세계에서 나만이 발견할 수 있는 '나만의 앎'을 긴장된 질서로 형상화할 때 문학은 문학으로서의 자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나의 느티나무는 어떤 모습인가? 세계를 바로 보기 위해서는 눈을 바로 떠야 한다. 육안으로 보면 세계는 거죽만 보이고, 마음의 눈으로 보면 세계는 그의 진실한 내면을 보여준다.

우리는 삶의 세계에서 진실을 발견할 수도 있고, 가치 있는 삶의 원형을 발견할 수도 있다. 나는 삶의 세계 가운데 자연에서 더 많은 것을 보려고 노력한다. 가을에 꼭두서니빛으로 물들어 가는 개가죽나무의 작은 잎새에서 우주의 원리를 보려고 눈을 부릅뜬다. 또 봄이 되면 누런 황사 속에서도 순결한 백색으로 피었다가 검붉은 부자탕빛으로 시들어 가는 목련꽃에서 인생의 참모습을 발견하려고 애를 태우기도 한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세계의 모습은 아는 사람의 눈에만 보인다는 점이다. 가치 있는 삶을 아는 사람만이 목련꽃의 시듦에서 삶의 가치가 보이고, 우주의 질서를 아는 사람만이 작은 잎새에서 우주의 질서를 발견한다. 지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는 사람만이 거기서 지성을 발견한다.

나는 지성의 눈을 갖기 위해서 끊임없이 사색한다. 산을 오르면서도 산과 대화하고, 나무들과 과거를 이야기하고, 바윗돌을 디디며 오늘의 고통을 나눈다. 고속도로를 달리면서도 거기를 우거진 소나무 숲 속의 오솔길로 생각하기도 한다.

3. 긴장된 질서의 언어로 형상화하기
문학의 언어는 형상이라는 점에서 정보 전달, 친교, 감화라는 일상의 언어와는 구별된다. 문학의 언어는 읽는 이의 머리 속에 또렷한 마음의 그림을 새기게 하고, 일상의 말이 지니지 못한 짜릿짜릿하고 긴장된 질서를 획득해야 한다. 그 긴장된 질서가 독자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때, 드디어 언어는 형상으로서의 임무를 다한다.

수필은 형식이 없는 글이다. 시는 언어의 함축성과 음악성과 심상으로 질서의 긴장감을 획득한다. 소설은 배경과 구성, 인물간의 갈등과 대립으로 긴장된 질서를 탄생시킨다. 그러나 수필은 이러한 문학의 형식적 요소로서 긴장을 얻을 수 없다. 그런데도 나는 수필도 문학적 긴장이 없으면, 푸념이 되고 넋두리라는 오명을 벗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면 나의 느티나무는 어떤 모습으로 다듬어야 하나? 어떤 모습으로 짜릿한 예술적 긴장을 도모해야 하나? 나는 수필 문학의 긴장은 격조 높은 지성의 언어에서 얻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저속하고 교양 없는 언어로는 수필을 이룰 수 없다. 수필에 비유, 상징, 풍자도 필요하지만, 이런 것들의 뿌리는 교양과 지성에서 실타래처럼 풀려 나오는 격조 높은 언어에 의한 축성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는 것을 뽐내기 위한 번지르르한 언어의 나열은 낯간지러운 말장난이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유아적인 언어도 때로 오묘한 삶의 철학을 토로하는 말이 될 수도 있고, 육두문자로도 그것이 지성의 사색 끝에 풀려 나온 것이라면, 가슴을 울리는 해학이 될 수 있다.

나는 수필은 하나의 작은 잎새에 머문 우주를 찾아 격조 높은 지성의 언어로 형상화하는 고도의 예술이라 생각한다.
(2002. 10. 20)


                                          *** 나의 수필작법(한국수필작가회 20주년 기념, 진실한 사람들)에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