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과 서재/문학과 수필평론

(평론) 『은단말의 봄』에 나타난 박영자의 수필세계

느림보 이방주 2005. 8. 16. 19:46

『은단말의 봄』에 나타난 박영자의 수필세계

 

 

-심연에서 길어올린 영혼의 속삭임-

 

 

이방주

 

 

1. 들어가기


물가에 앉아 흐르는 세월에 꽃잎을 띄우듯 그렇게 쓴 글이니 치열하게 쓰지 못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며, 넓고 큰 세상 바다에 한 방울의 물이라도 정화시킬 수 있는…

『은단말의 봄』의 서두 「책을 내면서」에서 박영자님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글은 그냥 자신의 감회를 술회한 듯하지만, 그의 수필문학관이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다시 말하면, '치열하게' 쓰고 싶은 것이 수필에 대한 이상인데, '세월에 꽃잎을 띄우듯' 써온 수필가의 고뇌와 '세상을 씻어낼 한 방울 물'이 되고 싶은 작품의 역할에 대한 소망이 드러나 있다.
장백일(張伯逸)은 다음과 같이 수필문학의 특성을 설명한다.

수필이란 달관과 통찰과 깊은 사고가 인격화된 자유로운 마음의 산책이며, 한가로운 심경에의 시필(試筆) 속에서 산문으로 엮어지는 적당한 길이의 작문이되 수의수상(隨意隨想)의 글이면서 인생을 관조하는 자조문학(自照文學)이다.

그렇다면 박영자님의 '물가에 앉아 흐르는 세월에 꽃잎을 띄우듯' 쓰는 수필 문학에 대한 태도는 고뇌할 정도로 어긋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전편을 통해서 드러난 담담한 사색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맑은 영혼 같은 삶의 철학은 세상을 정화하는 한 방울 물의 차원을 넘어서서 '평범한 삶의 일상에서 발견하는 진주'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
문학은 언어로 이루어진 예술이며, 예술은 인식과 형상의 복합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은 언어로 인식하고 언어로 형상화한다. 인식은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 또는 현실과 만나 거기서 무엇을 발견하는 기쁨이고, 형상은 무엇을 만들어 내보이는 것이다.
그러면 문학 비평은 예술의 한 분야인 문학 작품의 형상과 인식의 과정을 살펴 보면서 그 가치를 따져 보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제『은단말의 봄』에 수록된 54편에 드러난 제재를 대별하면, 자연, 가족, 고향, 직업, 사회로 구분된다. 이 글에서는 세계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자연에 관한 인식과 인간에 대한 시각을 중심으로 그가 지향하는 삶의 세계를 살펴보겠으며, 색채와 영상의 언어 표현을 통하여 그의 문학적 개성을 알아보기로 한다.
또한 문학 비평의 방법으로 구조주의적 접근 방법, 반영론적 접근 방법, 표현론적 접근 방법, 효용론적 접근 방법을 들 수 있으나, 수필 문학이 자기 고백적이고, 교술적인 특성을 지닐 뿐 아니라, 삶의 일상에 바탕을 두고 있으므로 종합주의적 방법으로 접근하겠다.
박영자님의 '세월에 띄운 꽃잎'의 세계를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문학비평에 관한 해박한 배경 지식을 필요로 하겠지만, 세월이 흐르는 물가 그의 옆자리에 앉은 마음으로 이 글을 쓰려 한다.

2. 따라가 앉을 수 없는 물가

가. 『은단말의 봄』과 자연

자아(自我)가 몸담고 있는 세계(世界)는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의 총합을 의미한다. 시간과 공간은 인간(人間)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문학 작품의 대상은 세계, 즉 자연과 인간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과 자연은 대립된 것이 아니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요 그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학적 세계는 결국 포괄적인 의미의 자연을 일컫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선인(先人)들의 자연관(自然觀)을 살펴보면, 인간이 자연과의 교합을 통해서만 조화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유가적(儒家的) 자연관, 자연을 좁혀서 중생의 생활무대로서의 기세간(器世間)으로 보는 불교적 자연관, 신선이라는 개념의 원시적 기이성(奇異性)과 천강(天降)과 승천(昇天)의 이원적 세계로 보는 도가적(道家的) 자연관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박영자님은 그의 자아가 몸담고 있는 세계를 '은단말의 봄'으로 구체화하고 있다. 그가 앉은 물가는 '은단말'이라는 공간과 '봄'이라는 시간이며, 그가 바라보는 꽃잎은 자연과 가족과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내용으로 한다. 표제 작품인 '은단말의 봄'의 '은단말'은 고유 명사이지만, 그 어감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인 이상향처럼 보통 명사가 되어 친근감 있게 다가온다. '은단말'의 '-말'은 마을의 준말로 인간과 자연이 일체가 되어 하나로 융합된 공간을 지칭한다. 또 유성음화된 'ㄷ'을 포함한 모든 음운이 유성음으로 구성되어 어머니의 품 속 같은 포근하고 아늑한 음상으로 우리를 감싸 안는다. 결국 '은단말'이라는 공간성과 '봄'이라는 시간성이 두 개의 축으로 드러나 박영자님의 문학세계를 대표하는 시간과 공간의 언어로 집약되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박영자님의 『은단말의 봄』이 자연과 어떻게 감응하고 있는가 작품을 통하여 생각해 보기로 한다.

나. 조화와 감응의 아름다움

한국 문학에서 산은 자연이나 자연 환경을 대리하는 대상일 뿐 아니라, 자연관을 드러내는 미감적이고 정신적인 관조의 주위적(主位的) 대상이다. 산으로 대표되는 자연의 하늘과 바다는 그대로 동양인의 정신이요, 교양이며, 종교요, 미학이다. 그래서 명상과 지혜, 초탈, 안주, 무욕의 온갖 의미를 깨닫게 하는 수양적인 거울의 근거가 되는 동시에 자연과의 융합을 구하는 가장 구체적인 장소요, 예술적인 미적 공간 대상이기도 하다.

눈이 시리도록 파란 가을 하늘에 마음을 헹구어 내는 일이나 함박눈이 나비 되어 온 하늘 가득 날아 내리는 겨울 풍경을 바라보는 일도 즐겁다.

「유리」

 

그럴 때는 철저히 혼자가 되어 산과 은밀한 대화를 나눈다. 산은 내게 해결책을 일러 주기도하고 스산하고 울적한 마음을 다독여 주기도 하는 스승이기도 하다.

「우암산」

 

그런데 놀라운 것은, 쓰러져 누운 나무들은 하늘을 찌를 듯이 보이던 나무들이었다. 실바람에도 제 몸을 가누기 어려워하던, 그렇게 나약하게만 보이던 풀꽃이나 키 작은 나무들은 정작 멀쩡하기만 하였다. 그러고 보면 세상은 공평한 것이 아닌가.

「낮은 자의 행복」

 

바다는 무한한 포용력으로 우주를 안는다. 조그만 이슬방울에서 실개천과 호수와 강물이 모두 바다로 모이는 것은 어느 한 가지도 거부하지 않는 넓은 가슴 때문이리라 …(중략)… 바다의 느긋함을 보며 남은 여생 교만의 때를 씻고 겸손해져야 한다는 뉘우침으로 눈시울이 뜨겁다. 밤새 계속되는 바다의 말씀에 쫑긋 귀를 세우고 내 마음의 빈 잔에 귀한 말씀을 주워 담는다.

「바다의 말씀」

 

「유리」에서는 하늘의 의미를 표현했다. 자연의 중심은 우리에게 산이라고 하지만 산의 생명의 근원은 하늘이다. 우리 민족은 하늘을 생명의 원천으로 여겨 왔을 뿐 아니라, 가치의 기준이고, 자신을 비추어보는 거울이며, 소망을 이루어주는 신앙의 대상이었다. 박영자님은 하늘을 정화(淨化)의 기준으로 여기고 있다. 누구나 생각하는 보편적인 생각이겠으나 특히 '헹구어 낸다'고 표현하여 그 사실성을 더해 주고 있다.
「우암산」, 「낮은자의 행복」에서는 산을 통하여 명상하고 자아를 관조하여 삶을 한 계단 초탈하게 하는 자연과의 융합의 모습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바다의 말씀」에서 '바다'라는 자연으로부터 성자의 경지에 이른 인간의 모습을 발견한다. 교만을 뉘우치고 겸손을 회복하라는 바다의 깨우침의 '말씀'은 그의 귀가 아니고서는 들을 수 없는 성자의 말씀이다.
박영자님은 자연을 명상을 통하여 삶을 관조하고 자신을 정화하여 조화하고 융합하는 대상으로 생각하는 모습이 그의 아름다운 문장에 감응하여 일상의 웅얼거림처럼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있다.

다. 생활 무대로서의 자연

자연은 인간의 생활 무대이다. 자연과 인간을 동일하게 생각하는 것은 불가(佛家)의 자연관이다. 불가에서는 미계(迷界)인 현상계를 자연으로 보고, 이 세계를 세간이라 하여 유정세계(有情世界)와 기세간(器世間)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곧 산하대천과 산천초목을 인간의 생활무대로서의 기세간으로 보는 것이다.
박영자님의 작품에는 자연을 삶의 동반자로 보고, 생활의 무대로 생각하는 자연관이 드러나 있다.


넓고 깊은 강의 가슴에 아픈 사연을 쏟아 놓으면 강물은 내 아픔을 싣고 멀리멀리 흘렀다. 강은 언제나 내 가슴을 틔워 주고 상처를 치유해 주는 따습고 자애로운 어머니 손길이었다.

「달래강」

 

퇴근하고 나면 산으로 들로 휘젓고 다니면서 지천으로 널려 있는 풀꽃들과 이야기하고 맑은 영혼의 새들과 함께 노래하는 수채화 같은 투명한 시간들이었다.

「수채화 같은 풀꽃 추억」

한바탕 흥풀이를 하고는 모두들 잔디가 넓게 깔린 뜰로 나오니 밤하늘엔 별이 쏟아진다. 산골짝에서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이 세파에 찌든 모든 시름들을 잠재우고 우리들의 웃음소리가 산 속의 고요를 깬다. 은가루를 뿌려놓은 듯한 낭만이 거기 있고…

「假面」

 

위에서 보면 자연은 '가슴을 틔워 주고 상처를 치유해 주기'도 하고, '맑은 영혼의 새들과 함께 노래하는', '세파에 찌든 모든 시름들을 잠재우기'도 한다. 자연은 감응과 조화의 대상일 뿐 아니라, 영원한 일상적 삶의 동반자로 생각하는 슬기를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동반자로서의 자연의 모습이 그의 투명하고 자연 그대로의 꾸밈없는 문체에 실려 그의 글에 품격을 더하고 있다.

라. 천강(天降)과 승천(昇天)의 이원적 세계

우리 문학에서 자연은 인간과의 조화와 생활 무대가 될 뿐 아니라 회귀(回歸)의 원향(原鄕)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자연은 조화와 감응으로 우리 인격을 정화할 뿐 아니라, 자연에서 와서 그곳으로 돌아가야 할 원향인 것이다. 자연은 그대로 인간의 원초적인 고향이며, 귀속하고자 하는 본원적인 갈구와 꿈의 '저 언덕'이다.

건너다 보이는 양지바른 마을은 예닐곱 채의 집들이 삼태기처럼 우묵한 야산 밑에 폭 안긴 채 조는 듯 고요하다. 늘그막엔 저런 시골 동네에서 유유자적 세월을 보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해 본다.

「은단말의 봄」

 

 

백분처럼 보얀 마사토를 한웅큼 집어드니 똑 고른 알갱이가 너무 깨끗하다. 살그머니 볼에 대본다. 햇살 묻은 흙에서 따스함이 전해 온다. … (중략) … 감사하다. 가슴속에 응어리로 남았던 걱정거리가 잘 풀려 속이 후련하다. 밖엔 어느 새 저녁 노을이 붉다. 서산 마루에 지는 해가 어둠을 펴놓고 가듯이 우리에게도 머지않아 어둠이 내리리라.

「집 두 채」


우암산이 거기 있기에 나는 믿음직스럽고 산에서 나서 언젠가는 산으로 돌아가야 할 인생 길이니 진작부터 산과 동화되는 법을 배워야 하리라.

「우암산」

위의 「은단말의 봄」의 자연은 삶의 세계에서 원시적이고 야성적인 원향에 대한 삶의 향수를 말하고 있다. 인간적인 모든 고뇌와 갈등을 떨쳐 버리고 순수 자연에서의 태고적 상태로 돌아가 침잠하는 대상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와 달리 「집 두 채」, 「우암산」은 자연을 낭만적인 귀향의 세계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원초적으로 돌아가야 할 원향으로 생각한 것이다. 어머니의 품 같은 자연이 있기에 인간의 숙명적인 고뇌인 죽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곧 우리 민족이 죽음을 절멸이나 소멸로 보기보다는 다른 세계로의 이행 과정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러한 의미의 자연이 있기 때문이다.
박영자님의 수필에는 자연을 천강(天降)과 승천(昇天)의 이원적 세계로 보는 도가적 자연관이 배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밝혔듯이 박영자님은 자연을 통하여 조화와 감응의 세계로서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생활 무대일 뿐 아니라, 천강(天降)과 승천(昇天)의 이원적 세계로 파악하여 그가 꽃잎을 띄우는 '물가'는 범인으로서는 도저히 '따라가 함께 앉을 수 없는' 성스러운 세계로 승화하고 있다.

3. 햇살 가득한 봄날

『은단말의 봄』에 수록된 작품에 나타난 인간관은 바람직한 인간 모습, 가족관, 부부관 등으로 크게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그의 자연에 관한 시각과 아울러 가치 있는 인간의 모습에서 그가 지향하는 바람직한 삶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난다.

나는 사람도 유리 같은 사람이 좋다. 속이 말갛게 들여다보일 정도로 숨김없이 자기 마음을 드러내는 사람은 대개 이슬처럼 순수하다. 그리고 이지적이며 맺고 끊음이 분명하다.


「유리」

 

남편과 둘이 마주앉던 겸상을 치우고 둥근 식탁에 숟가락 여섯 개를 돌려놓고 둘러앉으면 이제야 식탁이 제법 어우러진다. 며느리들이 오는 날은 꽃피는 봄날처럼 우리 집에 햇살이 가득하다.

「며느리 숟가락」

늙으셨지만 아버지는 아직도 따뜻한 햇살이다. 나는 그 햇살을 늘 그리워한다. 이번에 가져온 조롱박 두 개는 거실 벽에 걸어 두었다. 조롱박 자루를 쥐고 흔들면 잘랑잘랑 아버지 말씀이 들린다. "세상 살기 힘들어도 후회 없도록 맑게 살아라"

「아버지의 조롱박」

장독대에 고추장을 뜨러 가면 어머니가 거기 계신다. 올 봄에 담아 주고 가신 깐작하고 빛 고운 고추장이 아까워서 보약 먹듯 아껴서 먹는다.

「어머니의 四季」


문학적 인식이 말장난과 다른 것은 대상에서 진실을 알아차리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문학은 현실을 떠나면서 현실로 되돌아오고 떠나는 즐거움과 발견하는 보람을 경험하는 것이다. 박영자님의 수필에서 인식한 진실을 찾아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유리」에서는 바람직한 인간의 전형이 그려 있다. '유리같이 말갛게 들여다보이는' 인간이 그것이다. 이러한 인간관은 그의 일상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알 것이다. 그의 인간 관계나 회합에서의 거침없는 의견 개진의 모습에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며느리 숟가락」에서 '햇살 가득한' 내리사랑의 가족관을, 「아버지의 조롱박」에서는 아버지를 '따뜻한 햇살'로 표현하여 생명의 원천임을 확인하였고, 「어머니의 四季」에서 보양의 그리움이 읽는 이의 가슴을 적신다. 이밖에도, 「두레상을 그리워하며」, 「시어머니 수업」, 「친정 나들이」등에서 부모로서의 사랑을, 「부부」에서 부부의 투박한 사랑을 드러내었다.
결국 투명한 사람만이 가슴 더운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인간관과 부모로부터 받은 햇살을 내리사랑으로 나누어주는 것이 그가 지향하는 가치 있는 삶이라 생각되어 햇살 가득한 봄날을 연상하게 한다.

4. 언어의 연금사

가. 평화와 연민의 색채어

외부 세계의 내면화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문학 작품은 작가의 상상을 통하여 대상을 물감으로 재생산하게 된다. 특히 수필은 외부세계를 필자의 개성적인 시선에 의해 이중 변용을 거친다.
수필가의 작품 속에 나타난 색채어(色彩語)를 분석해 보는 것은 작가의 색채 감각의 내밀(內密)을 포착하는데 일조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상상의 육교를 지나 새로운 형상을 획득하려는 작품 속에 채색된 색채 감각 속에는 작품의 진실한 생명의 리듬을 들을 수 있는 상징적 의미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일상생활에 많이 쓰이는 사색(四色)인 청, 녹, 적, 황색과 백색, 흑색, 회색, 자색(紫色)을 기준으로 고려하되, 그의 작품에 청색과 녹색이 두루 쓰였기 때문에 푸른색으로 생각하기로 한다. 연구의 능률을 위하여 비교적 색채어가 많이 쓰인 「아버지의 조롱박」에 수록된 9 편의 작품을 대상으로 분석해 보기로 한다.

 

아버지의 조롱박에 쓰인 색채어 분석

 

흰색

검은색

회색

노랑

붉은색

푸른색

보라

달래강

5

1

 

 

 

7

 

며느리 숟가락

1

 

 

 

 

 

 

참외 한 지게

 

 

 

2

 

 

 

은단말의 봄

3

1

 

1

 

7

 

수채화 같은 풀꽃 추억

3

 

 

4

2

2

4

아버지의 조롱박

 

 

 

 

1

 

 

 

 

 

 

 

 

 

세월

3

 

 

 

 

2

 

천불 천탑의 신비

 

1

 

 

 

2

 

합계

15

3

0

7

3

20

4

 

 

「아버지의 조롱박」에 쓰인 색채어 52개 가운데 푸른색이 20, 흰색이 15개가 쓰여 푸른색이 절반 가까이 쓰인 점에 주목할 만하다. 푸른색은 강, 하늘, 나무 등의 자연을 표현하는데 많이 쓰였고, 흰색은 사람을 표현하는 데 주로 쓰였다.
'칼라 테스트'에서 심혈을 경주한 뤼스헤어(L sher)는 색의 상징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색채의 상징적 의미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우리 나라에서 통용되는 색감과 대부분 일치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청 : 고요함과 만족, 평화적임, 상징적으로 조용한 글이고 따뜻한 성격이고 여성적이다.
녹 : 확실성, 항상성, 자기의 가치에 대한 자신감을 나타낸다.
백 : 긍정, 무구(無垢)의 시작을 상징한다.

색채어는 작가의 눈에 비친 세계의 재구성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박영자님의 시선은 세계 곧 자연의 푸른색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다. 작가의 시선이 푸른색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내재된 가치관이나 개성이 푸른색의 상징적 의미와 동일하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한국인의 색채관은 한국의 사계의 순환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푸른색은 봄의 생성적인 색상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지닌다. 박영자님의 자연은 조용하고 아름다우며 생명력 있는 평화의 세계이다. 이러한 시선은 지향하고 있는 세계의 의미와 융합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서 인간은 대부분 흰색으로 묘사되었다. 흰빛은 계절의 순환이 보여 주는 하늘, 물, 구름의 색채 환경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특히 우리 민족 기호는 흰색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의 작품 속에서는 삶의 무상과 인간에 대한 연민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늙어감에 대한 연민은 곧 삶의 과정의 긍정으로 나타난다. 이 또한 색채어와 작품 세계의 의미가 일치한다.
푸름과 흰색은 단일 속의 융합의 미학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나. 격조 높은 유아어의 구사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다. 이것은 형식의 자유를 말하는 것으로 수필의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낸 말이다. 그러나, 형식이 자유롭다 해도 문학적 가치를 상실하면 천박한 잡문이 된다. 그래서 수필의 언어는 격조 높은 지성의 언어로 표현되어야 한다.
또 수필은 개성적인 문체로 표현되어야 한다. 작가마다 개성이나 인격이 다르고 생활 감정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문체는 개성이나 인격, 예술 이념과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뷔퐁(Buffon)은 '문체는 사람이다'라 했고 쇼러(Mark Sohorer)는 '문체는 주제다'라 했다.
박영자님의 수필에 사용된 언어는 현학적인 언어가 아니라 지성이 용해된 유아어로 높은 경지의 격조를 유지하고 있다. 맑고 고우면서도 출렁이는 대양의 흐름처럼 그침이 없으며, 아이들의 재잘거림처럼 그윽하고 평화롭다.

플라타너스 가로수는 겨우내 조롱조롱 달고 있던 방울들을 아직도 달고 있지만 잎눈들은 어느새 통통하게 커져 있다.

「입춘」


둑에 쑥이 새파랗게 자라고 양지꽃이 노랗게 웃는다. 건너편 보리밭엔 바람이 손을 잡고 초록빛 파도를 넘는다.

「은단말의 봄」

문학적 형상이란 말이 일상생활에서 쓰일 때 지니지 않았던 긴장된 질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긴장된 질서란 비유나 상징, 구성 등의 문학 요소를 말한다. 이러한 문학적 긴장이 없다면 작품이 주는 감동은 덜어지게 마련이다.
위에서 보듯 맑고 순결한 어린이의 동심이 손을 잡고 춤을 추는 듯하면서도 그의 혼자만의 독특한 품위 있는 개성을 잃지 않은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 밖에도 '강은 꽁꽁 얼어붙은 채 햇솜 같은 이불을 덮고'「달래강」, '봄볕이 소복이 모여 노는 무덤가'「수채화 같은 풀꽃 추억」, '불빛은 물위에 긴 꼬리들을 드리우며 살랑살랑 춤추는'「섬 바다 뭍이 어우러진 통영」등의 표현에서 특유의 격조 높은 유아어의 구사를 보여서 그의 한 차원 높이 열려 있는 문학적 품격을 가늠할 수 있다.

5. 휘갑치기
수필은 평범한 삶의 일상에서 아침이슬처럼 반짝이는 소중한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사색과 관조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서정범님은 『은단말의 봄』발문(跋文)에서 '작가의 글은 화려하고 눈부시지 않으나 조용하고 한적한 오솔길을 걷는 듯한 여유와 고즈넉함을 느끼게 하고 삽상한 가을 바람 같은 인품과 향기가 담백하게 풍겨 나온다.'면서 그것은 '진실하게 살아온 작가의 삶이 그대로 글 속에 녹아 비추어 보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것은 『은단말의 봄』이 앞에서 말한 수필의 성격을 충분히 담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곧 '물가에 앉아 흐르는 세월에 꽃잎을 띄우듯' 쓴 글에서도 '꽃잎을 건져 올리듯' 삶의 진실이 영롱하게 반짝이는 아침이슬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영롱한 아침이슬은 박영자님이 자연을 '조화와 감응'의 대상이나, '천강과 승천의 이원적 세계'로 대하는 슬기나, '일상적 삶의 영원한 동반자'로 보는 아량의 자연관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가 앉아 띄우는 꽃잎은 그의 가장 가치 있는 인간에 대한 이상이 햇살로 생성되어 햇살로 이어주는 '햇살 가득한 봄날'이 되어 흘러가는 것으로 보는 인간관에서도 건질 수 있다.
박영자님의 『은단말의 봄』은 자연이나 인간에 대한 철학이 격조 높은 유아적 언어와 영롱한 색채어에 실려 깊은 사색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영혼의 속삭임으로 안목 있는 독자의 심금을 울리는 영원한 교향악이 될 것이다.

 

(충북수필 17집 200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