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원초적 행복(맛)

찰밥 같은 우정

느림보 이방주 2007. 5. 27. 19:26
 

남원을 떠난 차가 몇 시간 만인지 어느 고속도로 휴게소로 들어간다. 여기서 친구 이여사가 준비해온 찰밥을 먹는다고 한다. 친구의 따뜻한 인정으로 다시 한번 가슴을 덥힐 수 있겠다는 기대감으로 부풀었다. 차는 포장된 광장을 둥그렇게 돌아 등나무로 꾸며 놓은 야외 휴게소 옆에 멈춰 선다. 우리는 습하고 텁텁한 차안으로부터 탈출하듯이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밖은 벌써 커다란 검은색 치맛자락으로 덮은 것처럼 어둠이 깔렸다. 어느새 어두워진 하늘에는 보름 가까운 달만  백동거울처럼 투명한 모습으로 떠 있다. 휴게소는 바쁘게 들고 나는 사람들로 몹시 붐볐다. 친구들은 차에서 굳어진 팔다리를 휘저으며 그들의 피로를 떨어내려 애쓰는 모습이다.


나는 여자 친구들을 따라 등나무 아래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적재함에서 스티로폼 박스를 꺼내고, 일회용 접시를 준비하고, 아이스박스에서 김치를 꺼내느라 분주하다. 우리 세대 남자들은 나나 드나 역시 앉아서 상을 받는다. 나는 그게 민망한데 여자 친구들은 매우 당연하게 생각한다.


우리는 찰밥 한 그릇씩을 배급 받았다. 살림이라면 내로라하는 친구 이여사의 작품이다. 찰밥은 그저 찰밥이 아니었다. 달빛 아래서도 밥알이 반짝반짝 윤이 난다. 게다가 취발이 얼굴빛 같이 붉은 빛으로 잘 익은 대추, 녹두색 호박씨, 자잘한 해바라기씨, 껍질 얇은 강낭콩,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밤, 옥색으로 속까지 드러낼 것 같은 은행 알이 박혔다. 자수정을 담아 놓은 것처럼 발그레한 밥알의 색깔은 붉은 팥에서 우러났을 것이다. 밥이 아니라 보석 같다. 이 모두가 이미 할머니가 된 어린시절 내 친구였던 이여사의 작품이다.


찰밥을 한 덩이 입에 넣고 씹는다. 은행이 입안에서 구슬치기 구슬이 되고, 팥알은 입안에서 초등학교 1학년 때의 교실이 된다. 호박씨나 해바라기씨는 씹으면 음악 시간이 되고, 밤알은 씹으면 꿈결 같은 국어 시간이 된다. 달빛은 밥 그릇 위에서 훤하다. 배추김치 한 잎을 입에 넣어 본다. 그 상큼한 맛이 무르익어 널브러진 이여사의 인정이 된다.


이여사는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5학년 때까지 나와 한 반이었다. 그는 그 때부터 남달랐다. 두레박으로 우물을 길어 올릴 줄 몰라 쩔쩔매는 그런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 반에서 궂은일을 남이 할까 걱정하는 누나 같은 친구였다. 약골이었던 나보다 팔목이 두 배는 되어 보였다. 1학년 때는 키만 밀대처럼 큰 내 옆자리였다. 모두가 가난했던 그 시절, 나는 아버지 덕으로 금빛으로 학교 이름과 내 이름까지 새겨진 연필을 가지고 다녔다. 그는 그 신기한 물건을 하나 갖고 싶어 했지만, 내 옹졸한 인정은 끝내 그거 한 자루를 건네주지 못했었다.


그렇게 어려서부터 마음 깊은 이여사가 이번 동기들의 야유회에 게으른 친구들이 아침 식사를 거르고 떠나는 것이 안쓰러워 밤을 새워 찰밥을 지어 온 것이다. 그 마음 씀씀이가 눈물겹도록 따뜻하다. 동문체육대회 같은 때도 손수 농사지은 오이, 고추, 상추 같은 것을 깨끗이 씻어 가지고 온다. 소담한 자신의 작품들을 맛있게 먹는 친구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빙그레 웃는 그의 모습은 한 없이 행복해 보였다. 먹을 만큼만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라, 돌아갈 때 친구들에게 한 보따리씩 안겨 줄 만큼 미리 준비해 온다.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지 몰라 갑갑하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찰밥을 매우 좋아했다. 우선 붉은 팥에서 우러나 물들여진 불그스름한 찹쌀 알이 좋다. 그 깐작깐작하는 밥알이 혀에 감기는 촉감이 좋고, 매끄럽게 꼴깍 넘어가는 느낌이 좋다. 차조나 기장이라도 섞이면 알맞게 차지면서도 입천장이나 혀가 까칠까칠한 느낌도 또한 좋다. 또 잘 익어서 껍질이 갈라진 붉은 팥 알갱이들이 분가루처럼 하얀 배를 드러내고 있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웠다. 찰밥에 통째로 들어간 아람이 그 반짝반짝하는 겉모습과 달리 꽉 깨물면 입안에서 으깨지면서 포실포실한 맛이 또한 일품이다. 호박씨, 붉은 대추 같은 모든 재료들이 하나로 조화를 이루어 더할 수 없이 그윽한 맛을 낸다.


음식은 맛으로 혀를 자극한다. 혀가 받은 자극은 바로 우리 가슴으로 전해지는 모양이다. 차진 밥을 먹으면 차진 인정으로 가슴을 덥게 하고, 구수한 음식을 먹으면 구수한 덕으로 우리 가슴을 메워 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의 품격이 달라진다. 가슴의 온기가, 가슴의 깊이가, 가슴의 빛깔이 달라진다. 숭늉을 마시면 숭늉 같이 구수한 가슴이 되고, 김치를 먹으면 김치 같이 매콤하고 그윽한 가슴이 된다. 아마도 깐작깐작하고 매끄러운 찰밥을 먹으면, 찰밥 같이 차진 인정의 가슴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좋은 음식을 나누어주는 사람은 품격 높은 가슴을 나누어주는 인정의 소유자이다.


모두가 찰밥 맛이나 김치 맛에 대하여 넘치게 칭찬하면서 식사를 마쳤다. 하나같이 40여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 찰밥 한 그릇으로도 무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더욱 따뜻하고 더욱 차지게 다져진 우정을 발견하며 버스에 올랐다.

(2007.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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