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3일 12시 30분 베네치아의 산타루치아역을 출발한 고속전철 트렌이탈리아는 끊임없이 너른 평원을 전속력으로 달린다. 도시를 벗어나자 드넓은 옥수수밭이다. 옥수수밭이 조금씩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자 그 자리에 해바라기가 노랗게 들을 덮는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밖을 내다보니 하늘에서 노란 물감을 쏟아놓은 것처럼 들판이 온통 노란색이다. 기차는 전속력으로 끝없는 평원을 달리는데 가도 가도 끊임없이 해바라기 밭이다. 정말로 장관이었다. 해바라기는 꽃을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마도 기름을 짜거나 특별한 기호품으로 먹기 위한 것인가 보다.
로마로 가는 고속 전철트랜이탈리아5시간 정도를 달려 도착한 로마는 매우 소란하고 번잡한 도시였다. 떼르미니역을 나와서 거리의 공중전화가 모두 고장이라 조금 헤매기는 했지만, 정확하게 민박집 인터넷로마를 찾아갔다. 인터넷로마는 호텔베네치아의 늙은 주인이 시설이 형편없고 불친절하다더니 그 나이인 주인은 점잖고 친절했다. 아이들에게 ‘이모’라고 불리는 주방 아주머니도 매우 친절하고 음식 인심이 좋았다. 연변이 고향인 조선족인 듯 북한 억양으로 대화를 하면서 대학생들에게 참 이모님처럼 친절한 모습이었다. 그는 중국어도 매우 유창했다. 한식 뷔페로 차려진 음식은 우리 입맛에는 맞지 않으나, 깨끗하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며 풍성하다. 거기다가 파리의 민박집 '파리가자'에서처럼 컴퓨터까지 마음놓고 할 수 있고, 시내 요금으로 한국에 전화도 할 수 있도록 인터넷으로 연결해 놓았다. 모처럼 E-mail을 확인하고, 딸에게 전화도 했다. 우려했던 것과 달리 아주 편안한 로마에서의 첫 밤을 보낼 수 있었다.
8월 4일
로마 관광 첫날, 우리는 바티칸을 가기로 했다. 바티칸은 사전 지식없이는 제대로 된 '둘러보기'가 어렵기 때문에 한국인 안내원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다고 아들이 권한다. 결코 만만찮은 경비를 지출해야 한다. 입장료 외에 1인당 30유로 정도를 지출해야 한다고 한다. 한국인 가이드들이 너무 폭리를 취한다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세계 3대 박물관의 하나인 바티칸 박물관과 싼 삐에뜨로 대성당의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의 미술품을 그냥 휘 둘러보고 지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하루 종일 6시간 내지 7시간을 함께 다니면서 설명하는 것이므로 그만한 가치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그는 떼르미니역까지 나와서 전철을 타고 바티칸까지 안내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바티칸에서 우리가 알아서 돌아와야 한다고 한다.
바티칸은 인구 1000명 안팎의 세계에서 제일 작은 나라이다. 그러나 전세계 가톨릭 신도의 정신적 구심점이다. 이 가톨릭 신도의 정신적 구심점에 불자인 내가 온 것이다. 로마 교황청이었던 바티칸은 1929년 뭇솔리니와 협약으로 교황령에 의해 독립국가가 되었다.
나는 가톨릭교도가 아니기 때문에 순례라기보다 관광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관광이란 말은 성지에 잘 어울리는 격에 맞는 말이 아니다. 아무리 신도가 아니라도 무례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하루 종일 서서 돌아다니면서도 의자 아닌 곳에 무례하게 앉지 않는 것으로 예의를 갖추었다. 사찰 순례에서도 부처님을 뒤로 하고 앉는다는 것은 금기가 되기 때문이다.
바티칸 둘러보기의 이야기는 바티칸 박물관, 싼 삐에뜨로 대성당, 싼 삐에뜨로 광장의 세부분으로 나누어 하는 것이 좋겠다. 그런데 사실 아는 것만큼만 보이는 것이 세상이라면, 그 거룩하고 어마어마한 바티칸의 예술과 종교적 세계를 어떻게 알 수가 있겠는가? 나는 이 글을 쓰기가 너무나 두렵다. 미술에 대한 안목도, 역사에 대한 지식도, 종교에 대한 상식과 교양도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가 본 것을 기록하지 않으면 둘러보기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나의 본 것과 생각만을 아주 간략하게 정리하도록 하겠다.
바티칸으로 향하는 사람들
바티칸 시국을 보기 위해서 입구가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가서 줄을 섰다. 네 줄로 섰는데 한 없이 긴 줄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한다. 결국 1시간 반쯤을 한 발자욱씩 앞으로 내디디니까 그 멀리만 보이던 비티칸의 출입문인 듯한 곳에 다다르게 되었다. 출입문의 위에는 3인의 조각상이 있었다. 안내자는 그것이 르네상스 시대의 3대 미술가인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했다.
입구에 있는 르네상스 시대 3대 미술가 조각상
박물관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삐냐 정원이란 곳에 갔다. 삐냐 정원은 보수하고 있는 솔방울 조각이 있고, 한가운데 잔디밭에 망가져가는 지구모형이 있었다. 솔방울은 세상을 정화한다고 한다. 더러운 세계를 정화한다면, 오염된 정신 세계도 정화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영혼을 정화시킨다는 의미를 지닌단다. 소나무를 좋아하는 나는 얼마나 정화되어 있을까? 나 같은 범속한 인간이야 그냥 좋아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겠지. 또 과연 솔방울탑이 지구를 파괴시키고 있는 현대인의 영혼을 정화시킬 수 있을까?
바티칸의 소나무
그곳에서 게시판 앞의 사진을 놓고 가이드들이 설명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우리도 우리의 안내를 맡은 한국인 여성에게 설명을 들었다. 내용은 바티칸 박물관내의 예술품과 박물관 건물 내에 있는 씨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그려있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화'에 대한 설명이 대부분이었다. 그는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의 삶과 예술에 관한 일화를 중심으로 재미있게 구성하여 이야기했다.
화보 앞에서 열심히 설명하는 한국인 안내원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그림을 좋아해서 양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조각을 공부했다. 당시의 갑부 메디치가의 양아들이 되면서 조각을 더욱 열심히 공부했다고 한다. 24세 때 성모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안고 있는 싼삐뜨로 대성당의‘삐에타’를 완성하여 명성을 얻었다. 그 후 교황 율리우스 2세로부터 씨스티나 성당의 천정화를 부탁받고 완성하였다.
미켈란젤로를 중심으로 한 바티칸 박물관과 씨스티나 성당, 싼 삐에뜨로 대성당의 예술품에 대한 설명을 듣고 직접 작품 관람에 들어갔다. 먼저 박물관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우리는 그냥 가이드의 뒤를 한 줄로 서서 따라 다녔다.
바티칸 박물관은 원래는 역대 로마 교황의 궁전이었는데 18세기 후반에 박물관으로 개조하여 전세계의 명작을 수집해서 오늘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몇 가지만 소개한다.
처음으로 벨베데레의 뜰에 있는 ‘라오콘 군상’이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라오콘은 트로이의 사제 라오콘이 신에게 벌을 받는 처절한 모습을 조각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1506년에 로마의 에스퀼리노 언덕에서 밭을 갈던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한다. 로도소 출신의 세 조각가 하게산드로스, 폴뤼도로스, 아타나도로스가 함께 제작한 이 군상은 라오콘과 그의 두 아들이 아폴론이 보낸 뱀들과 사투를 벌이며 고통에 절규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죄의 대가가 얼마나 참혹한지를 경고하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은 인간에게 이렇게 비정할 수도 있는 것인가 보다.
라오콘 군상은 인간의 격정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헬레니즘 조각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다. 라오콘의 괴로워하는 모습, 뱀을 뿌리치려고 힘을 쓰는 신체 각 부분의 꿈틀거리는 근육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또 두 아들의 겁에 질린 표정도 보는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런데 작품의 앞에 있는 그림을 보면 라오콘의 팔이 쭉 펴진 상태이다. 이것은 팔 부분이 손상된 작품을 복원하면서 팔을 펴진 상태로 만들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 다시 굽어진 팔이 발굴되어 본래의 상태를 찾게 되었는데, 발견된 팔의 모습은 굽혀진 상태였다고 한다. 그런데 미켈란젤로는 오른쪽 팔이 발견되기 전부터 근육의 모습을 토대로 하여 정확한 본래의 모습을 유추해 냈다고 하니 그의 예술적 감각이 듣는 사람을 다시 한 번 놀라게 한다.
라오콘 군상(잃어버린 부분을 찾아 완전히 복원된 본래의 모습)
오른쪽 팔을 발견하기 전 잘못 복원된 모습
우리는 동물의 방과 뮤즈 여신의 방, 라파엘로의 방을 차례로 찾았다. 라파엘로의 방은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명령하여 젊은 라파엘로가 새로 단장 한 것이라고 한다. 그 중 콘스탄티누스의 방은 라파엘로의 제자들이 그린 벽화로 장식되어 있는데, 그것은 라파엘로가 죽은 뒤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하나도 촬영할 수 없었다. 라파엘로의‘아테네 학당’이라는 그림은 실제 인물을 모델로 하여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플라톤, 레오나르도 다빈치, 헤라크리투스, 미켈란젤로 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짝사랑하던 애인까지 그려 넣었다. 여기서도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라파엘로의 방에 있는 아테네 학당(촬영이 금지되어 화보를 촬영)
내부 천장의 모습
화려한 천장의 모습
많은 작품을 돌아보고 우리는 씨스티나성당으로 들어갔다. 씨스티나성당에서 유명한 것은 미켈란젤로가 천장에 그린 '천지창조화'이다. 이 천장화는 미켈란젤로가 교황 율리우스 2세와 성격이 맞지 않아 피렌체로 돌아가 버렸는데, 교황이 다시 미켈란젤로를 설득해서 로마로 돌아와서 완성하게 되었다고 하는 일화가 전한다. 미켈란젤로는 우여곡절 끝에 이 천장화 그리기에 착수하여 5년여의 사투 끝에 ‘천지 창조화’를 완성하였다. 성경의 천지창조 신화를 바탕으로 하여 구성한 그림이다.
이 그림은 천장 아래에 작업대를 설치하고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작업을 했기 때문에 그는 심한 목디스크에 걸리고 시력 저하를 가져 왔다고 한다. 결국 그는 피렌체로 돌아가 20여 년간의 고통 속에서 생활하게 된다. 나는 이 ‘천지 창조화’를 보면서 드디어 미켈란젤로 미술의 훌륭한 점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 그리고 흔한 말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의 의미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의 작품을 보고 받은 충격이나 감동은 말하지 않겠다. 미술에 대하여 너무나 무지한 나의 교양이 탄로나는 것이 두렵기도 하고, 또 그의 미술에 담긴 예술혼이 조금이라도 폄훼될까 두렵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만 짧은 인생을 바쳐 긴 예술을 바꾸어 가진 그의 영광이 부럽기만 했다. ‘최후의 심판’은 60세가 넘어 다시 로마에 돌아와 그린 명작이다.
우리는 바티칸박물관과 씨스티나성당을 돌아보고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식당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미리 준비해 간 음식을 펼쳐 놓고 음료수를 주문하여 식사를 하였다. 우리나라보다 서너 배는 비싼 코카콜라 맛이 일품이다.
점심 식사 후에 유명한 건축가이자 조각가인 베르니니가 1655년부터 10여년에 걸쳐 만들었다는 싼 삐에뜨로 광장으로 나갔다. 이 광장에서 가장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오벨리스크이다. 약 25m 정도 되는 탑 위에 십자가를 세운 이것은 이집트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양쪽에 마데르노와 베르니니가 만든 분수가 있다.
싼 삐에뜨로 광장
다음에는 세계 최대의 성당이라는 싼 삐에뜨로 대성당에 들어갔다. 베드로는 예수의 제자이며 초대 교황이다. 그의 이름을 딴 싼 삐에뜨로 대성당은 초대 교황 베드로의 무덤이 있는 언덕 위에 초라한 모습으로 세워졌다. 그런데 교황 니콜라스 5세가 이 초라했던 성당을 다시 짓기 시작해서 약 120년간이나 증개축을 계속한 끝에 1626년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건물은 율리우스 2세가 브라만테에게 명하여 본격적인 공사를 시작했으며 라파엘로, 미켈란젤로에 이어졌다. 이 성당은 규모가 어마어마한 것처럼 말도 많았고 결국 교회가 면죄부를 발행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종교 개혁의 실마리가 되었다고 한다.
성당에 들어서자 그 어마어마한 규모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그런데 숫자상으로 본 규모는 눈에 보이는 크기보다 더 어마어마했다. 길이가 211.5m, 폭이 45m나 되고, 더구나 중앙의 돔은 직경 42.4m, 높이가 133m나 된다고 한다. 정면의 기둥은 높이가 27m 나 되는 것이 8개가 있다. 그리고 그 위에 13개의 동상이 있고, 동상의 한가운데는 예수와 세례 요한이 있으며 동상의 높이는 5.7m나 된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커 보이지 않는 것은 미켈란젤로의 설계에 의한 것이라니 그 신적인 기술이 놀랍다.
싼삐에뜨로 대성당 내부 돔 바로 아래
성모 마리아가 숨진 예수를 안고 있는 ‘삐에따’는 미켈란젤로가 24세 때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성모의 인간적인 모성애와 종교적 성스러움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삐에따’는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이나 회화의 주제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 싼 삐에뜨로 대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삐에따’외에도 그리스도 미술에 자주 등장한다고 한다. 이와 같이 성베드로 동상은 예술성보다는 종교적 성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인파가 줄을 서서 베드로의 발을 쓰다듬으며 소망을 빌고 있었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으나 종교적 성스러움으로 차마 찍을 수 없었다. 성베드로의 옥좌는 중앙의 높은 곳에 있었다. 그 위의 원형 창문에 있는 비둘기도 사실은 엄청난 크기라고 한다.
싼 삐에뜨로 대성당은 세계 최대의 성당이라고 한다. 그 크기만큼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고, 그만큼 성스러움을 지니고 있으며, 하나의 커다란 예술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티칸을 종일 둘러보면서 가톨릭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가슴속에 부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지만, 이제까지 가톨릭에 대하여는 예배의 절차라든지 비교적 조용한 종교라는 면에서 불교와 같은 경건한 종교라 생각하고 우호적인 감정으로 대해 왔다. 나오는 길에 매점에서 최근에 가톨릭교도가 된 친구 내외의 묵주를 선물로 살 정도로 우호적인 생각에는 변함이 없으나, 그 이미지에는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 왔다. 유럽에 와서 노트르담대성당을 비롯한 많은 성당과 사원을 돌아보면서 저절로 일게 된 가톨릭에 대한 이미지의 변화는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바티칸 둘러보기에 만만찮은 경비를 투자했다. 아마도 사찰을 참배하는데 이만큼의 경비를 지출했다면 그냥 시주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경비를 지출한 만큼 얻은 것도 적지 않았다. 라파엘로나 미켈란젤로의 작품 세계에 대하여 아무런 준비도 없이 비티칸에 온 문외한이 무엇을 얻어갈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그들의 작품세계와 기독교를 연결하여 생각하면서 작품을 바라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가톨릭교도가 아닌 나에게도 바티칸은 종교적 경건함을 뛰어 넘는, 신앙으로서의 공감을 느낄 수 있는 깊은 의미를 주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영혼을 정화하여 가다듬고자 노력하는 훌륭한 계기가 되었다.
올드브리지의 아이스크림
돌아오는 길에 아이스크림의 본산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먹었다. 한참이나 줄을 섰다가 겨우 살 수 있었던 아이스크림은 하루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줄 수 있는 기막힌 맛이었다.
(2006.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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