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과 서재/완보 칼럼

고스톱의 미학

느림보 이방주 2001. 2. 13. 20:26
보통 사람 셋 이상이 모이면 으레 고스톱 판이 벌어진다. 고스톱의 달인(達人)들은 예정된 날에는 새 돈을 바꾸어가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의식(儀式)'을 준비한다. 야구 경기가 관전이 더 재미있듯이 나는 고스톱의 관전을 즐기는 편이다. 거기에는 흥미진진한 멋이 있고 인생의 교훈이 있기 때문이다.

삶은 '끝없는 만남과 선택의 연속'이다. 곧 운명적인 '만남'과 자의적인 '선택'에 의하여 삶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운명이 사람마다 다르듯이 고스톱에서 일곱 장의 손패도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이는 희희낙락하고, 어떤 사람은 운명을 극복하지 못하고 좌절한다. 약삭빠르게 광 팔고 여유를 즐기는 사람도 있다.

시험에 합격한 사람만이 새로운 경쟁을 시작하듯이 게임에 임할 수 있는 사람은 세 사람뿐이다.

게임이 시작되면 손패 일곱 장 가운데 비장한 마음으로 한 장을 쓱 뽑아 여섯 장의 바닥패 중에서 꽃을 맞추어 한 장을 '선택'해야 한다. 이 때 마치 집을 팔아 증권에 투자할 때의 결단처럼 단호히 때려야 한다. 다음에는 몫에서 한 장을 떼어 바닥패와 꽃을 맞추는 '운명'이라는 의식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운명적 의식에는 보너스도 있고, 설사도 있다. 잘되면 신의 은총을 받은 것 같아 가슴의 파문은 짙다. 보너스가 생기면 복권에 당첨되었을 때처럼 거액의 세금을 낸다. 또 설사를 하면 위로금을 받아들이는 인정도 있다. 엄한 규율과 예법이 있어서 어긴 사람에게는 가혹한 징계도 있다.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은 비상사태도 있고, 짜릿한 긴장이 있는가 하면, 긴장 뒤에는 뿌듯하고 뻐근한 희열도 있다. 게임이 끝나면 여생을 보내면서 회고록을 쓰듯 긴장했던 5∼6분 동안을 평가하는 후일담도 있다.

이렇게 고스톱은 인생의 축소판이다. 달인들의 게임은 신사적으로 행해지기에 게임이 끝나면 등뒤에 찬란한 햇빛을 받으며 해장국집으로 행할 수 있다. 남는 것은 긴장과 희열에서 배운 참 인생의 맛이다. 그러나 소인들의 고스톱 판은 협잡이 있고 조작이 있으며 속임수가 있어서 후회와 앙금만 남는다.

주가 등락의 파고가 또 요동을 치고 있다. 어느 졸부가 또 주가를 조작하는 건 아닌지 소액 투자가들이 받을 상처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마치 돈에 눈먼 소인배들의 짜고 치는 고스톱 판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그들에게 한 번 쯤 달인들의 고스톱 판을 관전할 것을 권하고 싶다. 아니면 어느 상가(喪家)에라도 나아가 점당 백원 짜리 고스톱이라도 치면서 필부들에게는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지켜지는 인생의 기본 규율과 예법을 다시 배워 보시면 어떠하실지.

(1999. 10. 25. 충청일보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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