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여름 정말 제대로 된 산행한 번 하지 못했다. 이보다 더 더울 수 없을 정도라는 생각까지 들었던 금년 여름은 더위라는 그 감옥에서 탈출하고 싶은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하찮은 일, 성과도 없는 일에 얽매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개학을 한 첫주 토요일에야 오히려 시간을 낼 수 있었다.
지난해 초파일 은티에서 지름티를 넘어 봉암사로 진입하자는 친구 연선생의 말대로 지름티까지 갔다가 거기까지 넘어와 지키고 있는 스님의 만류로 되돌아 왔다. 희양산은 아주 오래 전에 한 두 번 오른 적이 있었는데, 희양산 절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다는 구왕봉에 올라 보지는 못했다. 오늘은 구왕봉에 가기로 하고 아내와 출발했다. 출발 전에 친구들에게 연락할까 하였으나, 아침에야 서둘러 계획을 얘기하기가 미안해서 그냥 둘이서 떠났다.
그런데 증평 쯤 가니까 신선생 남호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디든 가자는 얘긴데 '나는 가고 있다.'는 말을 하기가 미안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다. 괴산을 통과할 때 연선생 철흠에게서 또 전화가 왔다. 미안해서 그냥 지금 쫓아와도 나를 추월할 수 있지 않느냐 했다. 그러나 올 것 같은 말투는 아니다.
은티마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낙락장송이 성벽처럼 둘러싸인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야릇한 향이 확 풍겨온다. 희양산 계곡에서 내려 오는 물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투명하다. 나는 마음 속 기대감에서 나는 향인가 하여 아내에게 물었더니 역시 향이 난다는 것이다. 향내가 은은하게 오는 사람을 맞이하는 마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은티 마을은 희양산과 구왕봉의 사이에 끼어 있다. 지름티를 두덩 사이의 안부로 보면 희양산 자락과 구왕봉 자락이 양 볼기의 아름다운 곡선처럼 보인다. 그 사이에 형성된 마을이므로 음기가 강하다고 한다. 그 음기를 다스리느라 마을 입구에 소나무를 가꾸는가 보다. 소나무 성벽을 지나 마을로 건너가는 다리를 건너기 바로 전에 전나무 두 그루가 나타나는데 그 아래 아주 귀여운 남근석을 세워 놓았다. 제법 거북이 머리를 흉내낸 귀여운 돌이 하늘을 향하여 하소연처럼 서 있다. 왼새끼줄로 엮어 놓은 것을 보면 정초에 동제를 지낸 모양이다. 그것은 바로 마을이 화합하는 우리의 전통이다. 동제를 지내고 제수를 나누어 음복하는 그 자리가 얼마나 화기애애하겠는가?
세워 놓은 남근석의 덕으로 남성들이 없는 힘을 내어 여성을 제압하고 산다면, 그리고 자신의 지나친 음력을 그렇게라도 누르고 남성을 위하면서 산다면, 그런 여성은 천사나 다름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성들은 또 남성들 대로 자연의 힘을 이용해서 자신의 의지에 울력을 불어 넣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마을 입구 소나무 아래 유래비가 보인다. 마을 안에서 바깥쪽을 바라본 모습
마을에서 나는 향은 사과향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의 주택은 대개 구왕봉의 끝자락 나즈막한 언덕에 남향으로 자리잡아 따뜻해 보였다. 사람들도 그렇게 따뜻하리라 생각되었다.
그 마을을 둘러 싸고 있는 지름티로 올라가는 구왕봉 산기슭은 온통 사과밭이다. 험준한 희양산이 지름티를 건너뛰어 구왕봉에서 한 번 솟았다가 수그러든 산 자락은 사과밭 입지로 으뜸으로 보였다. 산기슭이 온통 발갛게 물들었다.
사과가 달리기 시작하면서 시골에 경제적인 부도 함께 달리기 시작했단다. 가을이면 마을 사람들은 돈가방을 열어 놓고 있어야 된다고 어떤 농부가 자랑처럼 말했다. 그럴것이 이 고장 사과맛이 사과로 이름이 굳어진 어느 고장의 사과보다 향과 단맛이 더 기막히다. 전량이 서울의 백화점과 직거래로 판매된다고 한다. 마을에 해마다 구옥이 사라지고 양옥이 들어서고 마당에 승용차가 서 있는 것이 농부의 말을 증명하는 듯하다.
작은 나무에 달린 탐스러운 사과
이 한알 한알의 향기가 마을을 온통 사과향으로 덮었다.
사과밭을 지나자 고추가 소담하다. 고추밭은 장마 때 계곡의 물이 밭으로 달려 들면 금방 망가져 엉망이 되는 법인데, 배수가 잘 되어 말라 죽은 고추 밭이 하나도 없다. 고추밭마다 붉은 고추가 무너질 것처럼 달려 있다. 이 마을 사람들의 부지런함을 고추밭에서 보는 듯하다.
고추밭 사이로 완만한 가은 고개를 거쳐 마당바위, 정상에 이르는 능선 길을 택했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여름내 게을렀던 다리를 달래기 위해서다. 가은 고개 안부에 이르는 길은 그냥 숲이다. 갑갑할 정도로 활엽수가 하늘을 가렸지만, 발 아래 흐르는 찌적찌적한 건천수, 그러다 만나는 세수 정도 하기는 충분한 맑은 계수가 재미있다.
산행에서 배고픈 것을 느끼지 못했는데 오늘은 심하게 배가 고프다. 산행에 먹을 것을 절제하도록 아내에게 늘 잔소리를 했는데 오늘은 여지없이 아내의 끊임없는 충고를 견디어야 했다. 포도 두 송이를 내가 다 먹었다. 마지막 포도알이 아내의 입으로 들어갈까 조마조마 했다. 인간의 저급한 본능이 내게도 있음을 발견하고 부끄러웠다. 그러나 그 마지막 포도알이 생명을 결정 짓는다면 아마도 나이많은 내가 포기했을 것이다. 다행히 아내는 마지막 포도알을 내게 내밀었다. 이것도 또한 강한 은티의 음기 탓인가?
마당바위에서 정상에 이르는 길은 오히려 완만한 풀길이다. 노랗게 핀 산 원추리가 예쁘다.
정상으로 가는 길은 그리 멀지도 않고 험하지도 않다. 정상에는 구왕봉이란 팻말도 고도 표시도 없다. 괴산의 명산이 가는 곳마다 안내가 잘 되어 있는데 구왕봉은 봉암사에서 꺼리는 이유 때문인지 별 다른 안내가 없다. 우리 내외는 정상이 못미더워 한참을 헤메었다. 아무리 보아도 정상으로 보이는 곳에서 가방을 풀었다.
희양산의 거대한 바위가 가슴에 와 부딪친다. 바위는 흰색이라 더 가깝게 느껴진다. 그 흰 대머리 아래는 온통 푸름의 숲이다. 멀리 봉암사 마당이 보인다. 희양산에서 바라 보는 봉암사는 절집의 지붕이며 자동차의 움직임까지 보였던 기억이 새롭다. 구왕봉에서 더 먼 모양이다. 봉암사 마당에서 그리고 봉암사에 이르는 계곡에서 바라보던 구왕봉과 희양산의 위용이 보이는 듯 눈에 선하다. 아버지께서도 아주 절경이구나 하시던 그 길이 멀리 보인다.
싸리꽃 (이렇게 소담하게 피어난 것도 참으로 드물다.)
2005.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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