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과 서재/문학과 수필평론

여백과 운치가 있는 묵직한 담론

느림보 이방주 2010. 10. 25. 15:41

 

<발문>

 

여백과 운치가 있는 묵직한 담론

 

남주완

(산남고등학교 교사)

 

느림보 선생님의 원고를 읽으며 느낀 감흥은 때로는 공감의 울림으로, 때로는 감동의 물결로 온종일 나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마침내 글을 다 읽었을 때에는 가슴 먹먹한 메아리에 한동안 멀미를 했다. 오랜만에 만난 벗과 배반이 낭자하도록 마신 느낌이라고 할까?

  그의 글에는 따뜻한 사랑과 절제가 있다. ‘아빠의 김밥’이나 ‘어머니의 눈물’에서 보듯이 그는 삶의 갈피갈피에 서려 있는 작은 정성에도 감동하고, 속깊은 사랑의 울림에 더욱 전율한다. 그리고 그 느낌을 표현하되 넘치지 않고 몰입하지 않는다. ‘그렁그렁‘하거나 ’줄줄 흐르는’이 아닌 ‘찌적찌적’한 눈물에서, 읽는이는 그의 마음에 공감하면서 자신의 마음도 곁둘 수 있는 자리를 얻는다. 이 점은 또한 묵직한 담론에서도 그의 글이 여백과 운치를 갖게 하는 요인이리라. 삶에 대한 따뜻한 사랑, 그리고 절제된 표현에서 오는 여유와 안정감이 그의 글의 두 날개가 아닌가 싶다.

  한유(韓愈)는 “고요함을 얻지 못하면 운다.(不得其平則鳴)”고 했다. 느림보가 얻고자 하는 고요함은 무엇일까? 무엇이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 그로 하여금 신문에 칼럼을 쓰고, 방송국 마이크 앞에 앉게 했을까?

  느림보는 ‘선생님’이다.

  그의 마음과 뜻을 오로지 하게 하는 中心은 ‘제자 사랑, 교육 사랑’이며, 그가 얻고자 하는 고요함은 ‘참 선생님’에의 순정이다. 이것이 그의 글의 몸통이며 ‘和而同’하게 하는 감동의 울력이다. 자기 새끼가 아닌 것을 자기 새끼로 만들기까지 기진하도록 애쓰는 ‘나나니벌’의 몸부림과, ‘서리병아리’를 품고 품밖에 놓인 병아리를 걱정하며 ‘꼬꼬꼬꼬’를 연발하는 암탉의 애끓는 모정을 위해, 그는 스스로 ‘어둠을 쫓는 개’가 되어 밤이 새도록 손바닥 발바닥으로 거울을 닦는 것이다.

  그는 이순의 나이에 담임을 자원하여 ‘39송이’의 ‘꽃밭’을 일군다. 그가 꽃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소재로 ‘꽃밭일기’를 쓰며, 꽃 한 송이 한 송이에 쏟는 정성은 안쓰럽기까지 하다. 지난 초가을, 꽃 한 송이가 길을 잃어 꽃밭을 벗어나려 할 때, 그의 얼굴에 검게 깔리던 그 걱정과 슬픔이 어찌 서리병아리를 품은 암탉의 아픔이 아니겠는가. 마른 입술을 뜯고 뜯으며 그 꽃을 기다리고, 마침내 그를 다시 안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얼마나 기쁘고 무안했던가! 그는 이 마음 하나로 글밭을 일구고, 그가 만나는 모든 꽃들을 가장 자기다운 꽃으로 피우기 위해 사회를 공부하고 역사를 읽는다. ‘여시들의 반란’에 보이는 변화하는 세계에 대한 혜안도 이러한 노력의 결과이고, ‘산은 산, 물은 물, 태양은 태양’이라는 無縫의 기원도 이러한 천착의 소산일 것이다.

  ‘느림보’ 선생님은 적지 않은 나이에 글쓰기를 시작했지만, ‘가득 찬 후에야 넘친다’는 스스로의 계율을 지켜가고 있다. 나는 그의 글밭에 아직 손닿지 않은 곳이 많음을 안다. 그는 서두르지 않겠지만 쉬지도 않을 것이다. 그의 꽃밭에 뿌리 내린 모든 꽃들과, 쉬지 않고 김매고 덤불을 걷어내는 그에게 시절 시절 ‘기쁨의 단비’가 내려지기를!

    글에 손방인 내가 “한마디 얹으라.”는 그의 부탁을 저버리지 못하고 감히 괴발개발 적은 것은, 달팽이만한 나의 집에 그가 커다란 발을 성큼 들여 놓은 때문이다. 고마움을 거스를 수 없었던 점, 넓은 이해 있으시기 바란다.

 

옥화리 守拙齋에서

庚寅 늦가을 不慍 삼가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