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사랑의 방(가족)

자귀나무 그루터기엔 새움이 돋고

느림보 이방주 2002. 8. 25. 13:41
아파트 앞 주차장 베어낸 자귀나무 그루터기에서 새로 움이 돋았다. 장마가 계속되는 요즈음, 잎이 무성한 자귀나무는 다른 나무보다 더 많은 이슬을 안고 있다. 차를 세우고 내릴 때, 내 차의 커다란 문에 걸려 휘어졌다가 문이 닫히는 순간, 함북 머금었던 이슬을 내 바지자락에 힘껏 뿌리는 심술도 서슴지 않는다. 그런 줄 알면서도 나는 다른 빈자리를 두고 그 자리에 버릇처럼 차를 세운다.

이 년 전만 해도 이 자귀나무는 내 차에 그늘을 지워 줄만큼 키가 컸었다. 새 아파트에 입주할 때 느티나무, 목련, 단풍나무, 영산홍 등의 형식적인 조경으로 틀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개성 없는 정원이었는데, 누군가 좁은 화단 한켠에 이 자귀나무를 심었다. 산에 지천으로 나 있어도 어딘지 모르게 품위가 있어 보이는 자귀나무를 그리워하는 어느 어르신네의 배려였을 것이다. 아니면 자잘한 이파리들이 쌀알처럼 생긴데다가 소가 잘 먹어서 소쌀나무라고도 불리는 이 나무를 못 잊는 어느 노인의 사랑으로 기르던 황소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생각되어 나도 덩달아 고마웠다.

산이 가까운 우리 아파트에서 산 냄새를 맡아서인지 자귀나무는 참으로 잘 자랐다. 바로 콘크리트 암벽 옆에서 아스콘 바닥 밑으로 그 잔 뿌리를 뻗치며 자신의 삶의 터전을 구축해 나가야만 하는 처지를 헤아리니 날마다 그 애가 대견했다. 해를 더할수록 자귀나무는 제법 그 가지가 축축 늘어지고, 공작의 깃털처럼 우아하고 멋스러운 잎줄기들을 자랑했다. 나는 그 자귀나무를 보면서 고향집 뒷산을 그리워하기도 하였다. 어린 시절 소꼴을 베기 싫으면 산에 가서 그 밑가지의 커다란 잎줄기를 툭툭 쳐다가 작두로 숭덩숭덩 썰어 구정물에 등겨를 섞어 구유에 넣어 주면, 고마워하며 꿈적이던 커다란 눈도 기억 속에 아련하다. 한 일주일만 그렇게 하면 소 궁둥이에 쇠똥이 다 떨어지고 목덜미에는 윤기가 짜르르 흘렀다. 이 도시에서는 그냥 바라보기도 아까울 정도로 싱싱하고 깨끗해서 날마다 출퇴근길에 그 앞에 주차하고 한참씩 쳐다보곤 했다.

어느덧 내 차의 지붕을 덮을 만큼 키가 크더니 꽃도 피웠다. 그 소담스런 잎사귀 사이에서 밤하늘에 퍼지는 매화포 불꽃놀이처럼 곱고 연약한 꽃송이들이 소복소복 피어났다. 줄기의 생명력이나 잎줄기들의 도도함에 비해서 꽃은 새색시 볼에 연지같이 어여쁘다. 향기는 백합처럼 호화롭지도 않고, 난처럼 보일 듯 말 듯 한 것도 아니고, 물결 같은 잔잔함이 배어 나와서 볼 때마다 사랑하게 했다.

그런데 어느 해인가 이 자귀나무에 아랫도리가 볼록하고 유난히 새까만 개미들이 분주하게 오고 가는 것이 보였다. 연한 새순마다 진딧물투성이였다. 나는 개미들이 고무 냄새를 싫어한다는 것이 생각나서 자귀나무 밑동에 고무줄을 감아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 진딧물은 자연히 없어질 것이 아닌가? 정원을 관리하는 아파트 관리인들이 약을 한 번 뿌려 주면 더욱 좋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그만 그 자귀나무를 아랫도리를 싹둑 잘라버린 것이다. 진딧물 생긴다고 느티나무를 다 잘라버린 경비들의 메마른 교양을 잊었던 내가 불찰이었다. 자귀나무는 저 세상으로 갔어도 예전의 그늘은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아 그 자리는 늘 나의 자리이다.

그런데 올봄부터 무슨 한이 남았는지 썩지 못하고 있던 그루터기에 움이 돋았다. 고욤나무에 감을 접붙였을 때처럼 한 줄기만 나왔으면 좋겠는데, 굵기가 두 뼘 정도 되는 새까만 밑동에 빙 둘러 파랗게 싹이 돋는다. 나는 그 놈들의 생명력이 천박한 세속적 욕망처럼 보여서 대견스럽기보다 밉살스러웠다. 소복하게 솟아오르는 자귀나무 줄기들은 전신(전에 섰던 자귀나무)의 고고한 잎줄기가 고통을 헤치고 뻗쳐 놓은 뿌리로 길어 올리는 영양과 잦은 비를 맞고 탐욕스런 손바닥처럼 한줄기도 시들지도 않고 잘도 자라 오른다. 욕심을 버리고 한 줄기만 남으면 한 해만 자라도 예전의 영화를 다시 볼 수 있으련만, 자신을 버릴 줄 모르는 후안무치(厚顔無恥)는 이리저리 뒤척이면서도 숙일 줄 모른다. 온갖 고통을 이겨낸 뿌리의 큰 덕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귀나무에 올라오는 새움을 생각하면 참으로 우울하다. 그 밉살스러움보다 그걸 수용할 줄 모르는 옹졸함이 나를 더 우울하게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요즈음은 그 우울증이 가슴앓이로 변했다. 지난 목요일 생질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는 가슴이 저렸다. 돌아가신 누님의 장남이다. 내게 전화하는 것이 이유 없이 고통스러울 조카와 공연히 할 일을 다 못하고 있는 것 같은 삼촌의 만남은 목소리만으로도 길지 못하다. 세대가 가장 가까워서인지 막내 삼촌인 나를 편하게 생각하던 사람인데 지금은 옛날 같지 않다. 일요일 저희 계모를 모시는 '모임'을 갖는다고 애써 그 규모를 축소하여 자형의 결혼식 소식을 전한다. 나는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내게 움누이가 생기는 것이다. 남들이나 하는 얘기 같던 움누이가 내게도 생기는 것이다. 나는 너희가 참 효자라면서 조카를 칭찬했다. 그러나 자귀나무 그루터기에 새움이 트듯 그것은 순리인데도 자형에게 섭섭했다. 오늘이 그 날이다. 지금 이 시각, 그런 화기애애한 의식이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

자귀나무는 양쪽으로 갈라진 공작의 깃털 같은 잎이 해가 설핏하면 오므라들어 한데 찰싹 붙어서 밤을 지내고 새벽을 맞는다고 해서 금슬 좋은 부부를 닮은 나무라고 한다. 젊은 날 누님 부부는 자귀나무처럼 금슬이 좋았다. 그러나 그렇게 금슬 좋은 내외분에게 어떻게 생긴 개미새끼들인지 연방 진딧물을 실어 날랐다. 십여 년, 진딧물 같은 암과의 싸움에 지친 누님은 하늘빛이 처절하게 푸른 어느 가을날 세상을 버리셨다. 그토록 애잔한 피붙이들을 버리고 누님은 진딧물 없는 세상으로 가셨지만, 남은 사람들은 진딧물 없이도 참으로 고통스럽다. 처남과 매부, 삼촌과 조카 사이가 이유 없이 서먹해진 것도 그런 고통의 한 자락이다.

계모나 움누이를 모르고 살아온 나는 어머니 자리에 자귀나무 움처럼 새로 돋는 싹을 바라보는 조카들의 고통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제 언젠가 한번이라도 움누이와 마주해야할 그 날의 고통을 걱정해야하는 고통과 만나고 있다. 그러면서 움누이의 존재에 대한 아픔도 이렇게 찢어지는데, 피붙이에 대한 정이 남다르게 도타운 조카들이 어머니의 그루터기에 새움이 돋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고통은 어떻겠는가? 자형의 새 출발을 축복하는 아량에 앞서 그런 조카들의 고통을 헤아리며 이 우울에서 탈출하려 몸부림친다.

울부짖으면서라도 자귀나무같이 고고하고 애잔하던 누님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야겠다. 그러나 다른 세상에 가 계신다하더라도 '내 누님같이 생긴 꽃'과 같은 그런 누님의 잔잔한 사랑의 울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우선 새로 움튼 자귀나무를 가꾸어 보리라. 이슬방울을 잔뜩 숨겨 가지고 있다가 바지자락에 내 풍기던 심술궂은 가지들을 모두 잘라 버리고, 옛날의 본래의 모습을 가장 많이 닮은 한 줄기만 남겨서 억지로 억지로라도 정을 붙여 보리라. 물이라도 마셔가면서 메이는 목청을 달래어 '사랑한다. 사랑한다.' 몸부림쳐 보리라.
(2002.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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