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
진연화
집과 여자는 꾸미기 나름이라는 말을 심심찮게 들었다. 30년 이상 직장에 몸담고 있었다. 아무래도 차림새를 무시할 수 없으니 나를 위한 외적인 치장에 부지런을 떨었다. 그 덕분인지 패션 리더라느니 나이에 비해 동안이라느니 외모와 관련하여 듣기 좋은 말들이 늘 따라붙었다. 반대로 가정과 일 두 가지를 병행하여 바쁘다는 핑계로 집안을 겉꾸리며 단장하는 일에는 소홀했다. 퇴직 후 어쩔 수 없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니 방치했던 집안 풍경이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식탁에서 커피를 마시며 마주 보이는 창을 응시한다. 거실 한쪽 창에는 커튼을 달고 다른 한쪽 창에는 블라인드를 설치했다. 미신을 믿지는 않지만, 부를 상징한다는 금빛 문양의 커튼과 블라인드에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해달라는 소망을 함께 매단 것 같다. 15층 아파트의 맨 꼭대기 층이라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다. 연한 황금빛 레몬 색깔의 반투명 속 커튼이 수줍은 새색시의 속치마처럼 하늘거린다. 그 위로 미친 듯이 내리쬐는 불볕더위를 차단하는 암막 커튼이 진한 골드 빛깔로 묵직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겉과 속이 의기투합하여 점점 뜨겁게 달아오르는 지구의 여름을 지켜왔다. 또 살을 에는 겨울 한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람 한 점 새어들지 못하게 완전 무장하여 동장군의 침입을 온몸으로 막아내었다. 그 덕분에 우리 가족 모두 춥지 않은 겨울나기와 덥지 않은 여름나기를 해냈으리라.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커튼과 블라인드에도 세월의 흔적이 덕지덕지 나붙어 있다. 아스팔트를 녹일 듯한 강렬한 태양과 맞서려니 흐느적거리는 질감의 속 커튼은 여기저기 해어져 있다. 짙은 골드 빛깔의 겉 커튼도 색이 바래 옅어지고 세월의 때가 묻어서인지 촉감도 거칠고 자르르 흐르던 윤기도 찾아볼 수 없다. 블라인드를 올리고 내리는 줄을 연결하는 고리도 하나둘 고장이 나니 삐딱하게 말려 올라가 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세월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없나 보다. 십여 년을 군말 없이 자기 소임에 충실하고 외부의 모진 환경으로부터 우리 집안의 요추와 같은 곳을 꿋꿋하게 지켜내고 퇴장하려는 말년병장에게 박수를 보낸다.
33년 교직 생활이 영화의 필름처럼 흐르다 멈춘다. 점심시간 텅 빈 교무실에서 즉석 죽을 꾸역꾸역 집어넣고 있었다. 잠시 후 학생들이 들락날락하고, 담임 반 학생이 왜 급식소에 가지 않고 죽을 먹는지 물어 왔다. 그냥 속이 안 좋다고 짧게 대꾸했던 것 같다. 며칠 뒤, 그 아이는 배가 아프다며 병원을 가야겠으니 외출증을 끊어달라고 했다.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 교무실에 들른 아이의 손에 참치 죽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장염이니 죽을 먹으라 해서 편의점에서 원 플러스 원 행사 상품을 샀다며 멋쩍게 하나를 건넸다. 말도 행동도 다소 거칠고 호시탐탐 조퇴나 외출을 할 핑곗거리를 찾아다니는 아이였다. 거친 성정(性情) 뒤에 가린 저마다의 성장통의 시간을 어른이라는 기준과 잣대를 들이대며 할퀴어 놓은 것은 아닌지…. 마음의 커튼 뒤에 숨겨놓은 고민과 갈등 그리고 상처를 제대로 읽어 내려고 했는지…. 그 순간 마음에 써 내려갔던 반성문이 떠다닌다. 따뜻한 햇볕으로 어루만져 주고 편견이나 폭력의 비바람을 막아주는 교사이고자 부단히 노력했었다고…. 우리 집 거실 커튼처럼. 그냥 혼잣말을 주절거려본다.
거실을 지나 아들 방을 쓱 들어가 본다. 대학생이 되어 집을 떠나 있기에 주인 없는 방이다. 아들과 학창 시절을 함께 부대껴온 책상과 침대와 책장은 지금 그 자리에 없다. 다만 창을 가리고 있는 커튼만이 이 방의 지나온 시간을 담고 아련하게 흘러내리고 있다. 군데군데 칼로 벤 듯 찢긴 부분이 세월의 자국을 들여다보게 한다. 아들은 성마르고 스트레스를 잘 받는 편이었다. 한 단계 도약할 때마다 적응의 몸살을 심하게 앓기도 했다. 익숙한 환경, 정든 친구들을 떠나 낯선 곳에서 중학 생활을 시작해야 했기에 이런저런 걱정이 앞섰다. 커튼을 선택할 때도 잔신경을 많이 썼다. 자연을 품은 ‘초록’ 안에서 안정감과 평온함을 베게 삼아 잠들었으면 했다.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혀 주며 인내심을 갖게 한다는 ‘파랑’이 너울지는 감정선을 다스려주기를 바랐다. 마지막으로 엄마의 욕심을 한 스푼 넣었다. 좌뇌를 자극하고 창의력을 팡팡 터뜨려 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노랑’을 끼워 넣었다. 세 가지 색상이 파스텔톤으로 넘실대며 망망대해의 수평선을 연상하는 이미지를 담아내려고 했다.
엄마의 보이지 않는 염려와 소원을 커튼에 실었음을 알았던 걸까? 여린 마음은 단단해졌다. 감정의 널뛰기도 잦아들었다. 주변에 친구도 넘쳐났고 알게 모르게 배려와 존중을 배우며 잘 자라주었다. 지금은 패션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감성과 창의력이 받쳐주어야 가능한 일이다 보니 엄마의 욕심도 져버리지 않은 듯해 괜히 뿌듯하다.
커튼의 순기능은 무엇인가를 보호하고 차단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나의 착각일지 모르겠지만 아들은 커튼을 여닫을 때마다 아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여유를 얻고 거기서 한 걸음 나아가 미래의 꿈을 꾸었다고 생각한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여주인공 스칼렛 오하라가 녹색 벨벳 커튼을 찢어 드레스를 만들어 입고 고향 타라를 향해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라고 희망을 말하는 것처럼. 배우들에게 무대 위 커튼콜이 주는 찬사와 함성의 기대처럼. 단순히 수동적으로 누군가 걸쳐 놓은 그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한정된 공간을 박차고 무한대의 세상 밖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에너지를 머금고 있을지도.
겉보기에는 퇴직을 기점으로 인생 1막을 갈무리했다. 그러나 심정적으로는 과거의 커튼 뒤에서 쭈뼛거리며 인생 2막의 휘장을 떠들치지 못하고 있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부수어야 한다는데, 이제껏 나를 떠받치고 있던 타이틀을 걷어내고 순연한 내 모습을 찾아 나서야겠다. 이제 겉모습보다는 내면이 화려하게 영글어가는 인생 후반전을 드리우고 싶다. 이참에 새뜻한 커튼으로 창갈이를 하고 보랏빛 희망을 걸어놓아야겠다. (한국수필 2022년 2월호)
[느림보 단평]
진연화님의 작품에서 상관물을 통하여 사람살이의 면면을 사유하는 정제된 창작 기법을 엿볼 수 있다. 작품 <커튼>에서는 ‘커튼’이란 상관물을 통하여 교직에서 얼마 전 은퇴하여 인생 2막을 열게 된 자신을 성찰하면서 미래를 설계한다. 커튼의 본래적인 순기능은 ‘무엇인가를 보호하고 차단’하는 것이라는 물리적 사고에서 커튼 뒤에 숨어 있을 학생의 성장통을 교사로서의 자신이 할퀴고 이해하지 못하지는 않았을까를 돌아보기도 하면서 커튼의 의미를 추상화한다, 아들의 방을 돌아보며 자신이 만들어 준 커튼을 열고 닫으며 단단해지고 배려하는 마음이 커갔으며 꿈을 열어갔을 것이라 상상한다. 이런 상상은 궁극적으로 커튼의 원형성을 찾게 된다. 그것은 단순히 누군가 펼쳐 놓은 것이 아니라 ‘한정된 공간을 박차고 무한대의 세상 밖으로’ 나아가는 에너지라는 생각이다. 이에 자신도 인생 2막을 보랏빛 희망으로 새뜻한 커튼을 걸어놓을 생각을 하면서 커튼이란 상관물과 자신의 꿈을 환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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