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과 서재/문학과 수필평론

신금철의 <천상재회天上再會>

느림보 이방주 2023. 2. 5. 10:47

천상재회天上再會

신금철

붉은 광장이다. 연둣빛 가녀린 꽃대에 빨간 모자를 쓴 상사화가 목을 길게 늘이고 그리운 이를 기다린다. 꽃무덤을 이루고 긴 기다림으로 서있는 그들이 행여 그리움에 지칠까 애처롭다. 꽃나비가 되어 그들의 그리움을 달래주고 싶다.

해마다 이 맘 때면 불갑사를 향해 달린다. 일요일인 오늘, 불갑사는 인산인해를 이루어 경내에서 떨어진 먼 거리에 주차한 후 셔틀버스를 이용했다. 인파 속을 헤치며 만난 상사화는 화려함 저 깊은 곳에 슬픔을 안고 있어 가슴을 저리게 한다.

상사화는 세속의 여인을 사랑하여 말 한 마디 못한 스님의 애절한 사랑의 전설을 따라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는 꽃말을 남겼다. 잎이 나와서 다 시든 다음에야 꽃대가 올라와 피어나니 평생 만날 수 없는 슬픈 운명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할 뿐, 만날 수 없는 슬픈 사랑의 전설이 있어, 보는 이들은 그 고운 꽃을 아픔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사랑은 아름답다. 그러나 만날 수 없는 사랑은 슬픔을 동반한다. 무리 지어 피어있는 상사화를 뒤로 하고 대웅전으로 향한다. 한적한 숲 속 상수리나무 밑에 다소곳이 피어있는 두 송이의 상사화가 나를 반갑게 맞는다. 마치 내 어머니 같은 꽃이다. 어머니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겸손한 분이셨다. 사람이 많이 모인 곳 보다는 조용한 곳을 좋아하셨고, 참음과 배려심이 많으신 고운 분이셨다.

어머니의 사랑을 생각한다. 어머니는 열일곱 살에 아버지와 부부의 연을 맺고 스물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다. 대학을 갓 졸업했을 앳된 나이에 남편을 잃었으니 땅이 꺼지는 슬픔과 함께 앞으로의 삶이 두려우셨을 게다. 그렇게 어머니는 세상에 두 살 배기 딸과 단 둘이 되셨다. 떠난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87세까지 상사화로 사시며 혈육인 외동딸 하나를 고운 꽃으로 키우기 위해 온갖 고생을 다하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나는 슬픔 속에서도 어머니가 사랑하는 아버지와 천상재회天上再會로 이승에서 못 다한 사랑을 나누시길 바라며 슬픔을 달랬다. 저 세상을 모르기에 두 분이 만나셨는지 알 길이 없지만 두 분이 재회하여 행복하게 지내시는 모습을 상상한다. 가끔씩 어머니가 혼자 남겨두고 일찍 떠나신 아버지를 원망도 하시고 그 동안 고생하신 수고에 칭찬도 해달라고 어린애처럼 떼도 쓰셨으면 좋겠다. 여니 부부처럼 다정하게 손잡고 여행도 다니시고 부부로서의 소소한 행복을 누리시며 다시는 헤어지지 않으시길 매일 기도한다.

그리운 어머니와 두 살 때 돌아가신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가 다정히 손잡고 상사화로 피어나 나를 향해 웃고 계신다. 환영으로 보이는 두 분의 모습이 너무도 다정하여 조용한 미소를 짓는다. 상사화의 아름다운 정경 사진을 찍고 있던 남편이 나를 향해 렌즈를 맞추고 있다. 나는 양손을 올려 하트로 포즈를 취하고 사랑을 날렸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에 있어 행복하다. 아니 어머니의 행복한 모습을 상상하며 더 행복하다. 사진을 찍는 남편을 따라 사계절 아름다운 곳을 누빈다. 샛노란 유채의 해맑음, 황홀함에 취하게 하는 분홍빛 진달래, 하얀 옥양목 치마를 입은 어머니처럼 청순한 메밀밭, 어머니를 만나는 슬픈 전설의 상사화, 고운 단풍 그리고 설국의 아름다움까지 사계절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을 텔레비전의 큰 화면에 비춰보는 즐거움은 황혼에 접어든 우리 부부의 낙이다. 그와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하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행복은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재혼의 유혹을 뿌리치고 혼자 몸으로 나를 키우시느라 무던히 많이 흘리셨을 어머니의 땀과 눈물 덕분이다. 어머니의 생전에 효도를 못했음에 후회가 깊다. 항상 어머니는 내 마음 속에 상사화로 피어있다. 어머니를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시간은 아름답지만 언제나 아쉬움이 남는다. 사랑은 곁에서 함께 나누어야 더 행복하다. 평생 그리움를 안고 살아가는 상사화가 가엾다. 영원한 이별의 사랑이 애처롭다. 상사화의 꽃대 밑에 사랑의 잎을 달아 그들을 동여매주고 싶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천상에 계신 아버질 만나 행복한 모습을 상상하듯 가녀린 꽃대를 감싸 안은 파란 잎과 한 몸이 되어 활짝 웃는 상사화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대웅전에서 불경을 외우는 스님의 목탁소리가 슬프게 들리고 그 모습이 외로워 보인다. 스님이 인간에 대한 사랑을 초월하여 상사화의 아픔을 겪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빌어본다.

(신금철 수필집 <꽃수를 놓다>)

[느림보 단평]

이 작품은 상사화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는 꽃말에서 오는 슬픈 운명을 화소로 하고 있다. 상사화 아름다운 자태와 상반되는 슬픔 운명으로 어머니의 아픈 일생이 소환된다. 내면으로는 사별한 사랑에 대한 슬픔을 누르면서 자식과 가족을 위해 헌신적인 사랑을 바친 어머니의 일생은 작가에게 아픈 기억이다. 이러한 어머니의 삶에 대한 기억은 작가 자신의 현실에 반추된다. 자신의 행복이 어머니의 헌신에 기인한다는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상사화에 대한 물리적인 상상에서 어머니에 대한 기억으로 상상은 역동적으로 자신의 돌아보게 하는 상상으로 돌아선다. 이러한 상상의 단계는 스님의 염불과 목탁 소리에서 영적으로 승화한다. 상사화의 사랑의 전설이 어머니의 아픔으로 다시 자아의 사랑으로 인류의 사랑으로 확산되는 상상의 단계가 읽는 이를 감동하게 하는 것이다.

수필이 일상에 매몰되면 넋두리가 된다. 일상이 원형적 세계, 영적 세계로 확산되어 개념화될 때 문학성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