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껍질벗기(깨달음)

앉은뱅이 일으키기

느림보 이방주 2023. 10. 10. 16:23

앉은뱅이 일으키기

 

교회는 조용했다. 살그머니 들여다보았다. 앉아있을 수밖에 없는 앉은뱅이 노인 옆에 전도사가 무릎을 꿇은 채 기도하고 있었다. 기도는 고요하고 경건해 보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기도가 격렬해진다. 멀어서 알아들을 수는 없어도 간절함이 보였다. 하느님이 강림하신 듯, 예수처럼 성스러웠다. 예수께서 마지막 날 게쎄마니 언덕에서 기도를 마치고 돌아와서 누워 자고 있는 제자들에게 ‘아직도 자고 있느냐. 깨어 기도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했던 성스럽고 안타까운 모습이 보였다. 절대자 앞에 우리를 데려다 주는 진정 사제의 모습이었다. 그는 접신(接神)을 한 것일까. 스스로의 생존이 아니라 앉은뱅이 일으키기에 몰입한 전도사가 무아(無我)의 경지에 이른 것으로 보였다. 전기도 없어 어둡고 침침한 예배당은 올리브나무 우거진 성스러운 언덕이 되어 있었다. 앉은뱅이 노인을 실은 손수레가 사택 앞을 지나가는 걸 보고 따라나서길 잘했다.

 

시립도서관 가을 특별 프로그램 지혜 교실에 등록했다. ‘노년(老年)’을 주제로 하는 김경배 교수의 철학 특강이다. 노년이란 주제보다 ‘지혜(智慧)’란 말이 나를 이끌었다. 빅 데이터 시대에 데이터를 통찰하여 부닥치는 삶에 대처하는 슬기를 배우자는 희망이었다. 깨달음을 얻어서 타고난 미욱함의 껍데기를 깨고 나오고 싶었다.

강의 중에 지나가는 말로 ‘신과의 만남’이란 말을 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신에게서 신성성을 의심한 니체에 심취했었다는 젊은 철학교수의 말이라 내 귀를 의심했다. “어떻게 신을 만날 수 있을까요.” 나는 자못 진지했다. 그는 잠시 멈춤도 없이 “나를 버리면 만날 수 있죠.” 망아(忘我), 몰아(沒我), 무아의 경지에 들면 접신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맞다. 신은 행위에 목적이 없다. 인간도 이기적 목적만이라도 버리면 신에 가깝게 갈 수 있다. 접신은 신을 만난다는 의미와 함께 신이 내린다는 의미도 있다.

문득 벽지학교 초임교사 시절 만났던 그 전도사가 생각났다. 그는 스물 두 살인 나와 동갑내기였다. 시골 작은 교회라 목사를 모시지 못했으니 그를 사제라 해도 될 것 같았다. 아니 나는 그렇게 부르고 싶었다.

우리는 서로를 성직자인 양하며 자주 만나 흉금을 터놓았다. 한번은 “예수께서 앉은뱅이를 고쳐 걸어가게 했다는데 그 말을 믿느냐?”라며 따지듯 물었다. 자신 있게 대답하는 그에게 나는 좀 난감한 제안을 했다. 마을에 60대 앉은뱅이 노인이 있는데 예수께서 ‘일어나 너의 들 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하고 말해서 걸어가게 했듯이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다그쳤다. 그는 앉은뱅이 노인을 교회에 나오게 하면 일어서게 하겠다고 단언했다. 젊은 시절에는 난봉꾼이었다고 마을에 소문난 노인이었다. 멀쩡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앉아 일어서지 못했다니 그때부터 불행인지 다행인지 술도 여색도 마감했단다.

나는 전도사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부지런히 앉은뱅이 노인 집에 드나들며 설득했다. 전도사를 기죽이려는 심술도 한몫 했다. 전혀 움직일 뜻이 없더니 어느날 아들이 끄는 손수레를 타고 교회로 가는 앉은뱅이 노인을 만났다. 노인을 실은 손수레는 매일 같은 시간에 학교 앞을 지나 교회로 갔다. 전도사는 일단 앉은뱅이 노인에게 신뢰를 얻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였다.

전도사의 기도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앉은뱅이 노인은 3개월쯤 아들이 끄는 손수레를 타더니, 3개월쯤은 혼자서 지팡이를 짚고, 또 3개월쯤 지나니 지팡이를 버리고 절룩거리며 걸어서 교회로 갔다. 비가 오면 뛰어가기도 했다. 이기적 목적을 버린 전도사는 접신에 이른 것일까. 자기를 버리고 지순한 기도로 앉은뱅이를 일어서게 한 것이다.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자유란 얽매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규범으로부터 벗어나기, 욕심으로부터 벗어나기,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를 하면 자유로워질 것이다. 나는 욕심으로부터 벗어나기가 가장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다. 재물, 무병장수, 지위, 명예, 애욕을 지향하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면 바로 무아이고 망아가 아닐까 한다. 예수께서 인류를 위해 기꺼이 죽음을 선택하며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면 그리 하십시오.’ 했던 기도는 그래서 성스러운 말씀이다. 전도사도 이기적 목적을 버렸기에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힘을 나누어 준 것이다.

젊은 교수의 강의는 열정이 넘친다. 순간순간이 기도처럼 진지하다. 수강생은 교수에게 철학을 공부하고, 교수는 수강생들에게서 생활을 공부하는 그야말로 지와 혜가 만나는 무아의 공간이 되었다. 앉은뱅이나 다름없는 나의 미욱함을 일으키기에 넘치는 자리였다.

무아의 경지에 들어야 누군가를 일으켜 세울 수 있나보다. 돌이켜보면 교직 40여 년 동안 만난 일만 명 넘는 젊은이들 앞에서 몇 번이나 몰아에 들었는지 자신할 수 없다. 또 수필 교실을 펼쳐 놓고 과연 나를 버리고 기도의 말씀으로 오신 분들의 문학을 일으켜 세우기에 정진했는지 돌아보게 된다.

나는 남을 일으키기에 앞서 스스로 앉은뱅이라는 것도 늘 잊고 산다. 예수께서 앉은뱅이에게 ‘일어나 네 들 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말씀을 내릴 때처럼, ‘기도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고 깨우칠 때처럼, 젊은 전도사가 ‘일어나게 해 주소서. 일어나 걸어가게 해 주소서.’ 했을 기도의 말씀처럼, 진정으로 이타적 목적만으로 말씀을 전했는지 돌아볼 때이다.

자연도 모든 것을 비워내는 가을이다. 나를 온전히 비우고 앉은뱅이인 나부터 일으켜 세울 공부를 하는 것이 오늘의 지혜이다.

http://nim22.com/wb_board/view.php?&bbs_code=1656659375&bd_num=3143

(2023.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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