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껍질벗기(깨달음)

원대리 자작나무

느림보 이방주 2021. 3. 1. 06:57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 숲길이다. 그야말로 푸른 하늘에 닿을 듯하다. 어찌 이렇게 하늘로 하늘로 뻗어 오를 수 있는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15도쯤 비탈진 수렛길을 3km 정도 걸었다. 큰길가에 못생긴 자작나무들이 '나 여기 있어요.'하면서 구부정하게 서있다. 잔가지도 많고 구부러지고 꺾여서 볼품없다. '너는 아니다. 나서지 마라.'하는 마음으로 그냥 걸었다. 경사진 시멘트 포장길은 힘겹다. 발목부터 무릎까지 팍팍하다. 그래도 걷는다. 오직 훤칠하게 하늘을 향하는 자작나무를 만나려는 설렘이다.

‘원대리院垈里’란 이름은 좋은 삶의 터란 의미이다. 인제에서 내린천을 건너 깊숙한 산골짜기로 들어가는 오지이지만, 나그네 쉬어가는 원터의 의미도 갖고 있다. 마의태자도 서라벌에서 하늘재를 넘어 충주 미륵대원사를 지나 송계 덕주사에서 덕주공주를 이별하고 이곳에서 쉬었다가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원대리는 태자의 쉼터이다. 좋은 삶이 있는 신성한 터이기에 자작나무가 자란다.

가난했던 인제 원대리 사람들은 1980년대 핀란드 같은 북유럽에서나 자라는 시베리아 자작나무를 심었다고 안내하는 이가 일러준다. 백석이 시를 쓰던 함흥에서나 볼 수 있는 훤칠한 자작나무이다. 화전이나 솔잎혹파리가 소나무를 휩쓸어버린 황폐한 땅에 모험의 불쏘시개를 심은 것이다. 오늘은 그 자작나무가 사람구경 못하던 원대리로 세상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등줄기가 땀으로 젖을 때쯤 마지막 모롱이를 돌아서자 훤칠한 자작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작나무는 골짜구니마다 차전놀이 때 무명 잠방이등거리를 걸친 농군들처럼 하얗게 떼를 지어 달려드는 듯했다. 골짜기에서 등성이로 올라가는 경사면에도 하늘로 쭉쭉 벋어있다. 결코 등성이에 올라서지 않겠다고 다짐이라도 했을까. 골짜기를 벗어나 등성이를 막 올라서면 거기는 이미 푸른 침엽수들이 점령하고 있다.

몸뚱이에 온통 하얗게 분칠한 듯 자작나무는 한 20~30m 푸른 하늘에 닿아있다. 기슭에서 구부정하게 서있는 지질한 애들과는 다르다. 밑동에서 끝순까지 거의 비슷한 굵기로 미끈하게 뻗어 새파란 겨울 하늘에 닿아 있다. 잔가지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훤칠한 수병들이 하얀 제복을 입고 사열식을 하는 모습이다. 몸매를 잘 만든 큰애기의 미끈한 다리처럼 섹시하다. 하늘로 뻗어 올라가는 기세는 누구를 향하는 것일까. 망설임도 웅크림도 없다. 가까이에서 보니 하얗게 벗은 몸통에는 부릅뜨고 노려보는 검고 커다란 눈알이 박혔다. 부릅뜬 아버지 눈도 같고, 야단치려는 할머니 눈매이기도 하다. 때로 인자한 어머니 눈 같기도 하고, 사랑을 담은 누나 눈인가도 싶다. 세상의 아픈 소리를 다 들으려는 듯 지그시 감은 관음보살의 눈으로 보인다. 자작나무 옹이는 때로 세상을 질타하며 응시하고, 때로 아픔에 자비를 보내는 눈이 되어 있다.

자작나무는 무엇으로 살까. 죽어 스러진 겨울 산을 밟고 저렇게 푸른 하늘을 향하여 서있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옹이마다 검은 눈이 되어 세상을 응시하며 무엇을 보고 있을까. 자작나무 하얀 몸통을 붙잡고 서서 푸른 하늘을 바라보노라니 나까지 경건해진다. 아, 자작나무들은 기도를 하고 있구나. 눈을 부릅뜨고 딱한 세상의 온갖 잡사를 하늘에 길어 올려 하소연하는 것이구나. 그러고 보니 수천 그루 자작나무의 한 그루 한 그루가 모두 무巫로 보였다. 하얗게 소복하고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당골이다. 파란 하늘과[一]과 거친 땅[一]을 이어주는[丨] 사람[人]이다. 이어줌의 통로가 수천 그루의 나무의 형상을 빌어 서 있는 것이다. 수천의 무당이 엄숙하게 서서 하늘에 인간의 소망을 길어 올리고 있는 형상이다. 위로는 천문에 통하고[上通天文] 아래로는 지리를 살피어[下察地理] 그 합일점인 중통인의中通人義를 얻으려는 사제의 엄숙한 자세이다. 그것이 바로 무巫이다. 자작나무는 곧 중통인의라는 소망을 하늘에 기도하고 있는 모습이다.

자작나무는 얇은 껍질을 벗으며 커간다. 비단처럼 얇고 가녀린 옷을 벗고 하얗게 속살을 드러내는 관능이 아름답기만 한 것은 삼십삼천 이십팔수 푸른 봄 하늘을 향하고 있어서이다. 갓 신내림을 받은 처녀무당 같다. 그니가 벗어놓은 비단옷이 그이에게 가는 속삭임으로 자작자작 불쏘시개 되어 태우기에 자작나무란다.

자작나무가 벗어놓은 껍질은 불쏘시개이다. 껍질에는 기름 성분이 있어 불이 잘 붙는다고 한다. 불은 문명의 시작이다. 그리스에서는 프로메테우스가 훔친 불로 문명이 시작되었듯 동양에서는 자작나무에 불을 붙여 자작자작 태워 문명이 시작되었다. 경주 천마총에 그려진 천마도는 자작나무 껍질에 그린 하늘로 비상하는 신마神馬의 그림이다. 함께 발견된 서조도瑞鳥圖도 역시 종이처럼 얇은 자작나무 껍질에 그려 하늘을 날고 싶은 인간의 소망을 담았다. 자작나무 껍질에는 인간의 소망이 담긴다. 영어로는 ‘글을 쓰는 나무껍데기’란 뜻으로 버취Birch라 하고, 우리는 불이 시작되는 나무라는 의미로 ‘화樺’라 한다. ‘백화白樺’가 바로 그것이다. 글과 불이 문명의 시작이라면 자작나무는 문명의 불쏘시개이다. 자작나무 얇은 껍질에 소망을 담아 불을 붙여 올리면 소지燒紙가 된다. 하늘을 향한 자작나무는 누가 뭐래도 소지를 올리는 사제이다.

자작나무는 매우 겸손하고 생태를 아는 나무이다. 등성이에 올라서지 않고 산불이 나거나 사태가 나서 황폐한 골짜기에 씨를 내리고 40~60년 살아 땅이 살만하게 기름이 돌면 다른 나무에게 자리를 내어 주는 나무이다. 그 씨앗은 다른 황폐한 곳으로 날아가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고 땅을 세습하여 소유하지 않으니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그것도 배울 일이다. 수명이 100년도 가지 못해 우람하게 크지는 못하지만 온몸을 모두 사람들의 살림살이에 바치는 겸손한 나무이다. 자작나무는 사제司祭가 되어 하늘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산다.

미끈하게 뻗은 나무들이 하얗게 빛난다. 백화白樺란 이름조차 고졸하다. 오늘 봄 햇살이 묻어나는 자작나무를 짚고 선다. 나도 오만의 껍질을 벗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자작나무 얇은 껍질에 나의 소망을 담아 소지를 올리자. 나의 소망이 자작나무를 타고 하늘에 오른다. 햇살이 자작나무 숲에 쏟아진다. 숲이 온통 하얗게 불탄다. 나도 하얗게 백화가 된다. 등성이를 버리고 골짜기를 따라 자작나무 숲을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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