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교회와 돼지국밥
친구 연 선생이 육거리시장 제일교회 앞에서 만나잔다. 밥을 사준다고 한다. 점심 얻어먹는 것도 좋지만 모처럼 육거리시장 구경을 할 수 있겠다. 그래 가자. 주중동 마로니에공원 정류장에서 111번 시내버스를 탔다. 주중동에서 육거리시장까지 점심 얻어먹으러 가는 길은 단순하지 않다. 청주대학교, 국립미술관, 시청, 도청을 다 지나야 한다.
육거리시장 정류장에서 내렸다. 인도는 남새를 파는 할머니들이 점령했다. 나는 무심코 큰길을 건넜다. 그때 친구가 위에서 부른다. 제일교회를 그쪽으로 옮겼냐. 왜 건너 가냐. 아 그렇지. 제일교회는 시장 쪽이지. 그러고 보니 제일교회가 가까이서도 보이지 않는다. 교회는 주변의 큰 건물에 가렸다.
어머니는 열무 서른 단을 광주리에 담아 머리에 이고 시오리길을 걸어 남주동시장에 돈을 건지러 다니셨다. 그때 엄마를 졸라 시장에 따라가느라 배티고개에 올라서면 청주시내가 다 보였다. 멀리서도 뚜렷하게 보이는 제일교회 붉은 벽돌집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렇게 신령스러운 건물이 있는 청주시내가 두려웠다. 그냥 돌아가고 싶었다. 아니 어느 날 그냥 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가까이서도 보이지 않는다.
집 앞 둠벙에서 우렁이를 잡아 헌 주전자에 담아 들고 엄마를 따라 나섰다. 엄마는 옥수수를 따면 알이 통통하게 잘 익은 것을 골랐다. 껍질을 한두 장 남겨 예쁘게 속살이 비치도록 세 자루씩 묶었다. 얼마씩 팔았는지 몰라도 광주리에 이고 남주동시장으로 석교동시장으로 내갔다. 나는 열 살짜리 장돌뱅이가 되어 엄마 옆에 쪼그리고 앉아 우렁이를 팔았다. 대여섯 사발이 금방 팔렸다. 엄마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옥수수가 다 팔릴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엄마에게 들릴까봐 배를 움켜쥐었다. 엄마는 내 손을 잡고 국밥집으로 갔다. 시장 모퉁이에 천막을 치고 가마솥에 돼지국밥을 끓였다. 국밥 한 뚝배기에 보리밥 한 사발을 내왔다. 깍두기 한 보시기도 따라왔다. 벌건 국밥 국물에 돼지비계 두세 첨이 둥둥 떴다. 얼른 먹어라. 엄마는? 나는 배불러 안 먹는다. 엄마는 옥수수 광주리로 가고 나는 국밥을 먹었다. 멀건 국물에 보리밥을 말아 입에 올리니 목구멍으로 저절로 미끄러졌다. 그 기막힌 맛에 엄마는 얼마나 배가 고플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우렁이를 판 돈으로 인절미 다섯 개를 샀다. 옥수수 광주리를 앞에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애처롭게 바라보는 엄마에게 내밀었다. 옥수수 안 팔리면 먹으면 되는데 그걸 왜 사왔느냐고 핀잔이다. 너도 한 개 먹어라. 싫어. 나는 다른 곳으로 도망갔다. 멀리 가지는 못했다. 엄마는 우렁이를 판 돈으로 내 검정 고무신을 사주셨다. 남은 건 네가 번 돈이니 너 해라. 엄마는 얼마나 배가 고플까. 인절미를 더 사드릴까. 말은 꺼내지도 못하고 남은 돈을 그냥 엄마에게 내밀었다. 돼지국밥에 밥 말아 먹은 나는 앞에 서고, 인절미 다섯 개로 허기를 메운 엄마는 뒤에서 시오리길을 걸어 집에 돌아왔다.
연 선생을 따라 골목으로 들어가니 제일교회는 바로 거기 숨어 있었다. 배티고개에서도 보이던 큰 집이 옆에서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세월이 갔다. 그동안 남주동시장이 석교동시장에 붙어 육거리시장이 되어버렸다. 돼지국밥 먹던 포장이 어디쯤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우리가 찾는 한식뷔페는 제일교회 뒤쪽에 있었다. 허름한 식당에 들어서자 주인아주머니가 반가워한다. 어머 이 선생 오랜만이에요. 대학 동기 진 선생이었다. 아니 어찌 식당을 차렸대요. 그냥요. 노느니 봉사하는 거죠.
음식은 매우 정갈하고 맛있었다. 제육볶음, 잡채, 시금치무침, 얼갈이배추겉절이, 콩나물무침, 멸치볶음, 호박전, 고추장떡…. 옛 생각이 절로 나는 맛이다. 일하시는 분들도 모두 초로 할머니들이다. 식사하러 오신 분들은 육거리시장 토박이 할머니들이 대부분이다. 육거리시장 길가에 채소 몇 줌씩 놓고 파는 할머니들이다. 열무 광주리 이고 시오리길 걸어와서 점심 굶고 가던 우리 엄마 같은 할머니들이다.
공짜도 아닌데 밥 한 접시가 참 부끄러웠다. 진 선생은 시아버님이 물려주신 땅에 가건물을 짓고 시장 할머니들을 위한 밥집을 차린 것이다. 점심을 굶으면서 시장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할머니들에게 실비로 배부르게 점심을 드리는 것이다. 어머니를 생각하니 진 선생에게 절을 하고 싶었다. 맛나게 드시는 할머니들을 보니 내가 먹어치우는 밥이 아까워 넘어가지 않았다. 이런 거 좋아할 거 같아. 진 선생은 고추장떡 한 접시를 갖다 주었다. 맛깔스러운 고추장떡이 목에 걸린다.
밥 보시만큼 고귀한 일이 있을까. 교직을 마치고 시장에서 밥장사를 하는 이런 친구가 존경스럽다. 성녀처럼 보였다. 이런 아름다운 밥집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사업이 아니다. 시장에 쪼그려 앉은 할머니나, 커다란 가게에 앉은 배불뚝이나 첨탑에서 내려다보면 모두가 신성하고 성스러운 사람이다. 그러나 아무에게나 보이지는 않는다. 모두에게 고르게 밥을 퍼주는 일은 대중에게서도 신성함을 보는 시선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사업이다. 사랑은 관계에서 출발한다. 사랑은 머리나 가슴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하는 것이라는 것을 친구에게서 배운다.
육거리시장에 가면 오천 원 한 장에 무한정 먹을 수 있는 한식뷔페 밥집을 만난다. 거기서 우리는 어머니를 만난다. 할머니를 만난다. 사람을 만난다. 바닥에 앉아 있어도 눈은 첨탑에 올라 있는 수수한 이들을 만난다. 따뜻한 마음으로 성스러움을 팔고 사는 장꾼들을 만날 수 있다. 밥을 주는 성녀 같은 친구를 만난다.
(202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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