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물밥(삶과 죽음)

개와 늑대

느림보 이방주 2021. 9. 18. 10:41

개와 늑대

 

그날은 달이 밝았다. 그러나 무섭지 않았다. 달이 밝은 밤이면 모충동에서 개신동으로 넘어가는 배고개 공동묘지 앞을 지나기가 가볍지 않았다. 묘지 앞 커다란 방죽에 밝은 달빛이 여인의 하얀 치맛자락이 되어 넘실거린다. 때로는 삼베 도포가 일렁거려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날은 무섭지 않았다.

몇 집 남은 고갯마루 마을을 지나자 커다란 개 한 마리가 나를 따랐다. 야간 수업이 끝나면 밤 11시 50분, 자정이 넘었을 텐데 이 밤에 웬 개가 따라오나. 송아지만하다. 누런 등줄기에 내리는 달빛이 신비롭다. 눈빛이 형형하다. 한 시간은 족히 걸리는 시오리길, 이미 집에 도착해 공부를 시작했을 시내 사는 친구들을 생각하며 발걸음을 재게 놀려야 했다. 개는 계속 나를 따라온다. 공동묘지 앞 방죽 옆길을 지났다. 이름조차 을씨년스러운 송장고개를 넘어오는 오솔길에도 달이 훤하다. 벼를 베어낸 논두렁에 서리가 하얗다. 집은 한 채도 없다. 충북대학교로 들어가는 신작로에서 지금 대학병원 장례식장이 있는 쪽으로 90도 좌회전해야 한다.

방죽말로 넘어가는 고갯길이다. 산이 컴컴하다. 오르막길에서도 개는 계속 나를 따른다. 나는 앞서고 개는 뒤를 따른다. 고갯마루가 가까워지자 뒤에 오던 개가 앞질러 서서 나를 한 번 바라본다. 그래도 나를 지켜주려고 그러려니 했다. 왼쪽은 산이다. 리기다소나무가 빼곡하다. 키 큰 소나무들 사이로 달빛이 하얗게 내린다. 그래도 이렇게 큰 개가 나를 지켜주니 하얀 치맛자락도 도포자락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놈이 나를 한 바퀴 돌더니 길가에 서서 또 나를 바라본다.

고개를 넘어서면 왼쪽은 참나무 숲이고 오른쪽은 논밭을 지나 남향으로 마을이 앉았다. 방죽을 끼고 있어 방죽말이다. 마을은 길에서 멀긴 하지만 지호지간指呼之間이다. 왼쪽으로 길갓집이 두 채 있었다. 얼마 전 새로 지어 이사한 집에서 불빛이 새어나온다. 어, 그런데 개가 어디로 갔는지 없어졌다. 내리막길에서 한두 번 앞으로 와서 다시 나를 한 바퀴 돌아 뒤로 돌아갔던 개가 따라오겠지 했는데 없어졌다. 사실 나도 개를 믿기는 했지만 뒤를 돌아보기에는 부담이 되었다. 마을이니 나를 지켜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이 마을 제집으로 돌아갔을까.

발걸음을 재촉하여 집에 왔다. 얼마 전 새로 입은 동복 겨드랑이가 땀에 흠씬 젖었다. 엄마가 웬 땀을 이렇게 흘렸냐고 걱정했다. 나는 그냥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새로 한 시에 전날 저녁을 먹었다.

며칠 후 서울 계신 아버지가 내려오셔서 작은아버지가 건너오셨다. 두 분이 말씀 나누는 중에 내가 개 이야기를 했다. 삼촌은 그냥 빙그레 웃었다. 아버지는 깜짝 놀라셨다.

“개는 해만 넘어가면 대문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늑대는 달밤에도 나와 돌아다니지만 개는 겁이 많아 어두어지면 안 나온다.”

작은아버지는 개였을 수도 있다고 희미하게 말씀하셨다. 그럼 뭔가. 개가 아니면 뭐지. 늑대인가. 늑대란 말인가. 등골이 오싹해진다. 그래도 대입학력고사를 보는 날까지 달포를 밤중에 그 길을 걸었다.

그놈이 늑대였다면 나를 빙빙 돌아보면서 왜 공격하지 않았을까. 너무 태연해서 오히려 그놈이 두려워한 것일까. 그랬을 것 같다. 늑대인 줄도 모르는 나를 차마 공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늑대도 제 놈을 늑대인 줄 모르는 사람은 공격하지 않는 게 본성인가 보다.

이숙 선생이 산책 나왔으니 마로니에 시공원에서 만나자고 전화를 했다. 아끼고 믿는 후배이다. 가까이 사는데도 너무 바쁜 그녀를 한번 만나고 싶었다. 그런데 개를 데리고 나왔다. 몸뚱이는 뚱뚱하고 부담스럽게 생겼는데 다리는 짧다. 눈알을 흰자가 나오도록 굴리며 내 눈치를 보는 것부터 맘에 들지 않았다. 내가 개를 싫어한다는 건 개들이 먼저 안다. 이숙 선생이 ‘한번 쓰다듬어 줘 보세요.’하는데도 손이 가지 않았다. 이놈은 내 옆에 와서 꼬리 흔드는 짓도 하지 않는다. 다행이면서도 섭섭했다.

어린 시절 집에서 믿고 기르던 잡종 진돗개 ‘케리’가 할머니 손등을 창이 나도록 물었을 때부터 나는 개를 경멸했다. 개의 조상은 늑대이고 언젠가는 늑대의 본성을 드러낼 것이라고 믿었다. 최근에 생태주의를 수용하는 것이 21세기 수필이 나아갈 길이라고 역설하면서도 개를 좋아할 수 없다. 비판해도 할 수 없다.

이숙 선생이 ‘이 녀석이 내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몰라요.’ 하면서 개에게 ‘큰 아빠한테 가봐’하고 개를 내게 밀었지만 개는 외면했다. 한번 쓰다듬어 보면 점점 좋아질 거라고 한다. 나도 그럴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제 주인을 물어 손등에 창을 내는 늑대의 본성이 보여서 쓰다듬어주기 싫었다. 바로 남편이 왔다. 젊었을 때 너무 미남이라 짜증났었는데 머리가 희끗희끗하다. ‘아빠한테 가봐’ 개가 정말로 제 아빠인 줄 알고 뛰어가 다리를 감고 올라간다. 개들은 원래 아빠를 잘 모르는데 이 녀석은 아빠를 잘도 알아본다. 생물학적 근거도 잘 모르면서 아직도 개의 조상은 늑대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개에 내재한 늑대의 본성이 언젠가 반려아빠 반려엄마에게 희고 긴 이빨을 들이댈 것이라는 의심을 버릴 수 없다.

이숙선생의 말에 의하면 개는 인간보다는 순수하다고 한다.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개를 반려로 삼아 위안을 받는 이들은 개에게서 인간보다 순수함을 봤을지도 모른다. 제 놈을 몰라보는 나를 공격하지 않던 늑대의 본성이 개에게 남아있는 건 아닐까.

정가는 요즘 서로를 할퀴고 물어뜯느라 여념이 없다. 피를 좋아하는 정치꾼들은 상대가 작은 상처라도 보이면 바로 빨대를 꽂는다. 과연 인간은 개보다 나은 동물인가. 늑대만큼 잔인하지는 않은가. 나에게도 피의 향기를 흠모하는 질시嫉視의 본성이 숨어 있지는 않은지 돌아본다. 아니 착한 사람에게 오히려 더 긴 이빨로 처참하게 물어뜯지는 않았는가. 나도 개를 경멸하는 내가 무섭다. 인간이 늑대보다 더 무섭다. 갑자기 달밤에 만났던 늑대가 고맙다. 이숙 선생처럼 자꾸 쓰다듬어주면 개도 반려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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