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물밥(삶과 죽음)

새해 첫날 석천암을 찾다

느림보 이방주 2020. 6. 15. 23:49

몸이 찌뿌둥하고 마음까지 찝찝하면 석천암에 간다. 석천암은 이름 그대로 바위샘에서 물이 나온다. 아니 물은 석굴 천장에서 방울방울 떨어지고 샘이 물방울을 받아 모은다. 그 석굴에 약사여래가 정좌해 있다. 석천암에 가서 석굴의 약사여래부처님을 만나면 하늘이 열리듯 마음이 열린다.

청천에서도 풍광 좋은 삼송리로 들어가 삼송학교 건물을 오른쪽에 두고 살상 기어 들어가면 달리다 보면 농바위 마을 쉼터가 나온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작은 다리를 건너가면 대야산 밀재로 가는 길이다. 다리를 건너지 말고 왼쪽 외길을 따라 쭉 올라간다. 길이 끝나는 지점에 석천암이 있다.

전에는 대야산에 빠져서 한 달이면 두 번 정도는 올라갔다. 아니 쉬는 날만 있으면 혼자서도 자주 갔다. 그럴 때는 경북 문경 쪽의 선유동 범바위 마을에서 용추폭포를 거쳐 밀재로 오르거나 피아골로 오르는 길도 절경이지만 나는 삼송 농바위 마을에서 밀재까지 50분을 걷고 올라가는 길을 좋아했다. 때로는 거칠게 중대봉으로 20m 정도 줄을 타고 오르는 경우도 있었다. 이제는 옛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석천암은 그러니까 대야산의 남서쪽 봉우리인 중대봉 아래 있다고 보면 좋을 것 같다. 중대봉은 절경이지만 혼자서 오르기는 조금 위험한 곳이다.

지난 새해 첫날 아내에게 한 번도 가 본 일이 없는 석천암을 찾아보자 했다. 내 몸이 영험으로 유명한 석천암 약사여래를 원했다.

아주 좁은 마을길로 접어들었다. 처음 가는 길은 이런 때 약간 걱정스럽다. 그러나 차가 가는 곳은 분명 주차할 곳도 있고 돌아 나올 수도 있고 마주치는 차와 교행도 가능하게 마련이다. 단양 원통암이나 신원사 고왕암은 아예 차가 들어가지 못한다. 아마도 석천암도 그럴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차는 꼬불꼬불 계곡으로 들어간다. 경작지가 끝나는 무렵에 주차장이 있고 부도탑이 있다. 여기부터는 걸어야 한다는 내용의 주지 스님의 안내문이 있다.

주차장인지 공터인지 제법 넓다. 차를 세우고 스님 차만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은 가파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새해 첫날 바람이 차다. 하늘이 뿌옇다. 그러나 미세먼지 나쁨이라는 예보와 달리 공기가 맑다. 가파른 중대봉 암벽에 붉은 장송이 우뚝하다. 뒤로 돌아서면 백악산이 거뭇하다. 어디를 봐도 절경 아닌 곳이 없다. 숨이 가쁜 줄을 모른다. 아내는 무거운 공양미를 한 번도 건네지 않고 들고 간다. 무거운 걸 들면 안 되는 내게 대한 배려이다. 이런 때 배려가 마음 상한다. 자루를 빼앗아 내가 들었다.

계단을 밟고 오르니 요사채 뒤에 석굴이 보인다. 석굴은 그냥 작은 굴이 아니다. 커다란 바위 아래 100평도 넘을 것 같은 부처님 마당이 있다. 공간은 매우 평평하여 그 곳에 약사여래 삼존불을 모셨다. 50명은 넉넉히 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옆에 아주 작은 대웅전이 있다. 공양미를 들고 대웅전으로 들어갔다. 2칸밖에 안 되는 아주 작은 대웅전에 작은 부처님을 모셨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서를 등에 지고 동으로 향하고 있었다. 대웅전에서 삼배를 드리고 약사굴로 향했다.

약사전에 삼배를 올렸다. 부처님께 절공양을 하면서도 아주 작게라도 뭔가를 기원한 적은 없다. 그런데 오늘은 엎드려 절하면서 "올해는 정말 몸을 잘 보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빌었다. 몸이 약해지니 마음까지 미미해졌다. 바위에 어마어마한 고드름이 매달렸다. 약사여래 옆에서 샘이 솟아 물이 흐르다 얼어붙었다. 이 물이 다 얼어붙으면 스님은 물을 어찌 쓰시나.

계단을 내려서니 남으로 백악산이 마주 보인다. 그 너머로 속리산 산줄기기 첩첩하다. 요사채 앞에 두세 그루의 오래된 느티나무가 옹위하고 있다. 커다란 개가 컹컹 짖는다. 개는 깔끔하고 잘 생겼다. 두어 번 짖더니 날보고 크게 하품을 한다. 하품하는 개도 수행자처럼 보였다. "서당개 삼년에 풍월을 읊는다더니 석천암 산사의 개는 행자가 되는 모양이다." 낯선 사람에게 경계를 치워버리고 하품을 하는 것을 보면 중대봉 중턱에서 세상 물정을 다 통달한 나한님 쯤으로 보인다.

절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아 돌아 나오려니 문을 열고 스님이 나오신다. 매우 반가워하신다. 차 한 잔 하고 가십시오. 예 차 한잔 주십시오. 합장 인사보다 세속의 인사가 먼저 나왔다.

방은 눅눅하고 서늘하다. 스님이 가스난로에 불을 붙이니 이내 따듯해져서 땀이 났다. 우리는 쉬운 커피를 엷게 타서 마셨다. 스님의 말은 거침이 없다. 그런데 그의 목소리가 어디서 많이 들어온 것 같이 낯익다. 아 그렇다. 황정산 원통암 바윗길을 오를 때 시멘트 깡통을 들고 다니며 바위 위에 계단을 만들던 바로 그 지웅 스님이다. 우리는 구면이다. 하긴 승속이 다르지 않고 전현생이 다르지 않으니 구면 아닌 이가 누가 있을까. 입은 걸어도 가슴은 중생의 마음에 길을 내는 힘이 담겼다. 역사를 이야기하다 보니까 나랑 눈길이 한 방향이다. 아내를 곁에 두고 우리는 시간 반 정도는 소리를 높여 토론했다. 나도 스님이 좋고 스님도 나를 좋아했다.

그럴 때 일어서야 한다. 좋은 감정을 지니고 일어서야 한다. 나는 불쑥 이제 일어서야겠다고 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왔다. 스님의 배웅을 받으며 돌계단을 내려서는데 함박눈이 내린다. 까만 나비들이 하늘 가득 몰려다니며 춤을 춘다. 온 세상이 환희이다. 이제 갈 곳이 한 곳 더 생겼다. 세상이 속 터질 때 속을 터트리지 말고 여기 와서 하늘을 터트리면 된다. 나옹화상이 참선에 들었었다는 약사굴 아래 내가 앉아 있으면 된다. 모롱이를 돌아내려올 때까지 견나한님이 담장 위에 올라가 배웅하고 있었다.

어둔 하늘이 환하게 밝아온다. 차를 세워 놓은 곳까지 걸어 내려올 때 함박눈이 은빛 꽃가루처럼 계속 쏟아진다. 눈은 솔멩이를 돌아올 때까지 내리더니 사기막리를 지날 때 그쳤다. 새해 첫날 속이 탁 트인다. 올해는 조금 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살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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