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물밥(삶과 죽음)

생명

느림보 이방주 2021. 1. 21. 20:20

도무지 앉아서 견딜 수가 없다. 차를 몰아 안산 화랑유원지로 향했다. 살아서 꽃이었던 아이들이 다른 세계의 꽃에 묻혀 있었다. 아가들아, 너희들은 거기 있으면 안 되느니라. 너희는 아직 꽃이 아니냐? 꽃 속에 아이들은 말없이 웃는다.

총리를 찾지 못하는 나라. 총리가 거기 있었다. 장관도 있고 노벨상 후보도 있고, 평화의 사자도 있었다. 천사도 있고 훌륭한 교사도 거기 있었다. 다만 웃고 있을 뿐이었다. 아깝다. 웃고 있는 젊은 생명이 피눈물나게 아깝다. 딱하다. 어린 생명이 딱하다. 하늘도 어이없어 할 세월호 참사를 두고 학부모는 학교를 탓하고 학교나 국민은 정부를 탓하고 정부는 기업을 탓하고 기업은 하늘을 탓하고만 있다.

답답하다. 발이 땅에 붙어버렸는지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바닷바람이라도 쐬자. 대부도에 갔다. 쌍계사 극락보전 약수각에는 용바위 샘이 솟아나고 있었다. 꿈틀대는 용을 양쪽에 거느리고 용왕이 앉아 있다. ‘세월호 실종자 모두의 무사귀환을 기원합니다.’ 바다를 주관한다는 용왕의 말씀은 너무 무책임하고 상투적인 언어로 처마 밑에 걸려 있었다. 그런 성의 없는 용왕에게라도 빌고 또 빌었다. 제발 어린 생명을 돌려보내 주십시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더 답답하다.

지난겨울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명을 살처분, 생매장했다. 조류인플루엔자의 확산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반경 3km라는 살생부를 그어 놓고 살아있는 닭이나 오리를 구덩이에 묻어 버렸다. 어느 지방자치단체장도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드러낸 이를 보지 못했다. 농업 생산물이 땅에 묻히는 것만 안타까워했다. 충북의 어느 군수는 조류인플루엔자가 반드시 확산된다는 근거도 없이 가금류를 살처분할 수 없다고 버텼다. 닭의 생명이 소중해서라기보다 중앙정부의 지원금을 더 받아내기 위한 계책이었을 것이다.

구제역이 창궐할 때도 수많은 소와 돼지를 그렇게 살처분했다. 누구도 소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지 않았다. 다만 돈을 땅에 묻어야 하는 것을 아까워했다. 언론에서는 매몰된 생명들이 부패되면서 나오는 침출수가 인간에게 미치는 환경문제에만 보도의 초점을 맞추었다. 축사는 고기를 생산하는 공장이고, 닭이나 소는 공업생산품이다. 구제역이나 조류인플루엔자는 생산라인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본다. 하나의 고귀한 생명을 아무 잘못 없이 땅에 묻어버린 것에 대한 죄의식은 없었다.

법은 인간에게만 평등하게 적용되겠지만, 신의 사랑은 축생에게도 평등하게 보듬어진다는 진실을 인간들은 잊고 산다. 세상의 주인은 인간이고 섭리는 인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자비로운 신도 이럴 때 노여움을 갖는다. 닭의 생명을 소중히 여겨야 인간의 생명도 신의 존중을 받는다. 인간 생명의 보존은 만물의 생명이 보존될 때만 가능하다.

나는 세월호 참사를 비롯한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형 참사를 신의 노여움으로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기억하고 싶지도 않지만 삼풍백화점 붕괴,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 경주 마우나 리조트 붕괴 같은 어이없는 사건들은 인간의 오만함이 저지른 어처구니없는 재앙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작은 생명이라도 존엄성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

최근 조계종의 한 스님이 가금류와 소 돼지의 무차별 살처분에 대하여 국가 사회적 책임을 강도 높게 비판하여 눈길을 끈다. 가축을 경제적 수단으로만 여겨서 이른바 무차별적으로‘예방적 살처분’을 하는 것은 문화 윤리적 야만국으로 남을 뿐 아니라 신의 노여움까지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구제역 파동 때 생매장 현장에서 죽음에 직면한 수백 마리 죄 없는 돼지들의 울부짖음을 보면서 신의 노여움이 두려웠다. 먹고 먹히는 것이 생태계의 본질이라도 다른 종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과 감사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지방자치단체장이나 농협 축협이 주관이 되어 경건한 위령제라도 올렸더라면 어땠을까 후회스럽다. 처분되는 동물들에게 미안함도, 신에 대한 속죄도 그렇고, 무엇보다 사람들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하는 것이다. 이런 행사가 시민의 감동을 이끌어 생명의 고귀함과 생명을 지키는 마음을 갖게 된다면 어이없는 참사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대 정치는 시민의 정서적 감동을 오래 전에 버렸다. 세월호 참사 이후 서로를 탓하고만 있다. 존경하는 의원님들은 정부를 목소리 높여 질책만 하고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누구도 소홀한 생명 의식을 뉘우치는 사람은 없다. 보다 약한 다른 종에게 대한, 보다 약한 남에게 대한 진심어린 존중이 있었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돌아오는 길에는 희생된 학생들의 밝은 얼굴이 자꾸 차창에 어린다.

(2014.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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