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화엄사에 가는 아내를 전세 버스 정류소까지 전송하러 가는 중이었다. 고라니 주검을 보았다. 큰길에서 국립청주박물관으로 내려서는 작은 길목에 나뒹굴어 있었다. 배가 빵빵한 것으로 보아 변을 당한 지 시간이 좀 지난 것 같았다. 아내가 눈을 돌렸다. 상봉재 쯤에 무슨 볼일이 있었는지 와우산에서 내려와 급히 찻길을 건너가는 중이었겠지. 고라니는 그렇게 돌아갔다.
1994년쯤 금천고에 근무한 적이 있다. 금천동에서 용암동 버스종점으로 고개를 넘으면 보살사로 향하는 중고갯길을 만난다. 용암동이 주택가로 개발되기 전이라 비포장도로에 대형 트럭이 다녀서 울퉁불퉁하고 흙먼지를 뒤집어쓴 가로수 사이로 발 디딜 자리를 보아가며 고개를 넘어야 했다. 나는 종종 영운천 좁은 둑길로 차를 몰아 퇴근했다. 어느 날 퇴근길에 거기서 종산 큰스님을 만났다. 하얀 고무신은 이미 진흙투성이였다. 보살사까지는 십리도 넘는 진흙탕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 차를 돌려 세우고 스님 앞에 섰다.
“스님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
모처럼 스님에게 대단한 일이나 할 것처럼 말씀드렸다. 스님은 빙그레 웃었다.
“저기가 중고개요. 중이 걸어서 넘는 고개라오. 중은 걷는 것이 수행인데 바쁜 일도 없이 신도님네 차를 얻어 타고 편하게 다니는 것이 무슨 소용입니까.”
나는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당시만 해도 승용차를 몰고 다니는 교사가 많지 않아 으스대려던 속물근성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다.
“스님 벌써 차를 돌렸으니 되돌리려면 절 마당까지 가야 합니다. 빈차로 가느니 모시고 가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보살사 마당까지 스님과 인연을 맺었다.
연구실을 함께 쓰는 동료들이 마실 물을 뜨러 절에 올라갔다가 스님을 만났다. 스님은 마당을 쓸고 계셨다. 쌀쌀한 날씨에 깨끗한 마당을 건성건성 쓸었다. 마음은 검불 너머에 두신 것 같았다.
“처사님 물 뜨러 자주 오십니다.”
내 인사를 건성으로 받는 큰스님께 물을 함께 마시는 사람이 여럿이라는 것과 이 물을 마시는 이들이 아이들 대학입시를 도와주는 중요한 일을 한다는 것과 아울러 부처님의 자비의 물을 길어가는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하였다.
“좋은 복을 지으시는군요.”
알 듯 모를 듯한 스님의 말씀을 들으며 산을 내려오곤 했다. 그 후 큰스님께서 ‘仁泉’이란 佛名을 지어주셨다. 내게는 가당치않지만 좋은 의미이기에 받아들이고 잊지는 말자는 생각으로 살았다.
혜광당 종산대종사慧光堂 宗山大宗師께서 지난 6월 23일 입적하셨다. 대한불교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화엄사 조실이라는 교단에서 맡은 큰 직책보다 ‘하루에 단 5분만이라도 참선해야 한다.’라는 그분의 말씀이 모든 신도들을 감동하게 했다. ‘소크라테스는 참다운 사람을 찾기 위해 대낮에도 공원에 등불을 가지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나는 한평생 나보다 못한 사람을 찾아볼 수 있기를 원했지만 아직까지 그런 사람을 찾지 못했을 뿐 아니라 나와 비슷한 사람조차 만나지 못했습니다. 모든 사람을 존경합니다.’라고 한 겸손의 말씀도 역시 우리를 감동하게 한다. 종산스님은 ‘대못 수행’으로 널리 알려진 분이다. 몸가짐을 흐트러지지 않게 하려고 널빤지에 대못을 박아 옆에 세워두고 참선에 든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법덕이 빛나는 종산 스님도 말년을 매우 외롭게 보냈다. 오랜 병마와 싸워야 했고 신도들과의 만남도 쉽지 않았다. 제자들도 큰스님의 울타리가 되어드리지 못한 것 같다. 수행을 강조하고 겸양으로 사신 분도 제자를 두는 일은 뜻대로 이루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 지난 부처님 오신 날 법요식 사회를 맡은 내게 혜문스님이라는 이가 상좌인 원각스님을 ‘큰스님’이라 불러달라고 했다. 나는 내심 의아했지만 원각스님이 사양하지 않아 그냥 그렇게 칭했다. 그러면서도 직지선원에 누워 계신 큰스님이 듣는 것 같아 불안했다. 왜 바보처럼 거부하지 못했나. 가슴을 쳤다. 나는 불경스럽게도 상좌들이 큰스님의 분신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언젠가 내게 말씀하셨던 ‘좋은 씨앗을 심는 일’이 큰스님 소망대로 되지 않은 것이다. 몸과 마음이 피폐해졌을 때 울타리가 되어줄 든든한 상좌를 두지 못하신 것 같았다. 이럴 때 나는 나를 돌아본다.
‘좋은 씨앗’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열 평쯤 주말농장을 얻어 아침저녁으로 사랑을 쏟는 친구 불온선생은 '열매는 우리의 먹을거리로 익어가는 것이 아니라 씨앗을 위해 살을 찌우는 것'이라는 말을 내게 해줬다. 미처 수확하지 못하여 썩은 호박에서 봄을 맞아 새싹이 이들이들하게 뿌리를 내린 것을 보고 깨달았다고 한다. 나는 지나가듯이 쉽게 하는 이 말씀을 듣고 또 나를 돌아보았다. 작은 땅에 농사를 지으면서 남들이 수만 평에서도 이루지 못한 깨달음을 얻어낸 그의 혜안이 경이롭다. 죽은 동물이 썩어 대지의 영양이 되듯 식물도 향기로운 제 열매를 썩혀 새싹을 키우는 것이다.
인생무상이란 말이 있다. 無常이란 항상성은 없다는 뜻이다. 인생은 변화해야 가치 있고 어차피 변하게 마련이다. 열매가 썩어 씨앗을 키우고 다시 열매가 맺히는 순환 말이다. 향기로운 과육을 아낌없이 썩히는 삶이 미래에 튼실한 싹을 틔우게 마련이다. 씨앗이 ‘因’이라면 그를 키우는 과육은 ‘緣’이다. 종산 큰스님께서도 인이든 연이든 뭔가 미흡함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대못 수행도 상좌들에겐 하늘에 떠 있는 구름처럼 감동으로 내려앉지 못한 것일까.
후인들에게 권력을 나누고 곧은 길을 일러준 정치인은 미래가 튼실하다. 후학에게 학문이라는 영양을 진정으로 나눈 훈장은 스승이 된다. 정치가나 훈장이나 스님이나 향기로운 과육을 씨앗에게 내 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나를 버려야 진정 나를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과육을 내놓아도 씨앗이 시원찮으면 푸릇푸릇 이들이들한 싹아지를 기대하기 어렵다.
오늘 화엄사 각황전에서 종산 큰스님 다비식이 있다. 구례 고을에 꽃집이 동이 났다고 한다. 원각 원일을 비롯한 상좌들이 모두 참석했을 것이다. ‘스님 불 들어가요’하는 고함과 함께 충천화광衝天火光이 씨앗이 되든 향기로운 과육이 되든 상좌스님들의 머리에 원광 圓光을 두르는 기적이라도 일어났으면 좋겠다.
오늘 아침 변을 당한 고라니의 주검은 썩어 대지의 영양이 될 것이다. 종산 큰스님도 원광이 되어 천강에 가득하기를 발원하면서 나는 어떤 과육으로 썩어가야 할까 어리석은 내게 묻는다.
(2020. 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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