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물밥(삶과 죽음)

바람소리

느림보 이방주 2018. 4. 20. 06:31

바람소리

 

 

새벽이다. 아내의 코고는 소리에 잠이 깼다. 잠자리가 음전한 아내인데 친구들과 여행이 어지간히 요란했던 모양이다. 거실로 갈까, 서재로 갈까 하다가 모로 누웠다. 조용하다. 아내를 바라보고 베개에 오른쪽 귀를 묻고 모로 눕기만 해도 세상은 고요해진다. 왼쪽 귀에는 바람소리가 ‘쐐애애’ 여전하지만 감각은 이미 무뎌졌다.

귓속에서 바람이 분다. 이명耳鳴이다. 봄바람에 마른나무 잔가지가 휘파람을 불 듯, 여름 오후 수매미가 암컷을 부르듯, 한겨울 참나무 남은 이파리가 삭풍에 떨리듯 바람이 분다. 때로는 고막 너머에서 귀곡성처럼 울어대서 새벽이 괴롭다. 아내 코고는 소리쯤이야 오른쪽 귀만 막으면 되지만, 곤한 새벽에 왼쪽 귀 저 안쪽 바람소리는 막을 길이 없다. ‘망진자호야亡秦者胡也’라더니 새벽을 괴롭히는 건 외환이 아니라 나의 이명耳鳴이다.

내게 이명이 온 건 마흔을 막 넘어선 팔팔한 때이다. 고3 담임을 연속으로 다섯 해쯤 했을 것이다. 돌아보면 입시철 스트레스는 정말 끔찍했었다. 다른 아이들이 거의 합격자 명단에 들었는데 미더웠던 영미만 2월 20일이 되어도 추가합격자 연락도 받지 못했다. 일주일만 지나면 신입생 선발은 끝나버린다. 착한 영미는 재수란 지옥에 빠져야 한다. 애가 닳았다. 영미 엄마는 하루 세 번은 전화를 해댔다. 26일쯤 합격 전화를 받았다. 이제 끝났다. ‘휴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왼쪽 귀에서 매미가 울었다. 운명의 바람소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명은 스트레스로 시작한다는데 하루 이틀 편하게 지내면 그치겠지 기대해봤지만 소용없다. 신이 원망스럽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바람소리로 형벌을 내리나. 전화질을 해대던 그 엄마는 멀쩡한데 애먼 내 귀에만 풀무질을 해대는 까닭이 뭔가 말이다. 하루 이틀을 기다린 바람소리는 이십년이 넘어도 그치지 않는다. 저주스럽다.

어떤 이비인후과 전문의와 인연이 되어 한 5년 그 분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난 그냥 단골환자에 지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해가 갈수록 각종 바람소리로 분화되었다. 변덕스러운 날은 솔바람으로 솔솔 불다가도 갑자기 까치소리까지 섞어대며 성질을 냈다. 때로 태풍으로 몰려오다가 ‘우두두’ 우박까지 쏟아 부으며 심술을 부렸다. 스트레스가 심한 날 저녁에는 착암기로 바위 뚫는 소리를 냈다. 저렇게 힘차게 뚫어대는데 귀는 뚫리지 않고 점점 꽉 막히는 느낌은 무엇일까. 안에서 나는 소리는 점점 크고 가까워지는데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점점 더 멀어져 아련했다. 난청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소리가 괴로웠다. 괴로워서 견딜 수 없었다. 멀리 떨어진 자리나 맞은편 이야기는 전과 다름없이 들리는데 왼쪽 가까이 앉은 사람의 이야기는 아득하기만 했다. 감미로운 귓속말도 내겐 고통이었다. 술좌석 같은데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도 내겐 그냥 ‘왁자’와 ‘지껄’이었다. 소리의 색깔도 거리도 방향도 헛갈렸다. 치료를 포기한 원장은 자기의 모교라며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병원을 소개했다. 여러 가지 비싼 검사를 다 하더니 ‘연세가 있으니 그냥 살라’고 한다. 원인은 연세이고 처방은 그냥이다. 난청이 된 것이다.

난청은 나를 바보로 만들었다. 왼쪽 귓속질에 알아듣기나 한 것처럼 거짓 웃음 지어야 했다. 의미를 알아보려고 그의 입모양을 살피려는 시선은 억지로 잡아매었다. 환갑이 지나서도 내가 난청이라는 설명을 하기가 창피했다. 사람들 만나기가 싫어졌다. 이명이 난청이 되니 인간관계까지 막히는 기분이었다.

언젠가 여행 중에 엄청나게 코고는 친구와 한방을 쓰게 되었다. 다들 잠을 설쳤다고 했지만 나는 오른쪽 귀를 베개에 묻고 잘 잤다. 바람소리 덕을 본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나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수군거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아 좋다. 때로 가족들의 말은 못들은 척하면 된다. 가족회의에서 정한 일을 깜빡 잊어 지키지 못했을 때도 못 들었던 것으로 하면 마음 편하다.

살다 보면 들을 필요 없는 소리가 있다. 어마어마하게 큰 소리가 날 것 같은 지구의 공전과 자전하는 소리나, 유리창에 붙어 연애질하는 파리새끼들의 속삭임은 들리지 않는다. 필요 없는 소리이므로 주물주가 다 막아 주었다. 살다보면 때로 듣고 싶지 않은 소리도 있다. 고운孤雲 최치원은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이란 칠언절구에서 세상의 시비하는 소리를 첩첩 산과 흐르는 물소리가 막아주었다고 좋아했다. 그 시기에도 속셈 정치가 있고 편향 언론이 시끄러웠던 모양이다. 그런데 나는 높은 산이나 계수 소리 없이도 스스로 내는 바람소리가 시비성是非聲을 막아주니 이야말로 신의 은총이 아니겠는가. 바람소리는 신이 내린 은총의 소리막이다.

이명은 바람의 소리이다. 싫은 소리만 막아주는 것이 아니라 바라는 소리만 골라주는 바람의 소리이다. 이상할 정도로 아내의 말소리는 다 들린다. 오른쪽에서 말하거나 왼쪽에서 말하거나 속삭임이거나 다 들려서 난청이라는 것을 잊어버린다. 손자들의 속삭임도 딸의 말소리도 며느리의 이야기도 다 들린다. 반백년 친구 연선생의 말도 전후좌우를 가리지 않고 다 들린다. 필요 없는 소리는 안 들리고 필요한 소리는 다 들린다. 그러니 바람소리는 진정 바람의 소리이다.

바람의 소리는 신의 감응이다. 세상 시비성이 들리지 않으니 이제 소리 없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민들레꽃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의 속삭임이 들려온다. 미호천에 나가면 마른 갈대와 수런거림을 나눌 수 있다. 자연이 주는 섭리의 말씀이 들리는 것이다.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면 깨우침의 말씀이 들려온다. 영혼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노년에는 쓸데없는 말은 듣지 말고 깨달음의 말씀을 들으라는 신의 계시이다. 소리로 듣는 것보다 지혜로 듣는 것이 참 진리라는 가르침이다.

이명은 저주가 아니라 젊은 날에 힘들여 심은 복의 열매라 생각하기로 했다. 바람소리는 허튼소리를 막아주기도 하고, 바라는 소리만 들리도록 걸러주기도 하는 바람의 소리니 말이다. 바람소리야말로 지혜의 소리만 들으라는 신이 내린 보상이다. 연세가 되었으니 그냥 살라는 젊은 의사의 말은 신을 대신한 예지의 말씀이었다.

세상 사람들이여 한쪽 귀에 바람소리 하나씩 달고 살아 보시오. 아내의 코골이도 저리 잔잔해지지 않소이까.

 

 

(2018.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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